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시의 맛 시즌 2 2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30 16:29
조회
128
늦어서 죄송합니다 m(_ _)m

181024 수중전 후기

 

사령운은 정말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부는 동진을 구한 영웅이었고 본인의 시작 재능은 천재적이었지요. 명문가 출신의 천재, 이것이 사령운의 타이틀입니다. 거기다 ‘줄’도 잘 잡아서 유유의 밑에 들어가 승승장구 했었지요. 그런데 이정도 ‘스펙’과 야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공개처형인 기시형을 당하는 것은 당시로서도 놀라운 일입니다. 기시(棄市)형을 당한 시인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단 반역 혐의를 받은 사람인만큼, 그가 쓴 시는 사실 정식으로 정리된 것은 없습니다. 문선에 40수가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문집으로 정리되지는 않았죠. 명나라 대에는 80여 수가 추려졌고, 지금은 약 100 수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대략 많이 잡아서 80수 설(?)이 맞다고 여겨집니다만, 제대로 알 길은 없습니다.

거의 매장된 사령운을 살린 건 성당 시기의 이백(李白)입니다. 그는 사령운이 시에서 언급한 지역을 여행했고, 같은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령운과 마찬가지로 시인으로 머물고자 하지 않았죠. 동양의 시인은 순수한 문학적 시작(詩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두 제각각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시를 지었고, 또 그 시를 잘 짓는 능력으로 출세를 도모했지요. 안 그런 사람은, 도연명 정도? 몇몇 일부를 제외하고 뛰어난 학자와 정치가와 시인은 모두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자도 퇴계도 한가락 하던 명시인이었다 하고요.

그러다보니 산수시의 명인 사령운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가진 정치적 맥락을 제대로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동양 산수시를 읽으면서 깜박 넘어가는 함정, 그건 ‘송진에 묻힌 속세일랑 모두 잊고 자연과 벗하고 싶어라~’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린다는 것이죠. 사령운은 산수시의 서막을 연 천재입니다만, 그가 쓴 시가 산수를 그린다고 해서 그의 엄청난 출세욕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시는 항상 그것이 놓인 맥락을 함께 봐야 하는데, 사령운의 시는 유독 그의 정치적 야심(?)을 고려하며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이번에 읽은 시 중 사령운이 조부의 공적을 기리는 시가 그렇습니다. 겉보기는 비수전(383년)의 승리로 이끌어 동진을 지킨 조부의 공적을 칭송하는 시 같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같은 가문 사람이 할아버지를 추켜세우기 위해 시를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도연명이야 조금이라도 있어보이게 자기 집안 족보를 정리할 겸 가문에 대한 시를 지었다지만 사령운의 할아버지 사헌은 전혀 경우가 다르거든요. 그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영웅이기에, 사령운이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는 건 효(孝)라기 보단 오히려 거들먹거리는 것으로 보이기 딱 좋습니다. 거기다 할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러워 시로 남기고 싶다면 굳이 자기가 쓸 필요도 없었고요. 뛰어난 문장가를 기용해 쓰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사령운은 굳이 자기가 썼습니다. 그건 이렇게 봐야 합니다. 직접 조상에 대해 쓴 시는 사실 자신에 대해 쓴 것이라고요. 사령운은 영웅 사헌에 대해 쓰면서 ‘나도 할아버지만큼 할 수 있다’고 어필한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출세에 대한 욕망을 억누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군신간의 시문은 두 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창화(唱和), 군주와 신하가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죠. 신하 된 입장에서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신하도 뛰어난 시인이어야 하지만 군주도 그에 못지않은 시인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과 정조가 같은 임금이요. 그런데 아무리 신하가 뛰어난 시인이어도 그것을 주고받을만한 재능이 군주에게 없다면, 대략 민망하겠죠;;; 두번째는 아유(阿諛)입니다. 일명 아부문학. 군주를 추켜세워주는 시입니다. 아무래도 두번재가 더 많이 행해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마음껏 자기 시적 재능을 뽐낼 수 있고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420년, 한족의 왕조는 한번 바뀝니다. 이미 그 전조가 여럿 있었죠. 사령운은 후에 유송을 세울 송공 유유(劉裕)에게 평성(강소성 서주시)로 갑니다. 꽤 변방까지 부득불 따라나선 거지요. 그것도 송공 입장에서는 감동인데 ‘彭城宫中直感岁暮詩(팽성궁에서 송공을 뵙고 세밑에 감회가 있어)’ 같은 시까지 짓습니다. 대략 팽성에 와서 송공을 만나니 너무 기쁘고 반가워 고향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전혀 없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아부도 이런 아부가... 아무튼 후에 유유가 유송을 세울 때 사령운을 등용하지요. 도연명은 이때 절망한 반면 사령운은 왕조를 바꾸는데 적극적입니다. 자기 할아버지가 지킨 나라인데 말이에요. 그런 걸 보면 지위가 곧 그 나라에 대한 지조를 상징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가지는 좋았습니다. 왕조가 바뀌자 전왕조를 비판하고 신왕조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고 천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봉선제를 송 무제가 추진하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요. 보고 있으면 좀 민망해지지만 정치가로서의 시인이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시인이라면 굴원(그것도 사마천의 굴원!)처럼 깨끗하고 지조있는 사람만 생각해왔는데 사실 사령운 같은 경우가 더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가까울수록 시를 더 잘 짓는 사람이 넘쳐났을 것 같고요. '탈속의 세계에서 시를 짓는 재능 있는 시인'이라는 것도 그냥 이미지라는 생각을 이번에 사령운을 보며 제대로 하게 되네요ㅋㅋㅋㅋㅋ

결국 사령운은 ‘줄’을 잘 잡아서 출세했다가 ‘줄’을 잘못 잡아서 기시형을 당했는데요...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시는 ‘갑자기 분위기 지조와 절개’라서 사실 썩 믿기지는 않습니다. “한이 망하자 장량이 떨쳐 일어났고 / 진이 황제라 칭하자 노중련이 부끄러워했네”라고 하다니...ㅋㅋㅋㅋㅋ 사령운이 마지막에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 아니면 적대세력이 나중에 삽입한 것인지 아직도 제설분분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수업을 통해 제가 본 사령운 이미지는 단 한 번도 은퇴하려고 하지 않는 불굴의 야심가라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아무튼 특이한 사람입니다. 조부가 물려준 명성과 명예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도 권력에 대한 욕망을 놓지 않았으니까요. 다 가졌기 때문에 나머지 하나도 더 가지려는 심리였을가요? 반대로 도연명은 그나마 갖고 있던 것도 다 내려놓고 떠났으니 정말 두 사람은 일일이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령운이 쓴 산수시는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주로 강남 일대에 대해서 썼다고 하네요. <登池上樓> 같은 시를 보면 시 자체에는 정치고 뭐고 경치 좋은 곳에서 가만히 산세를 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화자가 등장합니다...봉급은 짜고 농사 짓기는 힘에 부치고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할일 없이 물가에 있다고요. 만약 사령운이 누군지 모르고 이 시를 봤다면 영락없는 지방 공무원의 시라고 보았을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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