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지북유 4~7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9-04-01 17:08
조회
174
4.

舜問乎丞曰:道可得而有乎?

:汝身非汝有也, 汝何得有夫道?

舜曰:吾身非吾有也, 孰有之哉?

:是天地之委形也., 生非汝有, 是天地之委和也., 性名非汝有, 是天地之委順也. 孫子非汝有, 是天地之委蛻也. 故行不知所往, 處不知所持, 食不知所味. 天地之强陽氣也, 又胡可得而有邪!

순 임금이 승()에게 물었다. “()는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말했다. “당신의 몸도 당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당신이 어찌 를 소유할 수 있겠는가?”

순 임금이 말했다. “나의 몸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이 말했다. “이는 천지가 형체를 맡긴 것이다. 삶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는 천지가 조화를 맡긴 것이다. 본성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는 하늘이 도리를 맡긴 것이다. 자손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는 천지가 매미껍질을 벗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도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고, 머물러도 지녀야 할 것을 모르니, 먹어도 단맛을 알지 못한다. 천지의 양기가 작동하니, 또 어찌 [‘] 소유할 수 있겠는가!”

 

유(有)는 ‘소유하다’, ‘가지다’의 뜻이다.

형(形)은 ‘형체’, 화(和)는 기가 모인 상태, 순(順)은 이치를 벗어날 수 없는 필연성, 세(蛻)는 자손은 단지 매미허물과 같다는 뜻이다.

지(持)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미(味) 진리의 맛을 뜻한다.

 

5.

孔子問於老聃曰:今日晏閒, 敢問至道.

老聃曰:汝齊戒, [+]而心, 澡雪而精神, 掊擊而知! 夫道, 窅然難言哉! 將爲汝言其崖略.

공자가 노담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여유로우신 듯하니, 감히 지극한 도()에 대해 여쭙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너는 마음을 가다듬어서, 네 마음에 막힌 것을 흐르게 하고, 네 정신을 하얗게 씻어내고, 네 지식을 부수어라! 무릇 는 눈이 휘둥그레지듯 말하기 어렵도다! [그러나] 너를 위해 그 대략을 말해보겠다.

 

안한(晏閒)은 ‘편안하다’, ‘여유롭다’는 뜻이다. 옛날에 제자가 선생님을 추억하며 남긴 글들인 언행록을 보면, 금일안한(今日晏閒)과 같은 표현이 자주 보인다고 한다.

소약(疏[氵+蘥])은 막힌 것이 탁 뚫리는 것을 말한다.

이(而)는 ‘당신’이란 뜻이다.

부격(掊擊)은 쳐서 부수는 것이다.

요연(窅然)은 눈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말한다.

애략(崖略)은 ‘대강’을 뜻한다.

 

夫昭昭生於冥冥,有倫生於无形,精神生於道,形本生於精,而萬物以形相生,故九竅者胎生,八竅者卵生. 其來无迹, 其往无崖, 无門无旁, 四達之皇皇也. 邀於此者, 四肢强, 思慮恂達, 耳目聰明, 其用心不勞, 其應物无方. 天不得不高, 地不得不廣, 日月不得不行, 萬物不得不昌, 此其道與!

무릇 밝게 드러난 것은 현묘한 것에서 생기고, 생명()이 있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에서 생기고, 정신은 도()에서 생기고, 형체는 본래 정()에서 생겨난다. 만물은 형상(形相)을 가지고 태어나니, 구멍이 아홉 개인 것은 태()에서 생기고, 구멍이 여덟 개인 것은 알에서 생긴다. 그것이 올 때에는 흔적이 없고, 갈 때에는 끝이 없다. 문도 없고, 방도 없이 사방으로 통하여 끝을 모르겠구나.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지가 강해지고, 생각이 탁 뚫리며, 이목이 총명해지고, 그 마음 씀이 수고롭지 않게 되어, 만물과 관계 맺는 데 한계가 없을 것이다. 하늘이 [‘] 얻지 못하면 높아질 수 없고, 땅은 두터워질 수 없고, 해와 달은 운행할 수 없고, 만물은 번성할 수 없으니, 이것은 아마도 일 것이다!”

 

소소(昭昭)는 밝게 드러난 것, 명명(冥冥)은 어둡고 어두워 분간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윤(倫)은 무형(無形)과 대비되어 형(形), 생명을 뜻한다.

사달(四達)은 막히지 않고 운동하는 ‘도’의 움직임을 말한다.

황황(皇皇)은 끝을 모를 정도로 아득한 것을 말한다.

순달(恂達)은 막힌 것이 탁 뚫리는 것을 표현한 글자.

방(方)은 ‘일정한 방향’, ‘막힘’, ‘한계’로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한계’로 해석했다.

 

且夫博之不必知, 辯之不必慧, 聖人以斷之矣. 若夫益之而不加益, 損之而不加損者, 聖人之所保也. 淵淵乎其若海, 巍巍乎其若山, 終則復始也, 運量萬物而不匱. 則君子之道, 彼其外與! 萬物皆往資焉而不匱, 此其道與!

, 박학하더라도 반드시 알지 못하며, 분별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이 그것을 끊어놓은 것이다. 만약 더하더라도 더해지지 않으며, 덜어내더라도 덜어지지 않는 것은 성인이 보존하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어서 바다와 같고, 우뚝하니 솟아서 마침내 다시 시작하는 것 같으니, 만물을 운행하고 담는다 해도 버리지 않는구나. 군자의 가 어찌 이밖에 있겠는가! 만물이 모두 그에게 가서 의지하더라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일 것이다!

 

단(斷)은 ‘지혜를 끊고, 버리다(斷棄知慧)’를 뜻한다.

운(運)은 ‘이동’, ‘변화’를, 량(量)은 ‘포함하다’, ‘담다’(含)를 뜻한다.

궤(匱)는 ‘버리다’라는 뜻으로 유(遺)와 통용된다.

군자지도 피기외여(君子之道, 彼其外與)는 군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된다. 군자를 세속적인 인간으로 보면, 피기외여(彼其外與)는 ‘도가 그 밖에 있을 것이다’로 해석된다. 반대로 군자를 ‘도’를 체득한 인간으로 보면, ‘도가 이것 밖에 있겠는가’로 해석된다.

 

中國有人焉, 非陰非陽, 處於天地之間, 直且爲人, 將反於宗. 自本觀之, 生者, 喑醋物也. 雖有壽夭, 相去幾何? 須臾之說也. 奚足以爲堯桀之是非! 果蓏有理, 人倫雖難, 所以相齒. 聖人遭之而不違, 過之而不守. 調而應之, 德也., 偶而應之, 道也., 帝之所興, 王之所起也.

나라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천지 사이에 존재하다 잠시 사람이 될 뿐이니, 장차 근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근본으로부터 본다면, 삶은 기가 모여 사물이 된 것이다. 비록 장수하거나 요절한다고 해도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잠깐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찌 요 임금과 걸 임금의 옳음과 그름을 가릴 수 있겠는가! 과일과 열매는 이치에 따라 성장하고, 인륜(人倫)은 비록 어렵지만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간다. 성인은 그것들을 만나도 어기려하지 않고, 지나가더라도 고집하지 않는다. 맞추며 응하는 것이 덕()이고, 만나서 응하는 것이 도()이니, 제왕이 일어나는 바이다.

 

음양(陰陽)은 천지(天地)를 뜻한다. 사람은 천지 사이에 생겨나 살아가는 존재다.

처(處)는 ‘어떤 존재가 되다(位)’를 뜻한다.

종(宗)은 ‘근본’이다.

음애(喑醷)는 ‘기가 모이는 것(聚氣)’이다. 벙어리가 뻐끔뻐끔 소리를 내려는 것과 비슷하게, 사람이 생겨나는 것을 표현한 글자다.

이(理)는 ‘이치’인데, 사물이 성장하는 스케쥴이다.

치(齒)는 이빨이 서로 맞물리듯 일이 맞물려 진행됨을 설명한 글자다.

 

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郤, 忽然而已. 注然勃然, 莫不出焉., 油然漻然, 莫不入焉. 已化而生, 又化而死, 生物哀之, 人類悲之. 解其天弢, 墮其天**[+], 紛乎宛乎, 魂魄將往, 乃身從之, 乃大歸乎! 不形之形, 形之不形, 是人之所同知也, 非將至之所務也, 此衆人之所同論也. 彼至則不論, 論則不至. 明見无値, 辯不若黙. 道不可聞, 聞不若塞. 此之謂大得.

사람이 천지의 사이에 살아가는 것은 마치 흰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순간일 뿐이다. 줄줄이 생명력을 넣고, 쑥쑥 자라서 생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 몽실몽실 스르르 흘러가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미 변화하여 살아가고, 또 변화하여 죽으니,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죽으면] 슬퍼하고, 사람의 무리는 [자신과 같은 사람의 무리가 죽으면] 애달파한다. 하늘의 활집으로부터 풀려나고, 하늘의 활통에서 떨어지니, 다채로우면서도 끊임없이 이여지고, 혼백이 나아가면 이에 몸이 따라가고, 근본으로 돌아갈 것이다! 형체가 없던 것이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있던 것인 형체가 없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아가서 힘써야 할 것이 아님은, 보통 사람들도 동일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니, 말하는 사람은 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가 밝게 보이는 것은 를 만나지 못하고 것이고, 분별은 침묵보다 못하다. ‘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은 자극을 막는 것만 못하다. 이것이 크게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홀연(忽然)은 ‘갑자기’, ‘순식간에’의 뜻이다.

이(已)는 ‘이미’라는 뜻으로, 내 뜻대로 살아가고 죽는 게 아님을 강조하는 글자.

분(紛), 완(宛)은 다채로우면서도 연기처럼 보일 듯 말 듯 계속 이어지는 과정이다. 기가 섞였다가 구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귀(大歸)는 종(宗)이다.

색(塞)은 외부의 자극을 막는 것이다.

 

6.

東郭子問於莊子曰:所謂道,惡乎在?

莊子曰:無所不在.

東郭子曰:期而後可.

莊子曰:在螻蟻.

:何其下邪?

:在稊稗.

:何其愈下邪?

:在瓦甓.

:何其愈甚邪?

:在屎溺.

東郭子不應. 莊子曰:夫子之問也, 固不及質. 正獲之問於監市履狶也, 每下愈況. 汝唯莫必, 无乎逃物. 至道若是, 大言亦然. 周遍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장자가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동곽자가 말했다. “콕 집어준 이후에야 이해할 수 있겠다.”

장자가 말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그리 비루한 데 있는가?”

장자가 말했다. “돌피나 피 따위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욱 비루해지는가?”

장자가 말했다. “기왓장이나 벽돌조각에 있다.”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점점 심해지는가?”

장자가 말했다. “똥이나 오줌에 있다.”

동곽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진실로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정획이 시장 감독관에게 돼지를 밟으며 묻는 것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예측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비록 반드시 말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실체의 흔적이 아닌 게 없을 것이다. 지극한 는 이와 같으니, 거대한 말 또한 그러하다. ‘두루’, ‘널리’, ‘모두이 세 가지는 다른 이름의 같은 실질이니,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이다.

 

질(質)은 본질, 핵심이다.

리희(履狶)는 돼지를 밟는 것인데, 돼지 감정 방법이다.

황(況)은 ‘예측하다’, ‘추측하다’

물(物)은 ‘실체’, 곧 ‘도’를 뜻한다.

주(周), 편(偏), 함(咸)은 도(道)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글자.

 

嘗相與游乎无何有之宮, 同合而論, 无所終窮乎! 嘗相與无爲乎! 澹而靜乎! 漠而淸乎! 調而閒乎! 寥已吾志, 无往焉而不知其所至, 去而來而不知其所止, 吾已往來焉而不知其所終., 彷徨乎馮閎, 大知入焉而不知其所窮. 物物者與物无際, 而物有際者, 所謂物際者也., 不際之際, 際之不際者也. 謂盈虛衰殺, 彼爲盈虛非盈虛, 彼爲衰殺非衰殺, 彼爲本末非本末, 彼爲積散非積散也.

항상 와 함께 어떤 있음도 없는 궁궐에서 노닐며, 함께 논의하고, 한계가 없었다! 항상 와 함께 무위해라! 담담히 고요할 것이다! 투명하게 깨끗할 것이다! 고르게 한가할 것이다! 내 뜻이 고요할 따름이니, 움직일 곳이 없으니 어디에 이를지도 모르겠구나. 떠나고, 오더라도 그칠 곳을 모르니, 나는 이미 가고 오는 것에 마칠 곳도 모르겠다. 크고 넓은 곳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진리가 들어와도 다할 줄을 모른다. 만물을 만물로 되게 하는 것은 만물과 더불어 틈이 없으니, 사물에 틈이 있는 것은 이른바 사물의 경계라 하는 것이다. 틈이 없는 것은 틈이 벌어지고, 틈이 벌어진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차고, 비고, 쇠약해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는 채워지고, 비워져도 실제로 채워지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고, 쇠약해지고, 사라져도 실제로 쇠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는 근본이 되기도 하고, 말단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근본이 되거나 말단이 되는 것은 아니고, 쌓이고 흩어지더라도 실제로 쌓이고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궁(宮)은 ‘도’를 깨달았을 때의 공간적 이미지를 연상한 것이다.

요(寥)는 ‘절대정적’이다.

빙굉(馮閎)은 휑할 정도로 크고 넓다는 의미로 허(虛)와 비슷한 이미지다.

제(際)는 ‘틈’을 뜻하는데, 만물에 도가 내재함을 설명하는 글자다.

부제(不際)와 제(際)의 반복은 멸과 생이 반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7.

妸荷甘與神農同學於老龍吉. 神農隱几闔戶晝瞑, 妸荷甘日中奓戶而入曰:老龍死矣!神農隱几擁杖而起, 嚗然放杖而笑,:天知予僻陋慢訑, 故棄予而死. 已矣! 夫子无所發予之狂言而死矣夫!

아하감이 신농과 노룡길 아래에서 배움을 함께 했다. 신농이 책상에 기대어 문을 닫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하감이 한낮에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와 말했다. “노룡이 죽었다!” 신농은 책상에 기대어 지팡이를 잡고 일어나서는, 휙하고 지팡이를 던지며 웃었다. “하늘께서 내가 편벽되고, 식견이 좁고, 게으르고, 겉멋이 든 것을 아셔서 나를 버리고 돌아가셨구나. 끝이구나! 나를 깨우쳐줄 지극한 말도 없이 죽으셨구나!”

 

은궤합호주면(隱几闔戶晝瞑)은 내편 「제물론」에도 나오는 표현.

박연(嚗然)은 지팡이 던지는 소리.

발(發)은 ‘깨우쳐주다’

광언(狂言)은 지극한 말(至言)

 

弇堈弔聞之曰:夫體道者, 天下之君子所繫焉. 今於道, 秋毫之端萬分未得處一焉, 而猶知藏其狂言而死, 又況夫體道者乎! 視之无形, 聽之无聲, 於人之論者, 謂之冥冥, 所以論道, 而非道也.

엄강조가 그것을 듣고 말했다. “무릇 도()를 체득한 사람은 천하의 군자들이 의지한다. 지금 에 있어서 가을 짐승의 털끝에서 만 개로 나눠 그 중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지극한 말을 품고 죽은 것으로 아니, 하물며 를 체득한 사람에 있어서랴! 보아도 형체가 없고, 들어도 소리가 없다. 사람들이 논하는 것에 있어서 어둡다고 하지만, ‘를 논하는 것이 지극한 는 아니다.”

 

엄강조에서 조(弔)는 ‘문상하다’. 판본에 따라서 “엄강이 문상하다가 들었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체도(體道)는 ‘도’와 일체가 된 사람.

명명(冥冥)에서 두 번째 명(冥)이 아래에 붙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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