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죽음 세미나, 세네카의 <인생론> 후기

작성자
윤영
작성일
2018-06-07 09:30
조회
181
죽음 세미나_세네카의 인생론 후기

이번 죽음 세미나에서는 세네카의 <인생론>에서 발췌된 글을 읽었습니다.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먼저 ‘삶의 짧음에 대하여’ 장은 세네카가 파우리우스군에게 보내는 글로, 시간의 운용에 관하여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삶을 생각하며 쓰는 편지’라는 장으로, 세네카가 루킬리우스군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여기서 세네카는 죽음과 선(좋은 삶)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세미나에서 함께 생각을 공유했는데, 제가 느낀 핵심 키워드는 크게 세 개, ‘시간, 철학, 우정’ 이었습니다.

1. 시간

세네카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 더 짧거나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충분히 길어 그 전체가 유효하게 쓰여진다면, 가장 위대한 일이라도 완성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주어진 것이다. (…) 삶은 사용방법을 알면 길다.”(276-277) 즉, 여러가지 일에 치여 바쁜 사람은 어느새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있게 될 정도의 짧은 시간을 사는 사람이며, 한가하게 지금 이 순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앞의 사람보다 더 긴 시간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쁘게 사느냐 한가로이 사느냐는 나의 시간을 어떻게 운용할 수 있는가를 아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을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는 데 있어 최대의 장애는 기대를 갖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일에 의존하여 오늘을 잃는 것이다. 운명의 수중에 있는 것을 늘어놓고, 현재 손바닥에 있는 것을 팽개친다. 그대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하여 가려고 하는가. 장래의 일은 모두 불확정 속에 존재한다. 지금 당장 살아야 된다.”(288)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세네카에게 좋은 시간 운용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현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져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명예나 지위 따위에 바쳐진다면 삶은 부질없이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관복을 몇 번이나 입은 사람을 보아도, 대광장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을 보아도, 그런 것을 그대는 부러워하면 안 된다. 고관이나 명성은 삶을 희생하여 획득한 것이다. 겨우 1년밖에 안 되는 임기를 자기 이름도 끼고 싶어서, 그들은 자기의 모든 세월을 헛되이 바친 것이다.”(305)

결국, 세네카는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이 현재를 충분히 누려야 긴긴 시간으로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알았으면 하는 것은, 누구도 미래의 일로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 마찬가지로, 영혼도 스스로 병든 것을 기뻐하며 고통의 원인을 추구할 때, 지난날의 잊혀진 일에 의해 슬픔에 잠길 때가 있네. 지나간 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네.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일은 없네. 그런데 괴로움은 느낄 수 있는 것에서가 아니면 생기지 않는다네.”(517)

여기서 추가적으로 세미나 때 이야기된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여 현재를 보내게 될 때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에 집중하고 몰입할 때, 즉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시간을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둘 다 스스로에게 집중한 상태지만 한 쪽은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한 쪽은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니, 헷갈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몰입의 상태일 때는 나를 ‘지금’에 집중시킨다기보다는 벗어나게 한다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몰입을 했을 때와 그 전과 후를 비교해보면, 몰입을 한 순간 ‘나’는 현재의 시간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세상에 가 있고, 몰입이 풀리게 되면 다시 돌아와서, 몰입의 전과 후의 ‘나’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똑같습니다. 말하자면 몰입의 순간이 나의 시간에서 잘라져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네카의 ‘집중’은 나를 ‘지금’ 살아가게 하여, 한 순간도 현재의 시간을 외면하는 일 없고, 결과적으로 계속 계속 지금의 ‘나’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변해가는 ‘나’만큼 시간도 더 길고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즉, 몰입은 현재의 ‘나’를 지우고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라면, 세네카의 집중은 현재의 ‘나’를 바꾸고 시간을 길게 하는 것 같습니다. 

2. 철학

세네카의 삶은 현재에 집중할 때 더 충만해집니다. 여기서 현재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철학’이 있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네. 자신의 악덕을 인정하는 것은 건전하다는 증거라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단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네. 그런데, 우리를 각성시키는 것은 철학뿐이고, 철학만이 깊은 잠을 뿌리칠 수 있네. 철학에 온 영혼을 바치게. (…)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정신을 건전하게 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게.”(464) 철학으로 정신을 건전하게 만들어야 우리는 각성되고, 시간을 잠에 잃지 않고 맑은 눈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철학이란 이성의 배움이며, 진정한 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충만한 삶,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결심을 굳히려는 자는, 훌륭한 일이야말로 유일한 선이라고 생각해야 하네. (…) 이성이 주는 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며, 견고하고 영원하네. 그것이 쓰러지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쇠퇴와 감소조차 하지 않는다네.”(511-512), “이성을 사랑하게! 이성을 사랑하면, 자네는 어떤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얻을 것이네.”(514), “미덕은 어떠한 곳에도 비어 있는 채로 두지 않고 영혼 전체를 차지하여, 어떤 것에 대한 사모의 정도 제거하고 그것만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네. 실제로 모든 선의 힘과 기원은 미덕 자체 속에 있다네. (…) 미덕이 살아 있는 한, 무엇이 사라져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네.”(515), “그러므로 미덕은 행복이네. 실제로 행복이 있는 곳은 오직 하나, 다름 아닌 정신 세계이며, 그 행복은 흔들림 없고, 장대하며, 평정하고, 신적인 것과 인간에 관한 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획득할 수 없다네.”(516)

각성된 정신은 본의가 아닌 것은 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의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세미나 때 중요하게 다뤄진 개념이 나옵니다. 바로 ‘자살’입니다. 세네카는, “잘 죽는 것이란 스스로 죽는 것을 말하네. 본의가 아닌 것은 절대로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483), “위대한 인물이란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명령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찾아내는 사람이네.”(508)라고 말하며, 스스로 죽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철학하지 못하는 삶, 나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때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긍정하는 측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세네카의 관점에 대해 세미나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지금 후기를 쓰면서 세네카가 말하는 스스로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自殺의 본 뜻은 나를 죽이다(殺)로, ‘나’ 뒤에 목적격 조사인 ‘를’을 동반하는 만큼 스스로를 피동으로 — 수동적인 객체로 만듭니다. 하지만 세네카는 현자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찾아내는 능동적인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살의 수동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스스로의 죽음’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자사(自死)’라고 일컫는 편이 제겐 더 적절해 보입니다. 실제로 2013년 3월 30일,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자신을 죽이다’는 의미인 ‘자살(自殺)’ 대신 ‘스스로 죽다’는 의미인 ‘자사(自死·일본어 발음은 ‘지시’)’를 공문서용 공식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기사 출처: 일본 지자체, 공문서에 '自殺' 대신 ‘自死’, 연합뉴스, 2013.03.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176471) 그만큼 자살(自殺)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살의’가 세네카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고, 자사(自死)의 뜻인 ‘스스로 죽다’가 갖는 ‘선택’의 의미가 더 그것과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논점에서 멀리 나아간 것 같기도 하지만, 단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 인해 ‘스스로 죽는다’는 것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힘든 것 같아, 단어적인 의미를 더 파헤쳐 말해보았습니다.

3. 우정

세네카의 인생론에서 돋보인 것은 ‘편지’라는 형식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매우 길어졌군.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하루 종일 쓸 수 있을 만큼 많이 있네. 인생에 일단락을 짓는다 하지만, 편지도 일단락 지을 수 없는 인간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잘 있게. 이 말이 자네는 훨씬 더 반갑겠지, 죽음으로 메워진 편지를 읽는 것보다는. 잘 있게.”(480), “지금 어떤 기분으로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마치 이 글을 쓰다가 죽음에 불려가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네.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인생을 누릴 것이네. 왜냐하면 나는 언제까지 계속 누릴 수 있을까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482), “누구보다 소중한 루킬리우스여, 내가 산 인생은 이제 충분하다네. 나는 만족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네. 잘 있게.”(483) …. 이렇게 세네카는 “잘 있게.”라는 말로 글의 마무리를 지으며 이것이 특정 독자에게 건내는 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인의 생각을 혼자만 읊조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상대에게 말하고 설득하고 계속해서 대화하며 생각과 배움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는 것, 벗으로서 ‘곁’에 있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벗은 마음으로 옆에 잡아두어야 하네. 그러면 어디에 가더라도 헤어지는 일은 없네. 누구든 만나고 싶은 상대와 날마다라도 만날 수 있지. 그러므로 자네도 나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산책하도록 하게. 우리의 인생이 좁고 한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네. 나에게는 자네가 보이네, 나의 루킬리우스여. 바로 지금, 자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네.”(469-470) 즉, 우정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의 인생을 넓게 보여주면서 함께 나아가고 배우게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왜 죽음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우정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미나를 통해, 그리고 이후에 생각을 거듭해봤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우정의 차이점은, 전자가 거부할 수 없는 것과 비이성을 얘기한다면 후자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이성을 얘기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세네카의 죽음은 스스로가 선택하는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항 불가능한 사랑이 아닌, 능동적인 관계인 우정 안에서 죽음은 같이 논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사랑 안에서 죽음을 다루게 된다면, 우리는 무덤 앞에서 춤을 추거나 시체와 성행위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세네카에게 현자와 반대되는, 감정과 욕구로 바쁜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에 ‘나쁜 죽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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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번 세미나 때는 제가 발제문을 맡기도 했는데, 피드백을 받으며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특히나 ‘나’에 빠진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해 텍스트 자체를 좀 더 공부하지 못 한 저의 오만을 또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루킬리우스여, 실제로 나의 착각이 아니면, 우리의 오해는 죽음이 쫓아온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네. 그러나 죽음은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고도 있었던 것이네.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음이네. 실제로 무엇이 다를까? 시작하지 않은 것과, 끝내버린 것은? 어느 쪽이든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 않는가?”(466), 이 구절 하나에 빠져서, 특히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음이네.”라는 말을 혼자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석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훨씬 더 많이 겸손해질 것을 다짐했습니다. ‘나’를 빼고 텍스트 중심으로 읽기 — 배움의 대상을 ‘주파’하기. 그렇게 진짜 철학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항상 이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은 제가 ‘쓴다’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발현될 수 있던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쓴다’는 것은 이렇게, 더 나은 ‘나’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 같아, 너무나도 힘든 것임에도 어떻게든 해야겠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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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번 글과 세미나를 통해 새로 나온 질문 및 의견을 쓰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질문 형식이 ‘—하다’체라서 아래부터는 종결어미가 바뀝니다!)

Q1. 세네카는 행복하기 위해 현자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불행과 우울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이유는 최근 나의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점점 행복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전에는 왜 이렇게 불행하며 왜 이렇게 고통스레 살 수밖에 없는가, 의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불행하다는 것 —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내가 피하지 않고 두눈 부릅 뜨며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번에 행복감을 느끼며 되려 이를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행복해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시선을 돌리는 데에서 오는 이 게으른 행복감. 그리고 자기 혐오감. 또한 엄청난 죄책감.

‘나’를 잃지 않으면서, ‘나’를 벗어나는 이 굉장한 여정. 과연 나는…. 과연 나는…. 과연 나는 누군가와 함께 하면서, ‘나’…라는 말을 계속 할 수 — 내뱉을 수 있을까. 나는 제대로 길을 잘 잃을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일단 살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이렇게 최근 들어 나는 오히려 불행이라는 것을, 맞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직면의 결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네카는 행복과 평온을 목표로 최고선과 현자의 길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의 글도 하나의 의견으로 보고 나의 생각과 별개로 공부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 최근 생각과 부딪히는 면이 있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사족이지만, 이 불행과 우울을 긍정하는 (혹은 긍정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이유에는 내 주변인들, 특히 내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불행하고 우울해하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까 정말 사족이다. 하지만 이것은 후기니까 좀 더 자유롭게 사족을 곁들여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최근 개인적인 내 화제는 ‘행복과 불행을 새롭게 바라보기’ 따위라, 세네카의 <인생론>을 보며 이러한 의문이 나왔다.

Q2. ‘근거 없는’ 글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세미나에서 재밌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시간론과 문장론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논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글은 근거와 증명 중심의 글인데, 이런 글이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글 또한 ‘시간론’과 ‘문장론’, ‘근거’의 개념이 발명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발명품’인 것이었다. 근데 우리가 이 발명품 글에 너무 길들여져서, 오히려 세네카의 <인생론>과 같이 근거 없이 쓰여진 (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과거의 텍스트를 낯설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다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파하는 메시지와 그 의미는 무엇인지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 근거 없는 글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왜 근거 없게 느껴지는지, 과거에는 이 텍스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등, 겸손하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내 앞의 글을 대해야 한다. 나 또한 세네카의 글뿐 아니라 융의 글에서도 ‘근거 없는’, 추상적인 느낌이 들긴 했는데, 그럼에도 열린 눈으로 텍스트들을 꼼꼼하게, 열심히 주파하는 자세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더불어 텍스트 중심으로, 낮은 자세로 공부하는 태도를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Q3. 현실적으로 인간이 감정을 버리고 이성을 챙길 수 있는가?

질문을 좀 극단적으로 쓰기는 했지만, 세네카가 현자는 감정보다 이성에 집중한다고 말하며 이를 지향점으로 두고 있어서 든 의문이다. 세네카 본인이 현자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본인이 지향하는 점을 스스로도 실천해야 그 자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데 그의 글은 그렇지 않은 부분도 몇몇 보였다. “친애하는 루킬리우스에게. 나는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하네. 그리고 항의하네.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아직도 자네는 원하고 있단 말인가. 자네를 위해 유모와 보모, 어머니가 원한 것을?”(481), “친애하는 루킬리우스에게. 자네 편지를 받고 기뻤네. 가라앉은 기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509), “친애하는 루킬리우스에게. 끊임없이 흐르는 콧물과 미열이 자네를 괴롭히고 있다고 들었네. (…) 나로서는 심히 걱정이 되네.”(517)

세미나에서도 이에 대한 의문을 말하기도 했고 여러 의견들도 들었으나 아직 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감이 있다. 여기에는 내가 인간의 ‘감정’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물론, 텍스트 중심으로 읽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접어둘 수 있긴 하지만, 앞의 의문과 마찬가지로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내가 막을 수가 없고, 그걸 후기에서 한 번 적어보는 것도 막을 도리가 없다. 역시 아직 글을 읽으면서 ‘나’를 버리기가 내겐 너무나도 힘든 것 같다. 더 많이 겸손하게 공부해야겠다고 마지막으로 또 다시 결심한다.

p.s. 죽음에 대한 나의 핵심 키워드. 그리고 마지막 프로젝트인 ‘유언장’에 대한 의견.

내가 죽음에 대해서 핵심 키워드로 두고 있는 것은 ‘타인과의 죽음, 그 가능성과 필요성’이다. 특히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번 죽음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에는 ‘유언장’이라는 형식을 빌어 글을 쓸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떻게라도 글을 쓴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낀 이번 시간이었기 때문에, 죽음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글을 마지막으로 또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또 많이 힘들긴 할 것이지만 정말 좋을 것 같다. 또한 ‘유언장’ 그리고 ‘유서’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신화를 깨보고 싶기도 하다.
전체 2

  • 2018-06-07 10:22
    질문에 대한 선민의 의견)
    1) 좋은 삶이란 행불행의 선택이 아니라, 행불행에 대한 철학함과 관련되지 않을까? 그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가?
    2) 문맥을 따라 가면서 글쓴이의 문제 의식을 힘껏 재구해보게 되면, 그 지점에서 나의 문제를 발견하게 될 수도?
    3) 감정과 이성의 구분보다는, 삶을 통찰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함?

    - 여러 질문들 속을 힘써서 돌아다니고 있는 윤영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일상을 철학하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그럼, 마지막 에세이를 향해 전진!

    • 2018-06-08 10:55
      결국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겠군요..!
      깊은 잠에 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하고 또 소중한지, 같이 공부하면서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
      언제나 감사합니다, 전진하겠습니다!! ㄴ(ㅇㅁㅇ)ㄱ=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