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융과 프로이트의 죽음에 관한 에세이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8-06-01 07:53
조회
239
일상철학후기/융과 프로이트의 죽음에 대한 에세이/2018.5.28./윤순

이번 주 일상의 철학에서는 정신분석학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융과 프로이트의 죽음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프로이트 :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먼저 토론하게 된 프로이트는 인간이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는 전쟁의 환멸에 대한 정당성 여부와 전쟁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종래의 태도에 혼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 전쟁의 환멸

프로이트는 전쟁이 인간에게 두 가지 환멸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국가 내에서 도덕규범의 수호자인 척하는 국가가 대외적으로는 저급한 도덕성을 보여 준 것이고, 두 번째는 개인들이 문명인들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잔인성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에 대한 환멸입니다.

그는 주로 두 번째 환멸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요, 인간이 가진 충동은 모두 비슷하고, 그 목적은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는 것입니다. 이 충동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개인들의 충동을 인간 공동체의 욕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따라 선과 악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악하다고 또는 완전히 선하다고 분류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의 욕구를 위해 개인의 악한 본능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악한 본능을 변화시키는 내적 요인은 사랑에 대한 욕망(에로티시즘)이고 외적 요인은 가정교육이 행사하는 강박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문명은 인간 개인의 본능 만족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고, 문명세계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문명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사회는 개개인의 동기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렇게 문명사회는 선한 행동을 요구하지만 이런 본능적 바탕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회에 살면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문명사회에 복종합니다. 개인들이 복종하자 사회는 점점 더 엄격한 기준을 개인들에게 요구하게 되었고,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본능적 기질을 억제해야 되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긴장은 반동과 보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가장 억제하기 어려운 성의 영역에서는 신경병이라는 반동 형성이 나타나고, 다른 영역들에서는 성격의 비정상적인 형성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런 금지된 욕망은 적당한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터져 나와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현대 문명은 그런 위선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진정한 문명인 보다 문화적 위선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도래한 비문명적 행동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대해 문명이 본능을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 죽음에 대한 태도

전쟁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종래의 태도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부인할 수도 없는 필연적 결과라고 알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종래의 태도는 실제로 마치 죽음이 피할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죽음을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고 그것을 삶에서 배제해 버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파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고, 바꿔 말하면 무의식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이 일어나면 기대를 배신당하기라도 한 듯이 심한 충격을 받습니다. 마치 우연한 죽음이 사건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자체인데, 이 생명이 내기에 걸려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삶은 빈곤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이처럼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삶을 생각하는 경향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단념시키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에 큰 전쟁(세계1차 대전)이 벌어집니다. 이 전쟁은 위와 같은 죽음에 대한 관습적 태도를 일소해 버립니다. 죽음은 더 이상 부인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우리는 죽음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죽음이 우연이라는 느낌은 사라지고, 삶은 다시 흥미로워지고, 인간은 원래의 내용물을 완전히 되찾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전쟁으로 인해 인간은 죽음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반면 아직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과 인간의 두 가지 관계(원시인이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되는 관계와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존재하지만 정신의 심층에 숨어 있어서 의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서 새로운 태도를 찾아보려 합니다.

원시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모순에 차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원시인에게 타인의 죽음은 싫어하는 자의 소멸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타인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원시인의 역사는 살인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선사시대 이후 인류는 막연한 죄책감을 갖게 되었고, 일부 종교는 그 죄책감을 원리인 교리로 농축시켰습니다. 하지만 원시인도 자기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의 죽음에서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결국 그가 사랑하는 자기 자아의 일부였지만, 그들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그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가감정>의 법칙은 오늘날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감정의 갈등이 인간의 탐구심을 촉발시켰고, 심리학은 이 감정의 갈등에서 태어난 첫 자식이었다고 까지 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멀찌감치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죽음에서 소멸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죽음이 가져온 심리 변화를 통해 인간은 개인을 육신과 하나의 영혼으로 나누는 것을 생각해냅니다. 망자의 대한 끈질긴 추억은 다른 형태의 존재를 상정하는 근거가 되었고, 이 근거를 가지고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개념을 만듭니다. 종교가 삶을 과거까지 연장하여 전생과 환생과 윤회 같은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죽음에서 박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태도>의 기원은 이처럼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초의 윤리적 계율이 생겨났는데, 깨어난 양심이 처음으로 금지한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계율은 사랑하지 않는 타인에게로 차츰 확대되었고, 마침내 적에게까지 확대됩니다. 경건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사악하고 비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금지는 강력한 충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강력하게 금지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 일들은 저절로 배제되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강요하는 자체가 우리는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살인자의 자손이며, 조상의 피 속에 갖고 있었던 살인에 대한 욕망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있으리라는 것을 확인해줍니다.

오늘날 정신분석학에서 발견된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무의식의 태도는 어떠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원시인의 태도와 거의 똑 같다고 프로이트는 답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양가감정 :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충돌하여 일으키는 감정>에 따른 이런 갈등이 과거에는 영혼에 대한 교리와 윤리학을 만들어 냈지만, 이제는 신경증을 낳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죽이고 싶은 소망을 품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분열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이라는 옷을 발가벗겨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인을 노출시켰습니다.

<: 심혼과 죽음>

- 심혼과 멀어진 죽음

융은 죽음을 ‘인간 개체의 저 틀림없는 종말’이라고 정의 합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모르고 있는 인간은 아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에게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사실밖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때, 인간이 삶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생활의 지혜는 사라지게 되고 불안만이 그에게 엄습합니다. 죽음은 생물의 삶에서의 정상적인 요구인데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불안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죽음이 그저 하나의 경과의 끝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확신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목표이고 삶의 충족이라고 이해할 생각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융은 생물학적(자연법칙) 인생의 곡선은 마치 탄도의 포물선과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적 인생의 곡선은 자연법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불일치는 상승시부터 시작되는데, 물질적으로 탄도는 올라가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탄도가 정점을 지나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눈치 채면서도 최소한 처음에 도달했던 높이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매달립니다. 심리학적 공포는 이제 삶의 방해물에서 죽음에 대한 방해물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자연의 토대를 잃어버립니다. 인간이 청년기를 회상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살아 있는 관계를 발견할 수 없게 되고, 이는 생물학적인 몸의 변화 과정과 분리되어서 심리학적으로는 삶의 과정에서 제거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융은 “심혼을 양육하는 지반은 자연스런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위와 같이 자연법칙을 따르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곡선과 불일치하는 심리학적 인생의 곡선은 심혼이 자연스런 삶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인생의 중반기부터는 오직 인생과 더불어 죽고자 하는 사람만이 활기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인생 곡선에서 인생의 정오에서 일어나는 포물선의 역전은 죽음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후반기는 상승, 발전, 증대, 생의 충일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틀림없는 진실에 할 수만 있다면 동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보통 자기의 과거에 집착해 있고 청년기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에게 노년은 피하고 싶은 과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30세의 남자가 어린애 같다면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여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70세의 남자가 30대의 청년기와 같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청년의 활기를 가진 그를 부러워하고 그의 늙지 않는 비결을 알려 할 것입니다. 융은 위의 두 사람은 차이가 없고, 둘 다 자학적이고 품위가 없고 심리학적으로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 둘 모두는 그들의 인생 밖에 서 있으면서 기계처럼 극단적으로 무의미한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융은 묻습니다. “도대체 그런 유령을 필요로 하는 문화란 어떤 문화인가?”(p98)라고요. 저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동안을 유지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의 문화가 바로 유령을 필요로 하는 문화란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에 해당하는 인생의 상승에 대한 목표와 의미를 인정한다면 늙어가는 과정인 인생의 하강에 대해서 왜 그것이 인정될 수 없겠는가를 융은 묻습니다.

융은 죽음이 제2의 탄생이며 무덤 너머 영속으로 다리를 놓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는 모든 민족들에게 표명된 죽음에 관해 일치된 견해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지상의 위대한 종교들에서 오해의 여지없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는 불교, 기독교에서의 종교적 상징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것이고, 표층일 뿐인 의식과는 별로 닮지 않은 정신적 심층(심혼)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수 천 년이 경과하는 동안 식물처럼 인간 심혼이 점진적으로 자라나 자연 그대로의 계시가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를 철학처럼 머리를 짜서 생각해낸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의견을 따른다면 그는 심리학적으로 고립되고 그 자신이 지닌 보편적 인간 본질에 대립하게 됩니다. 인간의 신경성 장애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하는 인간 소외에 있고, 의식이 어떤 심적 근본 사실로부터 분열되는 데 있습니다. 올바른 사고는 언제나 가슴(심혼의 심층의 근간)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의식은 왜곡된 사고를 일으킵니다. 융은 “늙어가는 사람들은 좋든 싫든 죽음을 준비하는데, 객관적으로 각 개인의 의식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주관적으로는 의식이 심혼과 보조를 맞추느냐, 가슴이 모르는 생각에 매달리느냐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p102)고 합니다. 융은 심혼으로 느껴야할 죽음을 머리로 알려고 할 때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히 먼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발제는 세네카<인생론>입니다. 발제와 간식은 정옥샘과 윤영샘입니다. 다음 시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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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4 08:32
    프로이트도 융도 한 사람의 의사로서 삶과 죽음 전체를 생각해보려 했다는 점도 감동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