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시의 맛 시즌 2 1강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0-24 06:04
조회
132
늦어서 죄송합니다! (_ _)

 

미자(微子)는 떠났고, 기자(箕子)는 노비가 되었고, 비간(比干)은 간언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길, “은(殷)나라에는 세 명의 인자(仁者)가 있다.”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 《논어(論語)》 〈미자(微子)〉편 1장

 

올바른 신하의 유형은 크게 미자와 기자, 비간 셋으로 나뉩니다. 의(義)가 어긋났을 때 미자처럼 군주를 떠나느냐, 혹은 기자처럼 떠나지는 않되 미친 척하여 목숨을 보존하느냐, 그것도 아니면 죽을지언정 끝까지 군주를 위해 간언을 할 것이냐. 어떤 것이 신하의 삶인지 후대의 선비들은 이 세 유형에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사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그 시대적 조건에 맞게 신하의 유형이 하나씩 생기는 것 같아요. 저번 시즌에 배운 굴원도 어떻게 보면 이전과 다르게 자신의 충절을 표현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즌에 저희가 만날 사령운과 도연명도 새로운 고민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입니다. 이번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이들을 만나기 전에 이들이 어떤 시대에서 어떻게 고민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사령운과 도연명은 이름만 많이 들어봤습니다.ㅋㅋ 일단 시대부터 살펴보면, 시작은 삼국지 이후 사마씨의 동진(東晋)시대로 올라갑니다. 진(晉)나라는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거치며 세력이 줄어들었고, 강남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중원인들에겐 황하에서 사는 문명인이란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게 깨지는 경험을 한 것이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따르면, 진나라의 설립자인 사마염 이후의 왕들은 모두 무능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나라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인재들을 신하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진시대 역시 그랬는데, 대표적인 신하들이 왕도, 온교, 도간, 사안입니다. 현인들을 신하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안은 사령운의 조부이고, 도간은 도연명의 증조부입니다. 사안은 서진시대부터 명문귀족이었습니다. 거기에 ‘비수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진을 지켜낸 공로가 더해지면서 막대한 부를 얻게 됐습니다. 반면에 도연명의 집안은 몰락해버린 가난한 귀족에 불과했습니다. 사령운의 집안이 서진의 귀족 출신이라면, 도연명의 집안은 동진 때 겨우 출세한 집안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서진시대를 구성하던 세력은 크게 피난 온 서진 귀족 + 동진 귀족 + 토착 귀족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사령운과 도연명을 나란히 비교하지만, 당대 문학은 사령운과 도연명이 아니라 사령운과 안연지로 얘기됐습니다. “사령운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책들을 널리 읽어 문장이 아름답기로는 안연지와 양자강 일대에서 제일이었다. 문장을 자유자재로 써내려가는 것은 안연지보다 뛰어났으나 깊이와 엄밀함은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보려면 사령운과 도연명에 이어 안연지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우쌤은 세 사람을 왕조가 바뀔 때 각각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선 사령운(397~433)은 청담(淸談)을 중요시한 죽림칠현식 삶의 마지막 주자입니다. 청담이란 정치에 실망하여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은거하며 지내는 자들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 봤듯이, 죽림칠현이 정말 자연 속에 틀어박힌 게 아니었고 괴팍한 것에 가까웠고 유가사상이 아주 짙게 배어있었죠. 사령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의 부유한 재산을 물려받고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면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48세에 기시형(목을 베고 시체를 시장에 내다버리는 형벌)을 받아 죽게 됩니다.

도연명(365~427)은 사령운보다 약 30년 정도 앞섭니다. 사령운이 이미 당대부터 유명하여 단독전(cf. 심약의 〈사령운전〉)으로 다뤄졌다면, 도연명은 《송서》 〈은일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증조부인 도간이 공을 세움에 따라 장사일대를 봉해 받았지만, 사후 그의 자식들 대에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다시 빈천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도연명의 어머니 집안이 나름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권력자인 유유(후에 남북조 시대 유송의 건국)의 참모로 일하게 됩니다. 우쌤은 비슷한 시기에 사령운도 유유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서로 만났을 것인데 이상하게 서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아예 언급이 안됐을 수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어쨌든 사령운과 달리 도연명은 자발적으로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노선을 택하고, 41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나온 시가 그 유명한 ‘귀거래사’입니다. (얼른 이 시를 배웠으면...!) 420년에 유유가 송나라를 건국하면서 수차례 도연명을 초청했는데 63세 죽기 전까지 출사를 거부하죠. 특이한 것은 그의 증조부인 도간이 근면함으로 《소학》 〈선행〉편과 《진서》 〈도간열전〉에 등장했고, 도연명 역시 근면함을 제일로 자식들은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교육하면서 지은 《명자》를 보면 그의 집안 내력과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나오지만, 실제로 아들은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사령운과 비교했을 때 도연명은 삶과 문장 모두 소박했기 때문에 당대에는 은일(隱逸)이란 명성을 얻은 것 외에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귀족 생활이 아닌 자연에서의 소박한 생활은 당나라 이후로 넘어가면서 주목 받게 됩니다.

안연지(384~456)는 사령운, 도연명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20~30대까지는 사령운과 같이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지만,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은자들과 교류하면서 아예 다른 삶을 삽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사령운처럼 원래부터 권세가 있는 집안이라거나 도연명처럼 토착 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산동에서 피난을 와서 아부문학(?)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유유의 송나라가 세워지면서 자기수양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그의 삶은 이후 어느 정도의 재산과 자기수양의 삶을 사는 새로운 지식인의 전형이 됩니다. 우쌤은 이렇게 가문을 보존하면서 학문하는 사계층이 출현했고, 이들이 후에 각 지역의 지주로 출세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권력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 각각의 시대마다 대략 3가지 유형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도 나름대로 그 유형을 정리할 수 있을까요? ㅋㅋ 공부를 하면서 더욱 정치에 관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사령운과 도연명의 시를 통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나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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