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8강(11.11)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17 19:06
조회
194
이번 주에 채운샘께서 복사해서 나눠주신 11고원의 도입부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리토르넬로가 가지는 세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는 예술이 지니는 세 측면이기도 합니다. 우선은 암흑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가 노래를 시작할 때 암흑, 즉 카오스에는 하나의 안정된 점이 생겨납니다. 다들 한번쯤 경험해본 것이기도 하죠. 완벽하게 어두운 밤의 시골길 같은 곳을 걸을 때 노래를 부르면 낯선 길은 우리에게 적대적이기를 그치고 조금씩 친숙한 공간으로 변모해갑니다. 이처럼 예술은, 발생적으로 볼 때, 하나의 안정성을 만드는 일입니다. 안정된 중심을 형성하는 것. 일시적인 점이 아니라 하나의 지속적인 영토, 안식처를 만들어내는 것이 리토르넬로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안식처가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공간을 한정하기 위해서는 성분들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콧노래를 부르거나 특정한 영역을 둘러싸고 원을 그리는 등의 방식으로 영토 안에서 일정한 것이 순환되도록 할 때 한정된 공간이 구성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측면은 한정된 영토를 외부를 향해 열어내는 일입니다. 다만 아무런 영토나 형식 등을 완전히 파괴하는 방식으로 외부(카오스)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 안에서 외부를 향한 창문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도주선을 구성하는 문제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간단한 세 단계를 통해 발생적 차원에서의 예술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1고원은 들뢰즈-가타리의 예술론에 해당하기도 하는데, 이때 이들은 예술을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연적인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예술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 같은 것이 아니며 근본적으로는 생명 활동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채운샘은 가시고기의 예를 들어주셨는데요, 수컷 가시고기는 교미를 위해 암컷을 유인할 때 지그재그로 헤엄을 치며 독특한 춤을 춘다고 합니다. 또 지난주에 언급하신, 노래를 부르며 주변의 나뭇잎을 뒤집는 새를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동물들의 본능적인 행동들은 고유한 표현성을 띱니다.

동물학자들은 이러한 행동들로부터 지극히 기능적인 부분에만 주목합니다. 가시고기의 춤이나 새들의 지저귐을 교미나 영역표시와 같은 특정한 목적에 종속된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죠. 이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다양한 표현형태가 필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행동들을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 일종의 예술행위로 봅니다. 가시고기의 춤이나 새들의 지저귐은, 분명 특정한 기능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창조하는 예술행위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매순간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또 외부의 온도에 따라 스스로의 체온을 조절하면서, 시각적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면서 우리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우리의 리듬을 조직해내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단한 해석은 우리가 이 세계 안에 거주하는 독특한 방식으로서 고유한 표현적 특질을 획득합니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예술적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리토르넬로의 세 측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환경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행위나 현존에 특정한 표현성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에는 세 단계(혹은 측면)가 있습니다. 우선 아이가 마주하는 어두운 밤, 즉 카오스(미분화된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카오스란 질서를 결여한 상태가 아니라 모든 질서를 함축한 상태입니다. 질서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가 카오스이며, 코스모스(질서)란 사실 이러한 미분화된 잠재성의 차원으로서의 카오스로부터 발생한 일시적 세계일뿐입니다. 카오스를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질서나 영토를 그 자체로 실체화하고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힘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비가시적인 차원을 사유하고 긍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 것들 또한 온전히 긍정할 수 없습니다. A를 긍정한다는 것은 A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 A가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측면과 더불어서 A를 긍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단한 변화'라는 잠재적 차원과 더불어서 그 과정 가운데 한 국면으로서의 A를 긍정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가티리적인 의미의 긍정입니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다양체로서의 세계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영토, 지반, 질서 등등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에 있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즉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도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과학 저널리스트 피터 브래넌에 따르면 우주의 차원에서 볼 때 지구는 한 번도 '같은 것'이었던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마치 독립적이며 고정되어 있는 실체로서의 '지구'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이 여기며 '우리의 지구' 같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사실 지구가 지금과 같은 '우리의 지구'였던 것은 지구의 역사를 볼 때 아주 최근의 일일 뿐입니다. 5억 4000만 년 전의 지구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돌아다니면서 다른 유기체를 먹는 동물이 아니라 미동도 하지 않는 에디아카라기의 프랙털 유사 생물체였다고 합니다. 공룡 같은 동물들이 지구를 지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그리고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 있고난 뒤 인간이 탄생한 뒤로는 처음으로 동물에 의해 지구가 '관리'되는, 지구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릴 전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밀히 말하자면 여전히 ‘지구’였지만, 이 행성은 일생에 걸쳐 완전히 다른 여러 세계로 존재"해왔습니다. 지구는 언제나 그 위에 존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왔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성조차도 부단한 생성 속에서 일시적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일진대, 인간이 만들어낸 영토와 질서는 오죽할까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멸망 또한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가 어떻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함과 더불어 세계를 믿기. 이것이 영토에 갇히지 않고 카오스를 향해 창을 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리토르넬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항상 일정한 영토를 만들어내는 것인 동시에 일정한 차이를 조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영토 속에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탈영토화의 움직임을 조직해낼 수 있으며, 동시에 언제나 영토는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힘들과 더불어서만 영토로서 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탈영토화-영토화-재영토화는 하나의 세트라고 채운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의 세 단계에 적용하자면, 중심과 영토를 만드는 일과 그로부터 달아나는 선을 그리는 일은 언제나 동시적이며 보완적인 관계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토르넬로는 카오스로부터 일정한 리듬을 구성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영토 만들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영토화란 언제나 탈영토화하는 움직임과 더불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리토르넬로는 탈영토화를 구성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예술의 문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채운샘은 D.H. 로렌스의 글을 인용하며 리토르넬로 개념에 함축된 들뢰즈-가타리의 예술론을 좀더 심화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때 핵심적인 것은 예술이란 언제나 카오스를 대면하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로렌스에 따르면 인간은 카오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약간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개체적 실존을 지닌 존재로서 생성 그 자체를 끊임없이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정된 견해를 만들어내고 그 뒤에 숨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코스모스를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카오스 속에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로렌스는 그런 점에서 코스모스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카오스에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카오스로서의 세계 속에서, 동물이나 꽃은 인간처럼 견해를 만들어 내거나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카오스에 직면하여 자신의 리듬을 구성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에 비해 인간은 집을 지어야 하죠. 견해와 의견과 표상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는 잠시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카오스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인간은 우산을 펼치고 질서 속에 살아간다고, 다시 말해 비를 맞지 않고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산을 쓸 때 인간은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대신에 우산 안에 하늘을 그립니다. 그러고는 우주와 함께 살아간다고 믿어버리죠. 그런데 후손들에게 남겨진 이 우산은 하나의 돔, 견고한 천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우산을 완전히 치울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산을 칼로 그을 수 있습니다. 아니,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우산을 쓰고 하늘을 가리지만, 그 또한 생성 안에 있다는 점에서 우산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산을 찢어서 카오스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할 수 있습니다. 안식처에 창문을 내는 것이죠.

로렌스와 들뢰즈는 현대 예술의 과제를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고전예술과 낭만주의 예술은 '창조'와 '여기 없는 것에 대한 꿈'을 자신들의 목표이자 동기로 삼았습니다. 로렌스와 들뢰즈가 보기에 현대의 예술의 과제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있지 않은 세계에 대한 꿈꾸기도 아닙니다. 이들은 현대적인 예술이 소수적인 것의 발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술을 자연의 차원에서, 세계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예술을 보았기 때문이죠. 예술 작품을 볼 때 들뢰즈는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고 있는지 얼마나 훌륭한 형상을 창조해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예술이 보이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이고 들리게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지각불가능한 차원에서 어떤 것을 지각하게 해주는 것이 들뢰즈가 이해하는 예술입니다. 즉 우산이 칼집을 내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로렌스는 새로운 예술은 발생적 차원으로서의 '현재'를 노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경로로 예술을 향유하고 또 예술에 대한 나름의 취향을 형성하면서도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의 욕망을 규정하는 배치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입니다. 단지 예술'작품'이 예술이고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를 따라서 예술을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도 한번쯤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채운샘은 이러한 질문이 우리의 감각, 정서, 신체, 욕망을 조건 짓는 배치와의 관계 속에서 제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때보다도 일원적으로 박자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어떤 리듬을 발명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박자화되어 있는 우리의 감각에 대해 느끼는 문제의 지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어설프게 들뢰즈-가타리를 읽으면 '영토'는 나쁜 것 '탈영토화'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도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해왔고요. 그런데 이번 11고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들뢰즈-가타리에게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는 사실 동일한 하나의 과정 속에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전제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탈영토화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낸다는 문제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탈영토화와 영토화를 동시적으로 사유하는 것, 영토를 벗어나는 움직임과의 관계 속에서 영토를 사유하고 또 영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고유한 영토를 형성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표현적 질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한데, 이러한 표현적 질은 어떠한 몸짓이 고유한 규칙성을 만들어낼 때 획득됩니다. 즉 자신의 고유성,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종의 수련이 요구됩니다. '생긴대로', '내키는 대로'하는 것은 스타일도 자유도 아니겠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카오스로 흩어져버리거나 하나의 영토 안에서 익숙한 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될 뿐입니다. 문제는 고착적 반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련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업이 그러한 수련일 것이고, 불교의 승가공동체에서는 탁발을 하고, 법문 듣고 선정을 하는, 그들의 일상이 이러한 수련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고착화된 반응양식이라는 하나의 영토로부터 다른 길을 내기 위한 수행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만 '남다른' 양식은 발명됩니다. 즉 탈영토화의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마약을 하고 일탈을 하고 무언가를 위반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남다른 일상의 리듬들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스타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예술 고유의 문제가 아니라 삶 일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삶의 예술이라는 것이 문제로 설정되지 조차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는 주류적 무리로부터 어떻게 낙오되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죠.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사회적 관계와 단절하고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려는 작은 시도들도 쉽게 정치의 문제 혹은 저항의 문제로서 문제화되기 쉽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삶이 전면적으로 박자화되어 있기 때문에 도처에서 저항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죠.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해서조차 어떻게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스스로 능동화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삶이 나를 통해서 예술적으로 표현되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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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8 08:13
    스타일을 만든다는 것이 제멋대로 영토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왔었는데, 이번 강의에서 스타일 또한 영토를 구성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 일련의 수련의 과정이 동반되어야한다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