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7강(11.4)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08 15:32
조회
151
후기가 늦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11고원, 〈1837년-리토르넬로에 대해〉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후기를 쓰기 위해 (채운샘이 주문?하신대로) 유튜브에서 피에르 불레즈의 Notations를 오케스트라 버전과 피아노 버전으로 찾아 들어봤습니다. 소감을 말하자면, '생각보다 들을 만 하다?'입니다^^; 특히 피아노 버전은 가끔 들어도 좋겠다, 싶더라구요. Notations는 뭐랄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 즉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아름다운 화음들이 펼쳐지고, 모르는 사이에 메인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음악은 분명 아닙니다. 제가 받은 느낌은, 클래식 악기들을 활용한 영화음악 같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론 이런 종류의 스코어는 천만 영화나 블록버스터에는 쓰일 수 없겠죠). 유튜브에 재밌는 댓글이 있었는데, 자기는 누군가를 고문하고 싶을 때 이 음악을 튼답니다. 그리고 만약 이걸 즐기면 그 사람은 마조히스트라고. 혹시 본인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있는지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불레즈를 추천드립니다(클릭).

제가 놀랐던 것은, 불레즈가 특별히 오케스트라 편성에 없는 악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연주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현대음악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편견은, 그것이 단지 익숙한 박자나 화음, 멜로디를 해체하는 데 치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레즈의 음악은 단순히 박자를 깨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완벽하게 낯선 리듬과 너무나 이질적인 하모니를 구성합니다. 특히 영상의 끝 부분에 가면 그 기이한 리듬과 하모니가 절정에 이르는데, 저는 말 그대로 제 감각이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스스로의 감각을 낯설게 느끼는 수행을 해보고 싶으신 분들께도 불레즈 음악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아무튼 저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저의 의식이 이미 알고 있는 정서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의 변용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1고원은 들뢰즈-가타리의 예술론에 해당하는 고원입니다. 특히 들뢰즈의 경우에는 《감각의 논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 《시네마 Ⅰ, Ⅱ》같은 책들에서 감각과 정서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독특한 미학을 전개했다고 하는데요, 들뢰즈가 다양한 예술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합니다. 11고원의 리토르넬로도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개념이고, 제목에 나오는 1837이라는 날짜도 슈만이 환상 소곡집을 발표한 해라고 합니다. 들뢰즈는 왜 음악을 중요시한 것일까요? 그것은 음악이 그 특성상 언어 표상이나 이미지 표상을 넘쳐흐르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재현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대상을 상기합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것과 같은 기이한 회화를 보면 다짜고짜 '이건 대체 뭘 그린거야?'라고 묻게 되죠. 이에 비해 음악은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고, 표상 불가능한 강도(intensity)로서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어떤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각적인 것은 시각적인 것보다 탈영토화의 계수가 높습니다. 소리는 진동과 공간을 매개로 전달되기 때문에 전달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해석과 왜곡이 일어나죠.

표상을 넘쳐흐르는 음악의 이러한 특성은, 예술을 그것의 작동이라는 차원에서 보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음악은 회화처럼 어떤 사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주나 노래가 구성해내는 고유한 리듬과 강렬도와 시간성 자체로서 존재하죠.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용 이외에 '음악'이라고 우리가 지시할 수 있는 대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여가수 요제피네의 지극히 평범한 휘파람도 그것이 요제피네와 관객들 사이에서 고유한 리듬과 시간성을 구성해내는 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듯, 들뢰즈-가타리에게 예술이란 예술작품도, 美를 추구하는 인간-예술가가 독점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활동도 아닙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나뭇잎을 뒤집고 지저귐으로써 자기 영토를 구성해내는 새의 활동은 예술의 한 근본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들에게 예술이란 고유한 강도, 리듬, 시간성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리토르넬로는 바로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예술론이 나타나 있는 개념입니다. 리토르넬로란 '후렴구'를 말하는데, 이는 음악만이 아니라 사회, 시대, 삶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채운샘이 말씀하셨듯 어떤 음악은 그 자체로 시대적입니다. 음악이 시대에 대해서 말하거나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세한 선율과 음색조차도 이미 배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반대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음악이 시대성을 갖는 만큼 모든 시대는 그 고유한 음악성(리듬, 후렴, 강도)을 갖는다고요. 가령 자본주의의 리토르넬로는 미디어가 생산해내는 리듬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속성은 바로 차이 없는 반복, 재생산이죠. 미디어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어마무시한 속도로 전송하고 재생산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러한 반복(후렴구)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 같은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리듬, 속도, 그 리토르넬로 자체에는 개인들을 소비자로 주체화하는 강제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저는 최근에 제 또래이기도 한 설리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 찜찜한 느낌, 설리의 죽음이 소비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런 느낌은 미디어가 그 죽음에 대해 충분히 '도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거나 그에 대해 진실한 애도를 표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자살에 대해서 어떠한 '사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유도, 다시 말해 어떤 '차이'도 생산하지 못한 채로 미디어에 의해 그 사건이 반복·재생산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십을 소비하고 스캔들을 관음하는 소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윤리의 문제는, 어떤 사건에 대해 얼마나 '올바른' 스탠스를 취하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마주하여 어떠한 사유를 작동시키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온갖 복잡하고 난해한 흐름들을 열어내는 것 같지만, 그 리토르넬로는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책에서 저자는 팝문화에 있어서 2000년대가 재탕, 재발매, 재가공, 재연, 재조명의 시대임을 보도록 합니다. 60년대의 사이키델릭, 70년대의 포스트펑크, 80년대의 힙합, 90년대의 레이브처럼 '앞으로 나가는 감각'의 음악이 전무하며, 정보의 흐름이 빨라짐에 따라 감각의 변이는 점점 더 더뎌지고 있고, 20~30년도 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향수병에 빠져 과거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 영화에서도 음악에서도 패션에서도 끊임없이 리부트와 리메이크와 복고가 계속되죠. 아이러니 한 것은 이처럼 '과거에 중독된' 시대인 지금은 동시에 다른 시대에 대한 경외심을 완전히 상실한 시대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시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시대의 다른 문화나 사유와 상호되기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소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음악시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리토르넬로가 우리의 감수성을 인도하고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보여줍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대신에 친숙하고 낯선 온갖 것들을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앤디 워홀은 일찍이 자신의 판화 작업을 통해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 재생산하는 미디어를 패러디하기도 했다고 하죠.

이처럼 자본주의적 리토르넬로는 차이 없는 반복을 통해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시각과 청각과 삶의 방식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감정의 반복, 신체의 반복, 서사의 반복. 이처럼 자본주의는 경제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특별한 방식으로, 공간을 특별한 방식으로, 신체와 정서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기술을 지닌 것이 자본주의죠. 최근 절탁NY에서 읽고 있는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다른 사람보다 더 적은 시간 안에 어떤 일을 해내는 것이 오늘날의 미덕"(즐거운 학문, 298쪽)이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 혹은 산업화된 사회의 문제를 시간과 역량에 대한 인식의 차원에서 사유합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시간이란 하나의 척도에 따라 수량화할 수 있는 분할가능한 대상이며, 역량이란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효율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미 니체는 시간과 힘과 경험을 하나의 척도에 비추어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천박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각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자본주의와 싸울 수 있을까요? 특히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노동자-주체로서의 개인들을 착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감각과 지각과 생활양식을 조직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고자' 한다면, 어떠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낼 것인가, 어떠한 후렴구를 창조할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삶을 예술로 만들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차이'라는 것이 우리가 실체화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닌, '차이화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차이를 생산한다는 것은 곧 특정한 반복을 생산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리토르넬로 개념에 깃들어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고민도 이와 같습니다. 반복은 우리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지층, 수목, 영토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그 안에서 달아나는 선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탈영토화하는 움직임과의 관계 속에서 영토를 구성하는 것, 차이화하는 운동 속에서 반복을 사유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쩌면 삶의 모든 문제들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삶에서 어떤 문제를 만날 때 그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가령 늘 시간이 없어서 허덕이는 사람은 어떻게 더 알뜰하게 시간을 아껴 써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문제는 리듬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삶을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가 사물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리듬 자체를 바꿔야 시간 자체도 다른 리듬을 타겠죠. (이반 일리치가 보여주듯) '시간 낭비'라는 말을 달고 사는 우리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 속에는 이미 우리 자신을 언제나 '시간 부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지각의 방식과 관계의 양식, 리토르넬로가 작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듬을 만든다는 것, 리토르넬로를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① 먼저 카오스로서의 어둠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아이가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 아이의 노래는 어둠-카오스 속에서 영토성을 생성합니다. ② 어둠(카오스) 속에서 우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노래는 일종의 '소리 벽(un mur du son)이 되어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리듬을, 그리고 그로부터 '환경'을 생성해냅니다. ③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영토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자신의 영토와 외부의 세계가 통하도록 창을 내는 것이 필요해집니다. 자신이 구축한 영토로 환원되지 않는 생성을 포착하는 것, 다시 말해 늘 생성을 마주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생성에 열려 있을 수 있도록 영토를 뚫고 다시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 이러한 세 단계는 리토르넬로가 예술이 나아가야 할 세 단계이기도 하고 리토르넬로가 지니고 있는 세 개의 층위(방향적 선분과 하부배치물, 차원의 성분과 내부배치물, 이행의 성분과 상호배치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 단계는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리듬을 형성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이나 존재 자체에, 그것이 무질서하게 혼돈 속으로 흩어져버리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반복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낯설고 공포스러운 어둠을 친숙한 공간으로 출현시키는 아이의 노래처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생성되는 질서와 반복은 카오스의 대립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카오스는, 클레의 '회색' 개념처럼, 단순한 無가 아닌, 그 자체 안에 운동을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색, 영토, 리듬들에 잠재되어 있으나 그것들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리듬을 형성한다는 것은 카오스를 질서로 대체하거나 무정형적 세계를 절대적인 척도(박자)를 적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재태로서의 카오스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카오스로부터 성분이 주기적으로 반복될 때(코드화 될 때) 특정한 시공간 블록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환경"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의 시공간 블록을 형성하는 것으로는 아직 '리듬'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환경의 성분이 단지 코드적,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탈코드화될 때"(채운샘 강의안 中) 영토화가 이루어지고 고유한 리듬, 스타일이 만들어집니다. 이를 들뢰즈-가타리는 반복이 표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가의 경우에는 붓질 자체가, 영화감독으로 치면 하나의 숏이 서명의 지위를 획득할 때 반복이 스타일을 이루게 되고 영토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성을 얻기 위해서는 탈코드화의 과정이 수반되어야합니다. 가령 작가는 언어의 기능적 용법을 탈코드화하여 고유한 맥락 속에 배치할 때 자기 자신만의 문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스타일,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 자신의 영토를 구성한다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주어진 코드로부터 이탈하여 카오스를 향하는 창을 내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고유한 반복을 형성한다는 것은 언제나 차이화의 산물이며, 자신의 영토를 구성하는 영토화의 운동은 언제나 탈코드화를 동반합니다. 환원 불가능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예술의 출발이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술의 문제가 어떻게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의 창조라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다음주 강의를 기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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