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3주차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1-11-14 07:32
조회
246
주역과 글쓰기 3주차 후기

이번주부터 선생님께서 괘를 다시 한번 훑어주시기로 했습니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새로운 것이 자꾸 보이기도 하고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엔 에세이와 관련해 괘를 다시 해석해보게도 되고 그러네요. 이번주에는 건괘와 곤괘 정리를 했는데, 강의는 건괘의 단사의 글자 하나하나 해석하는 것을 통해 원형이정을 설명해 주셨어요. 선생님께서 해석의 정석을 보여주셨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2500년전 텍스트 주역을 1000년전 정이천의 주를 통해 21세기의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맞는 해석을 해보는 게 우리의 목표임을 잊지말라는 당부로 강의를 시작하셨어요.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건괘의 단사는 이렇습니다.

彖曰,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雲行雨施, 品物流形. 大明終始, 六位時成, 時乘六龍以御天.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太和, 乃利貞. 首出庶物, 萬國咸寧.

# ()

- 大哉 : 경계 지을 수 없다

단전에서는 건을 우선 크다고 합니다. ‘크다’는 것은 무한의 관점에서 말해져야 합니다. 분할가능한 양적 큼이 아니지요. 똑같은 사물을 양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과를 반 잘라 둘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지요. 양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한계가 있게 됩니다. 무한히 쪼개 작은 것도 아주 큰 것도 마찬가지이죠. 반면 무한은 ‘변화’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개입된다는 것입니다. 사과를 반으로 자른 순간 변화가 일어났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 사과를 붙여 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이 다 ‘질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분할할 수 없습니다. 변화를 어떻게 분할할 수 있을까요? 매번 다른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변화지점에 이른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주역에서는 무시무종하다고 합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이미 유한하다는 말인거죠. 샘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건 정지해 있다는 것인데, 정지해 있는 가운데만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설명하셨죠. 바로 공감되었어요. 우리는 선별적으로 유무한을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강의를 들으면서는 이해되는 것이 글을 쓰거나 자신에게 가져오면 늘 깜빡합니다.

서양의 창조론에 대비해 동양은 생성을 사유하는데, 우리가 읽었던 빌헬름이나 엘리아데도 이를 대비해 설명했던 것 같네요. 서양의 창조론이 위의 모순 (유한 속의 무한)을 보여줍니다. 샘은 서양철학이 이걸 봉합하기 위한 역사였다고도 설명하셨죠. 영원불멸하는 신이 필멸의 존재인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건 원인(영원)과 결과(필멸)가 상충하는 모순된 말이죠. 스피노자도 신을 생성하는 자연으로 설명하는데, 신에 대한(생성에 대한) 이해가 있고 나서야 인식이 바뀔 수 있음을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생성에 대한 이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줍니다.

- 萬物資始 乃統天 : 만물에 다 하늘의 도가 들어있다

만물은 건에 힘입어 생성되었다는 말인데, 건도는 하늘을 뜻합니다. 자연의 생성변화, 결합이만물이고, 만물은 하늘의 도를 힘입어 만들어진것이기에 만물에는 다 하늘이 깃들어 있습니다.(統天)

-雲行雨施 : 인간 중심주의 벗어남

이런 사유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게 합니다. 운행우시는 만물은 물(水)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고대 동서양의 기본 사유와 맥을 같이 합니다. 물(物)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물, 사물, 광물, 동물, 식물 등등 다 같은 物입니다. 늘 쓰면서도 감각하지 못했던 말들이죠. 인간이 사물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요즘 기후위기와 코로나 등으로 생태와 관련해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지요. 그 첫 번째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비인간, 무생물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담론들입니다. 인간만이 사유하고 능동성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무생물도 서로의 행위를 촉발하는 존재로 보는데, 우리가 쓰레기나 심지어 병뚜껑을 보고도 흠찟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의 행위를 유발합니다. 또 자신의 形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만물이 동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했지요. 만물이 모두 자신을 유지 보존하려는 그 자체를 ‘사고한다’고 보는 관점들이 그것이지요.

- 品物流形 : 운동성 안에 있다.

흘러다니며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만물이지요. 물(品物)과 운동(流)이 분리되지 않고 운동과 동시에 물이 생성됨을 잘 보여줍니다. 또 효를 용으로 본 것도 운동성의 표현이지요(時乘六龍以御天) 육효는 여섯 마리의 용을 타고 (御) 운전하는 것인데,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겠지요.(乾道變化) 그 변화와 조합이 무한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 : 개체화 과정

-各正性命 : 샘은 형을 개체화 과정이라고 설명해주셨는데요. 6개의 효가 운행하며 변화속에서 각각 자기의 본성과 내재되어 있는 성명을 바르게 하는 것, 이게 物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구성된 개체가 자기의 천성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바름(正)이구요. 천성이란 우주의 리듬에 맞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변화에 따라 살지 못한다면 바른 것이 아닌겁니다. 자신의 언어와 표상으로 세계를 고정시키고, 자신이 감각하고 생각하는대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한 성명을 바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구요. 욕망과 언어와 기억이 표상을 만든다고 하신 말씀이 늘 상을 짓고 부수는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保合太和: 개체는 보존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면서 섞인다고 했습니다. 개체로 있으면서도 만물은 이미 인과 연쇄 속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만물안에 시방(공간) 삼세(과거-현재-미래)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작아도 개체는 우주를 내포한 존재입니다. 개체성을 유지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있는 것. 그 개체성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 태화라고 해석하셨네요.

# 리정(利貞) : 개체성의 유지

개체성이 다른 모든 것들을 원인으로 존재하는데 자신을 고집하고 있는 한 자신에게 이로을 것이 없습니다. 이롭지 않다는 것은 자기 보존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내가 나이기도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삶을 살 때가 가장 나에게도 이로운 것이라고 단전은 강조합니다. 그게 貞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구요. 다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삶이 무엇일까요? 우선은 고집스러운 자신의 상을 들여다 보고 이치에 비추어보는 것이 되겠지요. 샘께선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이롭게 개체성을 고수하면서 살 건인가 고민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모두의 에세이가 각자 자신의 리정을 찾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전체 2

  • 2021-11-15 18:12
    후기가 안올라와서 일욜 아침 얼굴보자마자 후기얘기를 했더니만..ㅋㅋ 이렇게 잘 정리를 하셔서 올린걸 미처 제가 못봤군요~^^ 옥샘 멋지네요~~ 이제 샘께 쓰는 언어를 좀 순화해야할거 같아요ㅋㅋ 암벤져스 마무리까지 쭈욱~ 함께해요~^^

  • 2021-11-16 09:05
    후기가 풍뢰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