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시의 맛 시즌 2, 5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1-19 14:22
조회
111
시의 맛 시즌 2, 5강 후기

4세기의 중국, 그 당시 지식인들의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관직을 얻는 것. 그러기 위해서 공부했고 공부하면서 벼슬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면 우리는 ‘수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에는 두 가지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만 닦는다고 세상을 나몰라라 하는 것도 옳지 않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데 자기수양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역시 ‘공부를 하면 출세해야지~’라는 속물적인 생각으로 보이는 건 제가 너무 편견이 강한 것일까요? ㅎㅎ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연명은 파격적인 존재입니다. 무려 그 시절에 관직을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내던졌거든요. 그것도 은퇴가 아니라 40대의 창창한 시절에 조기퇴직! 사표가 수리되기도 전에 다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귀거래’ 행보를 보이는 도연명은 세 가지 점에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1. 수도의 화려한(?) 관직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2. 일을 그만두었으니 당연히 돈이 부족한데 그런 가난을 감수했고, 3. 제자를 기르거나 하며 고향의 ‘선생’이 되기보단 직접 농사를 지었고, 4. 마지막으로 음주를 즐겼다는 것이죠ㅋ

도연명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은 후대의 동경을 받습니다. 특히 조선 문인들이 좋아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도연명 자격 네 가지’를 전부 아우르지는 못했습니다. 조기퇴직은 해도 직접 농사짓지는 않았고, 술은 좋아해도 가난까지 감수하지는 못했죠.

그럼 도연명은 어쩌다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하게 되었을까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도연명의 출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연명의 증조부는 ‘도관’이라는 사람으로, 장사공군 대사마를 역임한 관리였습니다. 그리고 조부 ‘도무’는 무창의 태수였고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 도연명에게 의미있는 집안사람은 증조부와 조부였던 것 같아요. 그들은 동진이 성립되기 이전의 소위 ‘토착세력’이었습니다. 즉 도연명은 서진에서 피난온 사람들 계열인 왕희지와 사령운과는 다른 태생이지요. 그러니까 도연명의 조상은 새로운 왕조에 협력한 현지 사람들인 셈입니다.

도연명은 일찍이 29세에 강주 쇄주로 임명되었으니 31세에 곧 사직합니다. 그러다가 31세에 상처하고 후처로부터 다섯 명의 아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처가 세력 연줄로 군벌 환현의 막부에서 참군이 되지요. 문서수발을 하는 직책이지만, 권력자 치척에 있는 역할이기에 사실상 권력 근처로 갔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다가 37세에 모친상을 당해 3년간 낙향하는데 마침(!) 환현이 왕위를 찬탈했다가 실패해 토벌당합니다. 하마터면 도연명은 여기 휘말려 죽을 뻔한 셈이죠.

도연명은 이후로 유의와 유유 아래 있다가 41세에 돌연 낙향합니다. 이때 재밌는건 사령운도 같은 루트를 밟았다는 것이죠. 당시 유력한 군벌인 유유 아래에 사령운과 도연명은 같은 참군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니까 직장 동료였던 셈이죠.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한 마디도 남긴 것이 없습니다. 무슨 사이였을까, 후대 사람으로서는 이런 점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죠.

사령운은 동진이 멸망하자 더 적극적으로 권력에 줄을 대지만 도연명은 낙향을 결단합니다. 이것으로 도연명이 충신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서진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령운은 동진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반면 애초에 토착세력인 도연명은 등을 돌려 귀향하다니. 이에 대해 우샘께서는 아마 처가쪽 세력인 환현이 토벌당한 이후 자기와 맞는 지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니면 환현 때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경험으로 관직에 오만정이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어쨌든 도연명이 충신의 아이콘이 된 것은 송나라 때 일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도연명이 의리를 지키려고 했다던 진나라에서는 도연명의 취급이 미묘하죠. 환현과의 일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송나라 때는 환현과의 관계를 쏙 빼고 충신으로 등극합니다.

도연명과 동시대인인 안연지는 도연명에 대해 말하는 글인 ‘陶徵士誄’에서 그를 ‘徵士’, 즉 조정에서 부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연명은 동진시절에 ‘은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출사한 전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후대에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오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연명이 낙향한 당시 慧遠이라는 승려가 여산에서 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긴 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유가적인 도연명에게 불교가 득세중인 고향은 아무래도 그에게 맞지 않았죠. 아마 그가 직접 쟁기를 들고 농사를 지은 이유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훈장을 하며 지역 지식인들과 교류하기에 너무 자기랑 맞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 당시 혜원은 재가자와 출가자의 법도는 다르다고 천명하며, 산문을 넘지 않는 수련생활을 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참가한 이 결집에 도연명은 참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혜원과 유명한 도사인 육수정, 그리고 도연명을 한 화폭이 그리는 것이 후대에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됩니다. ‘虎溪三笑’라고 하는 이 화제는 서로 다른 계통의 캐릭터가 만나서 이야기하는 데 여념이 없다보니 혜원이 넘지 않겠다고 다짐한 虎溪를 넘어서고 만 일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100% 픽션이지요. 도연명은 불교와 거리가 멀었고 육수경은 두 사람과 시대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유불도의 만남은 오랫동안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도연명은 41세 이후 더이상 관직에 있지 않습니다. 집도 가난했지요. 그런데 도연명에게는 아들이 다섯명이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야 존경받겠지만 아들 된 입장에서 가장이 저러고(?) 있으니 보통 불만이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아버지도 아들들을 보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도연명은 낙향한 후 전원시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아들에 대한 시도 제법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밌습니다. “아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모두가 종이와 붓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시작하여 다섯 아들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한탄하지요. “첫째는 게으르고 둘째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셋째는 숫자도 모르고 등등...술이나 마셔야겠다~” 몇편 보고 있으면 정말 자식을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식을 핑계로 술을 마시려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자식에 대해 여러 시를 남겼습니다. 그중 첫째아들이 관례를 할 때 남긴 <命子>라는 긴 시는 아들을 걱정하는 정감이 어려 있지요.

전원시의 대가 도연명입니다만, 그의 시에는 어쩐지 사령운의 시에 있는 자연의 호방함이 없습니다. 전원을 보되 어쩐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죠. 빛깔이라든가 색이라든가 규모라든가 하는 것이 거의 제거되어 있는 도연명의 시. 그런 걸 보면 자연을 노래한 시! 라고 해서 하나같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는 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은 신비롭지도 거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저 자신의 작은 집과 밭이었고, 소재는 주로 그런 전원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자식을 보며 드는 걱정이었으니까요.

다음 시간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격적으로 읽어볼 것 같습니다. 그가 ‘귀거래’ 하게 된 이유와 심정, 그리고 그런 전원은 어떤 것이었고 도연명이 시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다음 시간에 감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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