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경상초 1~7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9-04-25 17:04
조회
133
老耼之役有庚桑楚者 偏得老耼之道 以北居畏壘之山 其臣之畫然知者去之 其妾之挈然仁者遠之 擁腫之與居 鞅掌之爲使居三年 畏壘大壤畏壘之民相與言曰 庚桑子之始來 吾洒然異之今吾日計之而不足 歲計之而有餘庶幾其聖人乎 子胡不相與屍而祝之 社而稷之乎

노담의 제자로 경상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노담의 도()를 두루 공부하여 북쪽 외루(畏壘)산에서 지냈는데, 신하들 중에 분명한 것을 지혜로 여기는 자들을 쫓아내고, 첩 중에 깨끗한 것을 어짊으로 여기는 자들을 멀리했다. [대신] 세련되지 못한 이들과 함께 머무르고, 굼뜬 이들을 부렸다. 삼년을 머무니 외루산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외루산의 백성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경상자가 처음 오셨을 때, 나는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루하루를 헤아려보니 이해할 수 없었다가, 해를 세어보니 제대로 알겠다. 아마도 성인일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 그를 시동처럼 경배하고, 사직처럼 모시지 않는가?”

 

역(役)은 ‘제자’를 뜻합니다.

편(偏)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합니다. 글자 그대로 ‘치우치다’의 뜻을 쓰면 “일부만 공부하다”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 편(遍)의 뜻으로 보면 “두루 공부하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쌤은 경상자가 노담 밑에서 두루 공부하긴 했으나 깊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뒤의 해석을 선택하셨습니다.

외루(畏壘)산은 ‘높고 험난한 산’인데, 도(道)가 펼쳐지기 위해 별도로 설정된 공간입니다.

획연(畫然)은 어떤 일처리를 분명하게 하는 모습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스스로를 일처리를 잘 한다고 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옹종(擁腫)은 나무에 있는 큰 옹이, 앙장(鞅掌)은 매우 굼뜸 모습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본성을 간직한 모습들을 뜻합니다.

 

  庚桑子聞之 南面而不釋然弟子異之庚桑子曰 弟子何異於予 夫春氣發而百草生 正得秋而萬寶成夫春與秋 豈無得而然哉 天道已行矣吾聞至人 屍居環堵之室 而百姓猖狂不知所如往今以畏壘之細民而竊竊焉欲俎豆予於賢人之間 我其杓之人邪 吾是以不釋於老耼之言

경상자가 그것을 듣고 남쪽을 바라보며 기뻐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경상자가 말했다. “제자들은 어찌 나를 기이하게 여기는가? 무릇 봄기운이 일어나면 온갖 풀이 자라나고, 계절을 따라 가을이 되면 만 가지 결실이 이루어진다. 무릇 봄과 가을이 어찌 얻는 것 없이 그리되겠는가? 천도(天道)가 이미 행해지고 있다. 내가 듣기를, ‘지인(至人)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담으로 둘러싸인 집에 머물러도, 백성들이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지금의 외루산의 먹고 사는 게 중요한 백성들은 뭐가 잘 된 듯이 현인들 사이에서 나에게 제사지내려 하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목표를 가르치는 자인가! 나는 이 때문에 노담의 말에 비추어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석(釋)은 열(悅)과 통용되어 ‘기뻐하다’라는 뜻입니다.

정득(正得)은 우주의 이치에 따라 만물이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만보(萬寶)는 우주의 이치에 따라 나오는 천지의 결실을 말합니다.

세민(細民)은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일반 백성들을 말합니다.

표(杓)는 ‘자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북두칠성의 자루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우쌤은 ‘목표를 가르쳐주는 사람’으로 풀어주셨습니다.

 

  弟子曰 不然夫尋常之溝 巨魚無所還其體 而鯢鰌爲之制 步仞之丘陵 巨獸無所隱其軀 而㜸狐爲之祥且夫尊賢授能 先善與利 自古堯舜以然 而況畏壘之民乎 夫子亦聽矣

제자들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보통의 도랑에 큰 물고기는 그 몸을 돌릴 곳이 없지만, 미꾸라지의 꿈틀거릴 수 있고, 몇 걸음에 오르는 작은 언덕은 큰 짐승이 몸을 숨길 곳이 없지만, 작은 여우는 좋다고 여깁니다. 또 저 현인을 숭상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며, 선을 앞세우고, 이익을 주는 것은 요, 순 이래로 그러한 것인데, 하물며 외루의 백성들이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또한 [외루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존현(尊賢), 수능(授能), 선선(先善), 여리(與利) 네 글자로 끊어서 읽었습니다.

존현(尊賢)은 상현(尙賢)과 같은 뜻인데, 불상현(不尙賢)은 노자와 장자에서만 나타납니다.

 

庚桑子曰 小子來 夫函車之獸 介而離山 則不免於罔罟之患 吞舟之魚 碭而失水 則蟻能苦之故鳥獸不厭高 魚鼈不厭深夫全其形生之人 藏其身也 不厭深眇而已矣

경상자가 말했다. “너희들은 이리 오거라! 무릇 수레를 삼킬 만한 짐승도 홀로 산을 떠나면, 그물에 사로잡히는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배를 삼킬 만한 물고기라도 범람하여 물을 잃으면, 땅강아지가 괴롭힐 수 있다. 그러므로 새와 동물들은 높은 곳을 싫어하지 않으며, 물고기와 자라는 깊은 곳을 싫어하지 않는다. 무릇 형체와 생을 온전하게 지킨 사람은 몸을 감추어 깊고 멀리 보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뿐이다.

 

의능고지(蟻能苦之)에서 의(蟻) 앞에 누(螻)가 생략된 것 같습니다. 누의(螻蟻)는 ‘땅강아지’라는 뜻입니다.

 

且夫二子者 又何足以稱揚哉 是其於辯也 將妄鑿垣牆而殖蓬蒿也 簡髮而櫛 數米而炊 竊竊乎又何足以濟世哉 舉賢則民相軋 任知則民相盜之數物者 不足以厚民民之於利甚勤 子有殺父 臣有殺君 正晝爲盜 日中穴阫吾語女 大亂之本 必生於堯舜之間 其末存乎千世之後千世之後 其必有人與人相食者也

 

또 저 요, 순은 어찌하여 들춰내야 칭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변론으로 쓸데없이 화려한 담장에 구멍을 파고, 쑥대를 무성하게 심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구별하며 빗질하고, 쌀알을 세면서 밥을 지으니, 헛되이 무엇으로 세상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인재를 등용하면 백성들은 서로 다투고, 지식인에게 일을 맡기면 백성들은 서로 해칠 것이다. 이 몇 가지 것들은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에 부족하다. 백성들이 이익에 대해 격하게 추구하여,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군주를 살해하며, 밝은 대낮에 도둑질이 일어나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구멍을 뚫는 일이 생긴다. 내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니, 큰 혼란의 근본은 반드시 요, 순 사이에서 생겨나고, 그 폐단은 천년 후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천년 후,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 것이다.

 

이자(二子)는 요와 순을 가리킵니다.

절절(竊竊)은 ‘쓸데없이’, ‘헛되게’, 야박하게‘를 뜻합니다.

알(軋)은 ‘삐그덕대다’, ‘어긋나다’를 뜻합니다.

후(厚)는 양적 증가가 아니라 백성들이 자신의 본성대로 살게 해주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인여인상식자야(人與人相食者也)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란 표현인데, 《맹자》의 4장의 “짐승을 몰아 사람을 먹이는 것이다(率獸而食人也)”란 표현과 비슷합니다. 서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다르지만 둘 다 전국시대 당시 백성들이 고통 받는 삶을 표현한 문장입니다.

 

南榮趎蹵然正坐曰 若趎之年者已長矣 將惡乎託業以及此言邪

庚桑子曰 全汝形 抱汝生 無使汝思慮營營若此三年 則可以及此言矣

南榮趎曰 目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盲者不能自見 耳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聾者不能自聞 心之與形 吾不知其異也 而狂者不能自得形之與形亦辟矣 而物或間之邪 欲相求而不能相得 今謂趎曰 全汝形 抱汝生 勿使汝思慮營營。』趎勉聞道達耳矣

庚桑子曰 辭盡矣曰 奔蜂不能化藿蠋 越雞不能伏鵠卵 魯雞固能矣雞之與雞 其德非不同也 有能與不能者 其才固有巨小也今吾才小 不足以化子子胡不南見老子

南榮趎贏糧 七日七夜至老子之所

 

남영주가 놀라며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저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은 이미 다 자랐으니, 장차 어디에 공부를 맡겨야 이 말에 이를 수 있을까요?

경상자가 말했다. “너의 몸을 온전히 하고, 너의 생을 보존하여 너의 생각과 애면글면하는 데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이를 3년 동안 하면, 이 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남영주가 말했다. “저의 눈이 다른 사람의 눈의 형태와 다른 것을 알지 못하니, 장님은 스스로 볼 줄을 모릅니다. 저의 귀가 다른 사람의 귀의 형태와 다른 것을 알지 못하니, 귀머거리는 스스로 들을 줄을 모릅니다. 저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형태와 다른 것을 알지 못하니, 광자(狂者)는 스스로 마음을 간수하지 못합니다. 저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이 또한 견줄 수 있을 뿐인데, 사물에 간혹 차이가 벌어져서, 서로 구하고자 해도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 저에게 말하시기를, ‘너의 몸을 온전히 하고, 너의 생을 보존하여 너의 생각과 애면글면하는 데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제가 힘써 들어도 가르침이 귀에만 들릴 뿐입니다.”

경상자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땅벌은 콩벌레를 부화시키지 못하고, 작은 닭은 고니의 알을 품지 못하지만, 큰 닭은 그것을 할 수 있다. 닭과 다른 닭은 그 덕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재질에 참으로 크고 작음이 있다. 지금 내가 재질이 작아서 그대를 부화시켜줄 수 없다. 그대는 어찌 남쪽의 노자를 뵈러 가지 않는가!”

남영주가 양식을 꾸려서 칠일을 걸어 노자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주(趎)는 ‘달리다’(走)와 ‘어리석다’(朱)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우쌤은 무엇을 알기 위해 애를 쓰지만, 어리석은 것을 표현한 글자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포(抱)는 ‘온전히 하다’, ‘보호하다’의 뜻으로 보(保)와 통용됩니다.

사려(思慮), 영영(營營)은 쓸데없이 생각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간(間)은 ‘차이를 벌리다’, ‘개입하다’의 뜻입니다.

 

老子曰 子自楚之所來乎 南榮趎曰 唯

老子曰 子何與人偕來之衆也 南榮趎懼然顧其後

老子曰 子不知吾所謂乎

南榮趎俯而慙 仰而歎曰 今者吾忘吾答 因失吾問

老子曰 何謂也

南榮趎曰 不知乎 人謂我朱愚知乎 反愁我軀不仁則害人 仁則反愁我身 不義則傷彼 義則反愁我己我安逃此而可 此三言者 趎之所患也 願因楚而問之

老子曰 向吾見若眉睫之間 吾因以得汝矣今汝又言 而信之若規規然若喪父母 揭竿而求諸海也女亡人哉 惘惘乎 汝欲反汝情性而無由入 可憐哉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경상초가 있는 곳으로부터 왔는가?” 남영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 여러 사람과 함께 왔는가?” 남영주가 두려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가?”

남영주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다가,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잊어버려서 저의 질문을 잃어버렸습니다.”

노자가 말했다. “무슨 말인가?”

남영주가 말했다. “제가 아는 게 없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저를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게 있다고 해야 할까요? 도리어 제 몸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해칠 것이고, ()하면 도리어 제 몸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면 저들을 해칠 것이고, 의로우면 도리어 저에게 근심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어디로 도망가야 되겠습니까? 이 세 가지는 제가 걱정하는 것이니, 원컨대 경상초의 소개로 여쭙고자 합니다.”

노자가 말했다. “이전에 나는 그대의 눈썹 사이를 보고 그대를 알 수 있었는데, 지금 그대가 또 말을 하니, 확실해졌다. 그대는 작은 것에 매달리니 부모를 잃고 장대를 들어서 바다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길 잃은 사람이로다, 정신없는 모습이! 그대는 그대의 정신을 찾고자 하여도 어디로 들어갈지를 모르니, 가련하구나!”

 

부지호(不知乎)는 ‘스스로 아는 게 없다고 해야 할까요?’이고, 반대로 지호(知乎)는 ‘스스로 아는 게 있다고 해야 할까요?’를 뜻합니다.

주(朱)와 우(愚)는 둘 다 ‘어리석다’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인(因)은 ‘~의 소개로 오다’라는 뜻입니다.

남영주는 인(仁)과 의(義)를 얘기했는데, 노자는 남영주의 인, 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전국시대에 유가, 묵가, 도가를 떠돌며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남영주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인과 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니 유가쪽 출신인 듯합니다.

 

南榮趎請入就舍 召其所好 去其所惡 十日自愁 復見老子。  

老子曰 汝自洒濯 熟哉鬱鬱乎 然而其中津津乎猶有惡也夫外韄者不可繁而捉 將內揵 內韄者不可繆而捉 將外揵外內韄者 道德不能持 而況放道而行者乎

南榮趎曰 里人有病 里人問之 病者能言其病 病者猶未病也若趎之聞大道 譬猶飲藥以加病也 趎願聞衞生之經而已矣

老子曰 衞生之經 能抱一乎 能勿失乎 能無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能舍諸人而求諸己乎 能翛然乎 能侗然乎 能兒子乎 兒子終日嗥而嗌不嗄 和之至也 終日握而手不掜 共其德也 終日視而目不瞚 偏不在外也行不知所之 居不知所爲 與物委蛇而同其波是衞生之經已

南榮趎曰 然則是至人之德已乎

曰 非也是乃所謂冰解凍釋者 能乎 夫至人者 相與交食乎地而交樂乎天 不以人物利害相攖 不相與爲怪 不相與爲謀 不相與爲事 翛然而往 侗然而來是謂衞生之經已

曰 然則是至乎

曰 未也吾固告汝曰 能兒子乎 兒子動不知所爲 行不知所之 身若槁木之枝而心若死灰若是者 禍亦不至 福亦不來禍福無有 惡有人災也

남영주가 숙소에 들어가 좋아하는 도덕을 밝히고, 싫어하는 것을 버려서 열흘에 걸쳐 근심을 사그라지게 한 뒤에 다시 노자를 뵈었다.

노자가 말했다. “그대는 스스로 깨끗이 씻어냈으니 빛나는 듯하구나, 꽉 찬 모습이! 그러나 마음에 찌꺼기가 있으니 여전히 악한 것이 있다. 무릇 외부에 속박된 사람은 [마음이] 번다하며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마음에 빗장을 걸 것이다. 마음에 속박된 사람은 이리저리 얽혀서 묶을 수 없으니, 외부에 빗장을 걸 것이다. 마음과 외부에 속박된 사람은 도와 덕이 유지되지 않으니, 하물며 도가 흩어져서 행동하는 사람에 있어서랴!”

남영주가 말했다. “마을 사람 중 병든 사람이 있는데, 마을 사람이 그를 병문안하였습니다. 병 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말할 수 있으면, 병든 사람은 아직 심하게 병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거대한 도를 들으니, 비유하자면, 약을 마심으로써 더욱 병든 것과 같습니다. 저는 생명을 보존하는 법칙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노자가 말했다. “생명을 보존하는 법칙이란, ‘하나를 품을 수 있는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점을 치지 않고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만들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걸 그만두고 나의 내면에서 구할 수 있는가? 가볍게 날 수 있는가?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 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아이는 날이 다할 때까지 울부짖어도 목이 잠기지 않으니, 조화의 지극함이다. 날이 다할 때까지 주먹을 쥐어도 손이 저리지 않으니, 공평한 덕이다. 날이 다할 때까지 보아도 눈이 깜빡거리지 않으니, 어디서 바깥에 있어야 하는가. 행동하는 사람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니, 만물과 함께 순종하며 그 물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보존하는 법칙이다.”

남영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인의 덕()입니까?”

노자가 말했다. “아니다. 이것을 이른바 얼음을 녹이고, 언 것을 푸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지인(至人)은 사람들과 같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하늘의 리듬을 즐긴다. 인간이나 사물이나, 이익과 손해로 서로 다투지 않으며, 서로 괴이한 것을 일삼지 않고, 서로 모략을 부리지 않고, 서로 일을 꾸미지 않으며, 홀가분하게 갔다가 어리석은 듯 돌아온다. 이를 일컬어 생을 보존하는 법칙이라 할 뿐이다.”

남영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극한 것입니까?”

노자가 말했다.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라고 말했으니,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움직이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고 떠난다. 몸은 마른 나무의 가지와 같고, 마음은 죽은 재와 같다. 이와 같다면, 화가 또한 이르지 않을 것이며, 복 역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화와 복이 있지 않은데, 어찌 인간의 재앙이 있겠는가!

 

자(自)는 글자 그대로 ‘혼자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판본에는 자(自) 대신 식(息)으로 되어있다고도 합니다. 만약 식(息)으로 읽으면, “10일 동안 걱정이 사그라 들었다”로 볼 수 있습니다.

노자의 말 중에 자(自)를 ‘비록’ 수(雖)로 보는 판본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뜻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뉘앙스는 확실히 달라집니다.

진진(津津)은 ‘진액’, ‘찌꺼기’라는 뜻입니다.

획(韄)은 ‘칼집 끈’입니다. 여기서는 ‘속박되다’, ‘묶다’의 뜻입니다.

방(放)은 ‘따르다’, ‘의지하다’라는 뜻에서 의(依)로 읽습니다. 반대로 ‘흩어질’ 산(散)으로 보면, “도를 해치는 사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위생(衛生)은 양생(養生)과 같습니다.

포일(抱一)은 《도덕경》 10장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도를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파(波)는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말합니다.

괴(怪)는 ‘괴이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세속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말합니다.

아자(兒子)는 ‘갓난아기’라는 뜻인데, 인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화복(禍福)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불미스러운 사건과 경사스러운 사건으로 나뉘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일 뿐입니다.

 

宇泰定者 發乎天光發乎天光者 人見其人 [物見其物]人有脩者 乃今有恆 有恆者 人舍之 天助之人之所舍 謂之天民 天之所助 謂之天子

學者 學其所不能學也 行者 行其所不能行也 辯者 辯其所不能辯也知止乎其所不能知 至矣 若有不即是者 天鈞敗之

備物以將形 藏不虞以生心 敬中以達彼 若是而萬惡至者 皆天也 而非人也 不足以滑成 不可內於靈臺靈臺者有持 而不知其所持 而不可持者也

마음이 크게 안정된 사람은 자연의 빛이 드러나고, 자연의 빛이 드러나는 사람은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을 본다. 자신을 닦는 사람은 지금에 이르러 항상됨이 있으니, 항상됨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와서 머무르고 하늘이 그를 도울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머무르는 사람을 천민(天民)이라 하고, 하늘이 도와주는 사람을 천자(天子)라 한다.

[세상에서] 배운다는 것은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세상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변론한다는 것은 변론할 수 없는 것을 변론하는 것이다. 판단력이 알지 못하는 데에 멈추면 지극한 것이니, 이러한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늘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사물을 갖추어 몸을 이루어지게 하고, 의도치 않은 일에 대비하여 마음을 생기 넘치게 하고, 마음을 닦아서 속세에 통달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온갖 악에 이르는 것은 모두 하늘에 의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루어지는 것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고, 신성한 마음에 들여서도 안 된다. 신성한 마음은 지키는 것이 있지만,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억지로] 지킬 수 없다.

 

우(宇)는 ‘마음’, ‘정신’을 뜻합니다.

영대(靈臺)는 《시경》에도 나오는데, ‘마음’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영(靈)을 쓴 것은 마음의 작용이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쌤은 장자의 인식에서 몸이 먼저 생기고, 마음이 ‘의도치 않게’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논어》는 인간 세계의 밖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술이〉편 20장 “선생님께서는 괴이하고, 힘에 의존하는 것, 배덕한 것, 귀신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子不語怪力亂神)”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不見其誠己而發 每發而不當 業入而不舍 每更爲失爲不善乎顯明之中者 人得而誅之 爲不善乎幽閒之中者 鬼得而誅之明乎人明乎鬼者 然後能獨行

券內者 行乎無名 券外者 志乎期費行乎無名者 唯庸有光 志乎期費者 唯賈人也人見其跂 猶之魁然與物窮者 物入焉 與物且者 其身之不能容 焉能容人 不能容人者無親 無親者盡人兵莫憯於志 鏌鋣爲下 寇莫大於陰陽 無所逃於天地之間非陰陽賊之 心則使之也

자신을 진실되게 하지 않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면, 매번 움직일 때마다 이치게 맞지 않게 되고, 걱정거리가 들어와서 그치지 않으면, 매번 고쳐도 잃게 된다. 훤히 드러나는 가운데 불선을 저지르는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주살할 것이고, 어두운 가운데서 불선을 저지르는 사람은 귀신이 그를 주살할 것이다. 사람에게도 밝고, 귀신에게도 밝아진 연후에야 홀로 걸어갈 수 있다.

내면에 힘쓰는 사람은 알려지지 않는 가운데 실천하고, 드러나는 것에 힘쓰는 사람은 재물을 모으는 데 뜻을 둔다. 알려지지 않는 가운데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일상이어도 항상 빛이 나며, 재물을 모으는 데 뜻을 둔 사람은 겨우 자신을 파는 사람이니, 사람들은 그가 발돋움한 것을 보고 오히려 우뚝하게 여긴다. 만물과 끝과 처음을 함께 하는 사람은 만물도 그에게 들어갈 것이고, 만물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은 그 몸에 여유가 없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친함이 없을 것이니, 친함이 없는 사람은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 병기는 마음대로 가는 것보다 날카로운 것이 없고, 막야는 그 아랫니며, 해침은 음양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천지 사이에 도망갈 곳이 없다. 음양이 그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誠)은 자신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고, 발(發)은 욕망에 따라 이끌리는 것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치(馳)와 같습니다.

권(券)은 ‘힘쓰다’라는 뜻에서 무(務)와 통용됩니다.

용(庸)은 중용(中庸)의 ‘용’으로, 일상적인 차원에서 항상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고인(賈人)은 ‘자신을 파는 사람’입니다.

且 이 글자는 뜻에 따라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로 읽으면 ‘갈등을 일으키다’이고, “차”로 읽으면 ‘구차하다’라는 뜻입니다.

진인(盡人)은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지다’라는 뜻입니다.

지(志)는 ‘뜻을 세우다’가 아니라 ‘마음대로 행동하다’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람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음양(陰陽)의 부조화가 얘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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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7 20:36
    하얀 것은 페이지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까막눈 ㅆ.ㅆ)
    배운다는 것은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이로군요. 실천한다는 것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고. '판단력이 알지 못하는 데에서 멈추다'가 왜 지극함인지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