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죽음을 철학하다 2부 첫 시간 후기

작성자
윤영
작성일
2018-04-29 14:50
조회
187
죽음을 철학하다 2부 첫 시간 후기

<아미쿠스 모르티스>

나는 이미 친구의 죽음을 외면했다.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의 뜻을 보고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죄책감을 안고 갔고, 읽는 중 계속 나의 친구가 생각났으며, 읽고 나서는 내 친구의 죽음에 대한 책임, 또한 지독한 부끄러움을 극렬하게 느꼈다. 어찌 그동안 그렇게 뻔뻔하게 살아왔는가? 싶었다. 이러한 수치심을 꺼내, 이 글의 첫 문장에 또렷하게 나의 죄를 고백하며, 나는 앞으로의 삶을 속죄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신에게 정성들여 평생 속죄의 기도라도 드려야 하는가?

사실 귀도 얇고 남의 영향에 크게 받는 나는 이 책을 중간까지 읽고서도 몇 십년동안 접었던 ‘기도’라는 것을 했다. 이 행동의 계기는 특히 “1943년에 죽은 시몬 베유와 놀랄 만한 천연성을 보여주면서, 본회퍼는 부재하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고 믿었다.”(p.170) 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부재하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구절은 내게, 중요한 건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고, 무언가 너머를 바라보는 것 자체임을 느끼게 해줬다. 더군다나 평생 등 돌릴 것 같던 신을 향해 ‘남’을 위한 기도를 해버렸으니, 리 호이나키가 보면 참 뿌듯해 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기도 한 번에도 씻을 수 없는 의문들이 있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신을 믿으라’, 전도하는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글의 맥락과 선후 관계를 꼼꼼하고 논리적으로 쓰는 사람이, 그리도 순수하게 신이라는 (가상의, 추상적인)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글을 통해 “완벽하게 이성적인 삶은 이 세상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사람은 반드시 믿음을 선택해야만 한다.”(p.217) 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국 답은 ‘신’인 것인가?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아니 애초에 풀릴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세미나 시간에서도 비슷한 결의 생각들이 이야기되었고, 나는 호이나키의 글에 동조도 되고 거부감도 느꼈던 터라 모든 말들이 공감이 갔었다. 책을 다 읽지 못 하고 참여했었기에 전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손에 쥐고 나머지 장들을 읽었고, 다 읽어 가는 데도 끝까지 1도 모르겠었기에 점차 발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 갑갑했던 질문의 방에 구멍을 뻥 뚫어주는 듯한 구절이 나왔다. “궁극적 근원이자 선이라고 믿어지는 존재가 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이 선한 존재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419) 이 구절로 인해 전에 있던 의문의 매듭이 한 올 풀렸고, 내내 소화가 안 되던 ‘전통’이라는 말이 드디어 씹히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 그러나 분명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무엇’을 ‘선’ 혹은 ‘신’이라고, 대대로 불러오는 것이었구나! 결국 이해를 가로막았던 것도,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 ‘이름’이었다. ‘신’이라는 이름이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내 눈을 가렸고, ‘선’이라는 이름이 좀 더 열린 공간으로 내 사유를 데려갔다. 이 ‘선’이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에게 “가슴에서 우러난 선량함”(p.261)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래 구절에서도 암시됐다.

“내가 책상에서 일어나 현대라는 지옥에서 여전히 어떻게든 살아있는 새로운 지인들을 만나러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을 때, 나의 곤혹스러움은 증가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읽은 모든 것은 지구의 축소, 파괴와 그곳에 사는 이들이 교살되어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음에도.”(p.106)

즉, 현대 테크놀로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 해도, 역사적이고 전통적으로 사람의 본성에는 선량함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짜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사람이든, 혹은 일명 ‘세속적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든, 인간의 ‘선’은 본능적이고도 보편적인 것으로, 각자 자기만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말한다. 리 호이나키는 또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초월적인 존재로 편입된다는 게 과연 진실일 수 있는가”(p.286) 라는 의문을 가지며, 신자든 아니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 나는 어떻게 속죄해야 할까? 내가 오래간만에 한 번의 기도를 하고, 앞으로 평생 다시 또 기도는 안하게 될지라도,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미 다 늦었지만, 그래도, ‘선’에 가 있을 친구를 위해, 나는 뒤늦은 ‘아미쿠스 모르티스’가 될 수 있을까? 아직 의문을 풀지 못한 무거운 마음으로 책에서 ‘아미쿠스 모르티스’를 처음 제대로 언급하고 설명한 구절을 아래 적는다. 이 구절을 거듭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내가 ’나’의 존재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의료 시스템과 대면할 때,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예리함으로 우정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강조한다. 순수한 친구는 많은 경우에 중요하지만, 특히 테크놀로지에 침범되는 죽음을 피하고 자신만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리치는 이런 사람을 아미쿠스 모르티스amicus mortis, 즉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죽음에 임하는 것을 도울 능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지 않는다. 그는 가슴에서 우러난 선량함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는 여러 징후로 나타나는 현대적 기술의 모호함과 문제적 성향에 대한 인식과 나라는 인간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통합할 수 있다.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은 서로 어울려 드러난다. 그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에 대처하는 능력art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고, 또한 내가 그러한 능력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그는 죽음 앞에서 나를 괴롭힐 의심과 두려움에 맞설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준다.”(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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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읽고 이해하는 속도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전부 변명이지만!

위 글에서는 '신만이 구원인가'라는 질문을 핵심으로 두고 썼지만, 미처 못 쓴 의문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는 밑에 적어두고 앞으로 공부하면서 또 계속 풀어가고자 합니다!
  • '테크놀로지'의 경계는? -- '의료' 말고도 '자동문', '버스', 더 나아가 '안경'도 기술 및 제도로 부정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테크놀로지를 인간 역사의 자연스러운 변화/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모색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 인간에게 '감각'이란 어떤 의미인가? 좀 더 많은 감각들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긍정적인 것인가?

  • 전통 밖에서 자기만의 죽음을 찾는 방법은 없는가?

  • 함께하지 못한 죽음, '고독사'는 비극인가?

전체 4

  • 2018-04-30 04:37
    아미쿠스 모르티스, 죽음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기 위한 첫번째 걸음은 '배움'이었습니다. 타인의 삶을 배운다는 것. 죽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없음은 전적으로 신(선)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정말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었지요. 윤영의 남은 질문도 감동적인 답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 2018-04-30 15:37
      “선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한 궁금해지네요. 감사합니다!

  • 2018-04-30 09:31
    '부재하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후기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기 전에 남겨둔 세명의 제자에게 기도하고 올테이니 그새 깨어 있으라 했으나 이들은 콜콜 졸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이유로 영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지, 활연관통하는 만남은 그 무엇에도 환대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아직도 배움에 있습니다. 질문도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 2018-04-30 15:39
      저는 ‘부재’함에도 온맘 다해 믿을 수 있는, 그 자세가 진정 신성하다고 생각했어요! 질문을 많이 만들어주는 책이었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