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일상의 철학 7회차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18-04-07 18:11
조회
143
드디어 <죽음 앞의 인간>을 다 읽었습니다. 인간이 대면해온 죽음의 다양한 모습들을 중세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중심으로 아리에스의 안내를 따라가 보았는데요, 종교적 전례, 문학, 묘지의 형태와 묘비명, 유언장, 도상 등을 통해서 약 1,500년간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해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낯선 풍경들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태도들을 만날 수 있었죠. 그리고 이번 주,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아리에스가 묘사하는 20세기 이후의 죽음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 근대 이후 죽음의 모습들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우리는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거지?’ ‘대체 우리는 왜 이다지도 죽음에 무지하고 무능력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역전된 죽음

20세기 초까지도 한 개인의 죽음은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죽음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죽음을 부정하고 추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은폐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며 결국 병원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의료화 되기에 이릅니다. 먼 옛날의 ‘길들여진 죽음’과는 반대로 죽음은 20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 ‘야만적 상태’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것을 아리에스는 ‘역전된 죽음’이라고 명명하지요.

오랜 시기 동안 인간은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에는 20세기 이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죽음을 둘러싼 모습과 매우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죽어가는 자가 자신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 둘째, 임종 환자가 병과 죽음을 겪어가는 모습은 결코 추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 셋째, 죽어가는 자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통증과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감당했어야 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 이후 가까운 이를 떠나 보낸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애도할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죽어가는 자와 그가 속한 공동체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죽음을 둘러싼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리에스가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인용해 묘사한 것처럼 임종 환자와 주변 사람들은 서로에게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은폐함으로써 죽음의 실체화로부터 생길지 모르는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고자 합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번민을 겪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을 추구하게 되죠.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어가서 다행이야.”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매우 익숙한 말이기도 하죠. 그런데 <죽음 앞의 인간>을 읽고 나서 이제 저에겐 이 말이 아주 이상하게 들립니다. 정녕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가야 할까요? 그렇게 무지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까요?

20세기에 이르러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거의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리에스가 ‘죽음의 의료화’라고 명명한 병원에서의 죽음은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죽음을 대해왔던 방식의 많은 부분을 단번에 바꾸어 버립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자의 배설물, 땀, 고름 등의 악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의료적 처치들을 받습니다. 그중에는 통증과 감각을 둔화시키는 처지도 포함되죠. 임종 환자는 초능력적인 주치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죽음은 의료진의 최종적 승인에 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마취로 둔화된 임종 환자의 의식은 고통은 경감 되었을지 몰라도 명료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미나 토론 중에 저는 이러한 통증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이것이 우리를 병원 시스템에 의존하게 만드는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증이 그토록 나쁜 것인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요. 아리에스는 통증은 죽어가는 자의 악취와 더불어 인간이 오랜 세월 동안 일상의 일부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아주 작은 통증 하나도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통증은 즉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고, 바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여기죠.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감당해낸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통증과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요?

애도의 삭제

중세이래 오랫동안 ‘애도’라는 방문의 관행은 공동체 구성원의 죽음 이후 공동체의 통일성을 가다듬고 인간적 온정을 활성화하는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사회로부터 추방된 죽음은 이제 더이상 애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삶은 멈추지 않고 일상은 계속됩니다. 유족들은 고통을 완벽히 제어하고 정상적 삶을 지속하거나, 슬픔을 표현해도 남들에게 감추며 혼자 간직합니다. 공공연히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병리적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죽음과 애도에 대한 거부는 유족들 개인에게는 개인적 고통의 무게와 사회적 금기라는 이중의 부담을 안겨줍니다. 주변에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일상으로 돌아와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는 그런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그렇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 겪어내면서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채 혼란과 고통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고 맙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며 죽음을 그저 삶으로부터 외면하려고만 해왔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에스의 표현을 따르면 이런 상태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무능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지요.

<죽음 앞의 인간>은 우리에게 죽음을 대해왔던 인간의 다양한 태도들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 어떤 것도 저희에게 죽음 자체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리에스는 다만 수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우리를 안내하며 죽음 앞에 선 역사 속 인간의 다양한 입장들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제 책을 덮고 나서 저희에겐 커다란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과연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가?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되어 있겠죠. 이어지는 세미나 2부에는 ‘죽음의 의료화’를 거부했던 이반일리히와 친구들, 그리고 고대 로마 철학자, 그리스도교, 불교 등 죽음을 근본적으로 통찰하고자 한 선지식과 지혜의 텍스트들이 놓여있습니다. 이 텍스트들을 공부해 나가며 저희는 죽음을 철학하는 힘과 지혜를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엄선된 텍스트들을 읽어보며 죽음을 함께 철학해 보고자 하는 새로운 분들 두 팔 벌려 환영입니다. ^0^/

1부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인 다음 주에는 슬라이드를 보며 채운샘의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죽음 앞의 인간>을 읽으며 아리에스가 묘사했던 그 수많은 이미지들, 작품들의 일부를 만나볼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 담 주에 따로 읽어오실 텍스트는 없고요, 대신 2부 세미나의 첫 번째 책인 <아미쿠스 모르티스>가 조금 분량이 많다고 하니 미리 조금씩 읽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담 주 간식은 은하 샘이 준비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화욜에 뵐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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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8 16:24
    특히 은하 쌤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나의 죽음을 결정한다.' 죽음에 대한 무지가 삶에 대한 무지와 직결된다는 점에 우리 모두 놀랐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