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글쓰기

9.22후기및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9-09-24 09:17
조회
146
9.22 장자와 글쓰기 후기 및 공지

 

이번 주에는 복영광사(후쿠나가 마쓰지)님의 <고대 중국의 실존주의>를 읽었습니다. 저자는 2차대전시기 전쟁에 참전해 중국 대륙에서, 죽음에 맞선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고국의 3.11 원폭투하를 직접 경험한 세대입니다. 저자의 경험 때문인지 텍스트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절절한 탐구와 어쩔 수 없이 죽음 앞에 처한 인간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겨 있습니다. 제국의 번영과 몰락을 동시에 경험한 저자의 해석은 무겁고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장자의 대목대목, 구절구절을 저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당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까지 하면서 장자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저자의 해석에 무릎을 치기도 하고, 낯설게 느끼기도 하면서 저희 모두 뜨거운 마음으로 텍스트를 읽었던 것 같습니다. 네, 근데 그게 뜨겁게만 읽었던 거죠. 채운샘은 저자의 독법과 자신이 생각한 것 사이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지,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 그 차이 속에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고 말씀하셨죠, 저에게 많이 남았던 것은, 우리는 보통 장자를 거침없이 경쾌하다고 생각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독법은 아주 무거움으로 다가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인지 질문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잣구에 갇히고 이해하기 바쁘다는 생각에 근본적인 질문엔 도달하지 못합니다.

 

무지를 넘는 힘, 질문

 

우리 장자팀은 공부를 하며 모두 자신이 봉착한 어떤 지점을 못 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텍스트와 함께 읽는 장자에서도 우리의 질문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자신의 비슷한 질문 앞에 서는 것을, 채운샘은 공부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니라고 저항하고 싶지만 똑같은 글, 빈약한 이야기에 저항불가. 그러면서 자신이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지점이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고, 자신의 욕망이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치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영화 기생충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무지가 불러들인 파국이라고 선생님은 해석하셨는데요, 그 곳엔 질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기 삶만 있는 박사장은 다른 삶에 대해 질문할 생각조차 않습니다. 기태네는 가난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함께 살자는 문광의 요구마저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기태네는 박사장에 빙의했고, 계급적으로 분별을 해버리지요. 문광도 지하에 살면서 그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자기 삶에 대해 무기력하고, 그러면서도 박사장을 respect 합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의 조건과 삶에 대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자는 모두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무지를 넘지 못한 파국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것이 공부이자 철학하기이지요. ‘나는 왜 이걸 원하지?’ ‘나는 왜 이걸 놓기 어렵지?’ 이제 스스로를 향해 물어보고 거기에서 출발해 텍스트와 만나 봐야겠습니다. 부처님이나 성인의 말씀은 비근하다고 했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유치한 자기 문제에서 출발할 때 다른 질문이 나오고 자기의 사유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이겠죠. 이것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샘은 부처님조차 남을 구원하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며, 자기 구원은 자기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만이 상대의 말을 수용하여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죠. 자기를 돌이켜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럴 때 자기 구원에도 이를 수 있겠죠.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저자가 보는 인간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미혹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 욕망을 통해 得意와 오만 속에서 살아가는 영광스런 존재임과 동시에 끊임없는 失意와 걱정, 절망의 나락으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반이성적인 현실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그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 역시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 도덕이 필요함을 수긍했다고 저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와 규범이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음’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 현실에 대한 주도 면밀하고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장자>라는 텍스트를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독법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자기 자신의 현존재에 관심을 두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며, 객관적, 대상적, 추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조에 대항해 인간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자의 도구로 수단화 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습니다. 저자는 장자의 철학에서 이것을 길어내었습니다.

여러 강의에서 채운샘이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철학인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조건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가 담겨 있어서 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는 지점입니다.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이고, 저자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고 말하지요.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이 참 늘 하던 말이고, 늘 듣던 말이지요. 어떤 게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최선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최선을 다한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이죠. 채운샘은 스피노자의 언어를 빌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그렇게 하고 나면 회한이 없겠죠. 결과가 평가의 잣대로 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相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할 뿐, 지금하고 있는 것을 넘어 그 다음을, 미래를 덧붙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를 끌어와 평가하고, 미래를 끌어와 희망으로 덧칠하지 않는, 존재와 시간이 현재에서 일치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도 ‘살아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으로 자기의 책무를 다하면 된다’ 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시대 안에서 살아내는 실존적 결의가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을지 역설적으로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유주의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는 무엇을 결의해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욕망하는 것,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 거기에 자신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 거기서 우리는 한 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자의 마지막 학기를 맞아 그 한 발 내딛을 수 있다면, 그래도 나만의 장자 읽기를 구성할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부터 이제 드디어 에세이 개요잡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중심 주제를 잡되, 반드시 자신의 비근한 문제에서 출발할 것.

사실, 다음시간은 방학(?)입니다. 그러나 전 멤버가 일요일에 나오는 관계로 함께 체르노빌 5부작 다큐를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같이 보실 분 환영합니다. 오세요~~~

장자는 2주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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