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시의 맛 시즌 2 3강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11-06 02:54
조회
102
저한테 동양화는 그림+시입니다. 물론 옆에 있는 시가 뭔지도 모르고, 그게 왜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원래부터 동양에서는 저렇게 글과 그림을 같이 넣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양화에 대한 문사들의 평을 보면 이게 뭔가 있구나 싶습니다.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고,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다(곽희).”,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소동파).”

모든 스타일에는 그 시대의 고민과 철학이 반영되듯, 그림과 시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나름의 문제의식 속에서 탄생한 결과였습니다. 그림에 시를 넣는 것을 제화시(題畵詩)라고 하는데, 대체로 그림마다 인용되는 시가 정해져있다고 합니다. 가령, 강이 있고, 유유히 노를 젓는 어부가 등장하면 그 옆의 글귀는 십중팔구 굴원의 ‘어부사’라고 합니다. 우쌤이 몇 개 더 얘기해주셨는데, 제가 아는 시가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하하;; 각설하고, 제화시는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조명하는 산수시(山水詩)의 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제화시가 탄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제시한 사령운의 산수시가 무엇인지 대략의 맛을 보았습니다.

산수시는 산과 물을 비롯한 자연을 읊은 시입니다. 기원은 사령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여기서 잠시, 누구는 사령운 이전의 시들은 모두 자연을 노래한 게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전의 시들도 자연을 노래한 건 맞지만, 결정적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우쌤은 《시경(詩經)》과 비교를 하면서 설명해주셨는데, 《시경》에서의 자연은 화자의 감정을 대변하는 매개물일 뿐 자연이 어떻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반면에 사령운은 자연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시경》 〈관저(關雎)〉에서 화자가 물새, 나물을 뭐라뭐라 하면서 자기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했다면, 사령운은 자연 경관이 변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담아냅니다. 우쌤은 특히 사령운의 시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구체적 시간이 도입됐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령운은 밝았다가 어슴푸레 해진다든가 식의 빛의 변화를 도입하고, 자연 그 자체에 미적인 가치를 집어넣은 것이죠. 그래서 사령운의 시는 세밀한 만큼 단어들도 어렵습니다. -_- 이번에 시 4편 봤는데 벌써 모르는 글자 투성이었어요. 물론 까막눈인 저한테 어떤 시든 다 모르는 글자 투성이지만 흠흠;; 어쨌든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글자를 넣을 것인지 치밀하게 고민했을 것을 상상하니, 역시 문체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벼리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사령운의 산수시는 이전 위진시대의 현학적 태도와 청담사상으로부터 벗어난 또 하나의 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령운의 시가 너무나 인기가 많았던 탓에, 그의 문체가 거의 일반 문법처럼 기능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우리처럼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령운의 산수시를 볼 때도 딱히 새로움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쌤은 《시경》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봐야 사령운의 시가 어떤 점에서 새로운지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령운의 산수시가 갑자기 자연에 대한 심미안이 열린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령운은 지난 시간에 봤듯이 권력의 중심에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조부 사안의 공 덕분에 사씨 가문은 기존의 지위보다 더욱 출세하고, 사령운 자신의 출중한 재능 덕분에 이미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권력, 부, 재능 모든 것을 다 가진 부러운 인물이네요..! 어쨌든 그는 유씨의 송나라가 세워질 무렵, 이미 유유에게 직접 가서 시를 바치며 새로운 권력자와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어떻게든 머리를 싸매기도 했죠. 사령운이 쓴 산수시들은 모루 그런 생의 흔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산수시를 읽을 때 겉보기에는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기에는 정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숨겨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가령, 사령운은 37세 영가태수로 부임하면서 과시령서(過始寧墅)라는 시를 짓습니다. 여기서 그는 ‘세속에 물들어 피곤하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편안하다, 고향 사람들에게 삼년 후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등등의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좌천되어서 속이 매우 끓는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서지방은 사령운의 집안이 장악한 곳이었데, 그는 이곳에 부임한지 1년 만에 사표 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의 시가 아무리 속세를 비판하고 자연 속에서의 은거를 노래한다고 해도 그의 욕망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시나 다른 글을 읽을 때도 이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작품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삶인지 아니면 그걸 읽는 이의 느낌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사령운의 산수시는 분명 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모두 그의 삶으로 환원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흐음...

사령운을 읽을 때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시대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혜원선사와 자주 교류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든 시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사령운은 유교에다 불교까지 배우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에도 《주역(周易)》의 단어들과 석경(石鏡)과 같이 실제 절에 있는 고유명사들이 쓰였습니다. 입팽려호구(入彭蠡湖口)라는 시를 보면, 수뢰둔(水雷屯)의 둔(屯)이 사용되죠. 반면에 도연명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인 유가적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의 시는 사령운과 달리 세밀한 묘사로 자기의 심정을 최대한 표현한 것과 달리 마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어떤 특징이 있을지 기대됩니다.

재밌는 것은 사령운과 도연명 둘 다 혜원선사와 교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장자와 맹자도 돌아다닌 경로, 시기가 거의 겹치면서도 서로에 대해 조금의 언급도 없는 조합이 있었던 걸 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조합이 아예 없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장자와 맹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고 라이벌이 많았다고 쳐도, 사령운과 도연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혜원선사와 친하게 지냈고, 같은 곳에서 일했음에도 서로의 시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또 왜 그런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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