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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천일야화 강의 3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12 14:54
조회
98
10.11 천일야화 강의 3



사랑 얘기에서는 굳이 성차에 따라서 묘사되는 방식이 적다. 의외로. 우리가 옛날에 읽는 서양동화, 공주와 왕자가 나오는 이야기는 성차가 강했다. 여자는 예쁘고 착한데 남자는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런데 천일야화에서는 남녀를 묘사하는 방식이 다 똑같았다. 심지어 둘은 생긴 것도 똑같다고 나온다. 여성성을 어떻게 그렸는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구어로 전승되었을 이야기는 잡다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판소리도 마찬가지. 흥부전 같은 것을 보면 그 스토리 안에 흥부 집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묘사할 때, 가난해서 쥐가 그 가난을 어떻게 느끼는가도 나타난다. 전승되는 이야기의 핵심.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행위를 하고 이러저러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쓸데없는 부분, 덧붙여진 부분에서 재미를 느낀다. 천일야화는 전승되어 기록된 이야기. 완결된 스토리가 아니라 여기저기에 살이 붙은 이야기가 바로 전승된 이야기의 특징이다. 그런걸 가지고 막장이네 마네 하는 건 이야기를 독해하는 게 아니라 논평하는 제스처.


환대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는 세계. 이들이 싫어하는 건 도둑. 다른 문화권 동화에는 도둑 이야기가 별로 없다. 서양 동화 세계는 천일야화와 좀 다르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비극, 서사시의 세계, 천일야화의 공통점. 환대가 미덕. 그런데 이 환대의 미덕이 어떤 문화에서 생겨난 걸까?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록. 트로이전쟁은 기원전 1200년경의 일. 그런데 그 원인은 헬레네. 헬레네는 파리스를 환대했다. 낯선 자를 받아들이라는 신의 명령 같은 것. 특히나 오딧세이아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환대. 떠돌면 우리는 어딘가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낯선 자가 우리집에 머무는데, 그런 경우 제우스가 보낸 손님이라고 여긴다. 그런 문화는 동쪽까지 다 있었다. 그 환대의 문화가 중요한 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그리스도의 윤리는 낯선 자에게는 누구든 너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주라는 것. 그게 전쟁의 시대에 공존할 수 있는 윤리.

파리스가 놀러오자 메넬라오스가 집을 비운다. 헬레네에게 접대를 잘 하라고 맡기고 가자 그 두 남녀가 눈이 맞아 달아났다. 그래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 한나 아렌트 왈. 가장 숭고한 전쟁.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한 전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뺏길 수 없다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파리스나 헬레네를 욕하지 않는다. 비난받은 건 환대를 해줬는데 환대를 저버렸다는, 그 신의를 저버렸다는 점을 비난한다.

천일야화에서도 환대는 중요한 미덕. 누군가를 집에 데려오고 쉽게 재산을 준다. 이슬람 세계의 이상한 점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개념이 없다. 상인의 윤리라는 건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배를 타고 누군가에게 파는데, 내가 실은 물건이 아니기에 주인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받을만도 한데 주인이 따로 있다고 굳이 말한다. 상인들의 윤리는 바로 신의.

장사치를 탐욕스럽게 여기지만, 여기 상인이라는 존재는 신의를 가지고 있는 존재. 그게 없으면 장사는 못하는 것이다. 그 신의를 깨버리는 존재가 도둑. 그러므로 도둑에 대한 경계가 있다. 그것에 대해 천일야화에서는 왜 그렇게 비난할까. 그게 재산에 대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기에. 내가 정당하게 얻은 게 아니면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자의식도 별로 없다. 왕인데 농부가 되기도 하고 재상인데 제과점 사장이 된다. 이건 상인의 특징인가? 낯선 곳에 금세 적용한다. 그런데 이들은 여자를 그리워하지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타향을 간다 하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게 정착민. 오딧세우스도 10년동안 떠돌면서 집에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지만 막상 집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왕족이나 왕자인 경우인데, 자기 역할에 대한 향수가 없다. 향수는 정착민들의 감정.

이 세계는 정착민들이 크게 갖고 있는 땅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금세 적용한다. 제일 이상한 게 중국 여자가 이슬람 문화권에 갔는데 말이 통하고 어쩌고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인종도 상관이 없다. 심지어 왕까지 하고 너무 잘 산다. 남자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면 아무런 결여가 없다. 홈랜드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확실히 정착민의 마인드가 없는 세계. 농경문화와 확실히 다르다.

이슬람 세계가 타종교를 원칙적으로 배제하지 않는 이유. 그건 귀속감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은 터전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든 회귀본능이 강하다. 그런데 어쩌면 그 홈랜드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정서라는 건 고대보다는 근대가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 농경문화인지 근대문화인지.

한국인들이 6,70년대에 이민을 간 사람이 많다. 그러면 이민자들은 60년대 한국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동화가 가장 안 되는 게 한국인. 이미 21세기의 한국이 다른데도 60년대 제사를 지내고 그 시대 문화를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60년대 민족국가적인 반영인가? 모든 농경국가가 그러라는 법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세계는 어느 땅에 대한 귀속감이 강하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스스럼이 없다. 이야기의 공간 자체가 비향기로 8시간 정도 걸리는 공간인데 스스럼없이 한 공간으로 본다.

서양인들의 심상지리로서의 동양. 그들의 동양. 이집트, 중동, 페르시아, 인도는 거리감이 없다. 그러다보니 중국 공주가 중동에 와서 왕이 되기도 하며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공간감이 서양인의 그것을 반영된 것일수도.

아무튼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히 없다는 것이 재밌는 점.

우리가 낯선 사람들을 도와줄 때 도와주는 사람은 뭘 원하나? 이건 우리의 질문. 천일야화를 볼 때 가져야 할 질문은 낯선자에 대한 태도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 낯선자를 어떻게 이렇게 믿을 수 있을까?

천일야화에서 그리고 있는 건 오리엔트. 꼭 이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슬람도 있고 이집트, 중국, 인도까지 한번에 포괄한다.

환대는 호스피틸리티. 적대는 호스틸리티. 데리다가 풀어놓은 글. 환대라는 것은 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게 아니다. 그가 순식간에 적대자로 둔갑할 수 있는 타자인 경우. 우리는 그럴 때만 그 사람에 대한 환대를 적용할 수 있다. 친구에게 문을 열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은 어렵다. 언제든지 나에게 적대자로 돌변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주는 게 환대다. 적과 손님이라는 윤리를 함께 생각할 수 있을 때야말로 환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자기 집을 내어주는 이 문화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문화, 환대와 적대를 반대로 생각하는 문화와 달리 그 두가지를 동시에 사유하는 문화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서양인들이 오리엔트의 이미지를 어떻게 연구했을까. 헤로도토스에도 많이 나온 이야기. 타자를 대하는 문화에 대한 것도 헤로도토스에도 많이 나와 있다. 자기 스스로가 타자가 되어 한 여행이니까.

헤로도토스의 여정을 정리해볼 것.


이발사의 형제들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 이야기의 어리석음은 착각. 자기가 오해한 것에서 모든 사단이 비롯되었다. 특별히 여자가 잘못했다고 할 수 없다. 여자가 악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 두번째 이야기의 어리석음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줏대없이 행동했다. 누군가의 말에 좌우되는 모질이. 수염까지 깎았다고 하는 건 어리석음이 폭로되는 것. 셋째 형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행에 대한 유머러스한 고찰. 사드가 천일야화의 형식으로 불운에 대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운의 미덕>. 공주로 태어난 두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집안이 망하고 자매가 흩어졌다. 자라면서 내내 어떻게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살았던 두 사람. 그런데 언니는 나쁜 짓을 하기 시작하고 동생은 그래도 착하게 산다. 그런데 언니는 계속 성공하고 동생은 계속 불운을 만난다. 여차저차 해서 동생은 끝까지 불행을 만나고 언니는 승승장구 해서 높은 마나님이 된다. 그러다가 둘이 만나게 되는 순간. 동생이 언니를 만난 이유는 선의를 끝까지 지녔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순간 벼락맞아 죽는다. 당시 미덕과 악덕에 대한 사드의 우화.

<천일야화>를 보면 불행은 어떤 논리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니다. 불행에 대한 태도를 볼 것. 권선징악 세계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동화들은 주로 그런 걸 읽었고. 그런데 천일야화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고 실제로 동화도 그런 세계가 거의 없다. 그래서 동화는 나중에 근대 가족주의에 맞게 개작된 것. 잠자는 숲속의 미녀도 그렇고. 원래 동화라는 게 없었다. 원래 떠돌던 전설과 신화와 설화 같은 것을 애들 버전으로 맞게 꾸민 것. 그러니까 아이들 용 이야기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면 아이들이 실체화 되어야 한다. 그건 18세기 일. 떠도는 이야기를 아이들이라는 관념과 부르주아 가족 윤리에 맞게 각색되는 게 우리가 아는 동화. 원출전을 찾아보면 하나도 권선징악, 해피엔딩이 없다.

모든 이야기들은 권선징악,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본질은 네버엔딩. 그런데 동화는 부르주아적 취향과 아이들에 맞게 억지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 모든 이야기는, 어린이 버전으로 고치지 않는 것은 너무 급작스럽게 끝나고 갑자기 훅 죽고 안 나온다.

두번째 이야기의 약재상.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서 나오지 않는다. 보석상과 하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플롯 개념이라는 것. 그 플롯 개념의 기원을 따져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플롯 개념에 맞게 충실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개연성 없음, 밑도 끝도 없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 모든 이야기들이 끊임없는 사건을 통해 펼쳐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냐고 묻게 된다. 아이들은 이야기가 중단되는 걸 원치 않는다. 이야기는 늘 그 다음, 그 다음. 이게 바로 삶의 본질.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땅으록 가지 않는다. 이야기는 무한증식이 가능. 1000+1

불행이란 아무 이유가 없다.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냐고, 자기 형제들이 딱히 나쁜 짓을 한 게 아닌데 불행을 겪어야 하는가? 물어보면 알 수 없다. 이야기가 뭔가에 대해서 본질과 맞닿아 있는 것.

80년대 김현 선생. 천일야화를 문학이론에 썼다.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욕망에 끝이 있을까.

세번째 형은 눈이 멀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다. 상징을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넷째 형은 고기장수. 별로 잘못한 게 없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어떤 것에 현혹된다. 마법을 상징으로 풀면 우리는 심상하게 일어나는 일에는 현혹되지 않는다. 늘 마술에 현혹된다. 연암도 썼다. 열하에 갔더니 요술사에게 몰린 사람들을 쓴다. 환이기. 열하에 갔더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니까 마술사가 거기 있다. 마술의 기본 원칙은 우리의 눈을 홀리는 것. 마법사가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다. 자기 눈이 속는 것이다. 자기 눈이 속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저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세상을 속아서 본다. 인간의 미망.

다섯째 형. 독백을 너무 크게 하던. 망상. 아주 짧은 시간에 인간은 어마어마한 만리장성을 쌓다가 자기 발치에 놓인 것을 잃는다.

여섯째 형. 집주인과 없는 척 연기. 참고 참고 신뢰를 얻었는데 한순간에 잃고 또 전락하는 이야기.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또 자기 처지를 금방 잊어버린다. 자기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금방 잊는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미망의 상황이 여기 다 있다.

여섯 형. 인간이 어떻게 불행을 이유 없이 당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가. 불행과 행복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그리스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나중에 행복한 삶을 위한 철학과 정의를 이야기한다.

천일야화의 세계에는 오랫동안 인간의 행 불항은 인간이 아는 구간을 넘어서 있다고 여긴다.

기독교는 신을 믿지만 내 불행이 신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어떻게든 신의 의지를 자기 의지와 일치시키려고 하는 게 특징.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되면 내가 버는 것이 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런데 천일야화의 세계는 그런 게 없다.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끼리의 공정함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세계.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인간 사이에서 공정함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일한만큼 받는다, 화폐를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왜 불행해야 하는가 하는 호소가 없다. 20세기 영화인데도 불구. 지진난 마을에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누구도 왜 이런 불행을 자기가 당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감독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달라고 하지 감정적인 언사로 어설프게 위로하려는 경향이 없다. 인간이 겪는 일들이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차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근대인 키아로스타미. 서양의 지원을 받기도 한 그조차 불행에 대해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이것은 인재라든가, 어떤 문제를 고쳐야 한다든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없다.

올해 태풍이 오는 것에 유난스럽게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는 듯. 그런데 그건 국가에 소속된 관리들의 일. 우리의 불행을 시스템으로 환원하는 것은 철학의 부재 아닌가? 어떤 시대의 인간들은 자기의 행과 불행에 대한 어떤 이야기 속에서 행/불행을 이해하는가. 이건 시스템에 환원되지 않는 의식구조의 문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저 담담함은 뭔가. 맨 마지막에 그런 길도 없는 길을 가려고 하는가. 자기 영화에 나왔던 아이들이 살아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살아 있는지를 보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 살아 있음을 보고 싶은 것. 그 폐허 속에서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는 이것. 생사가 인간을 넘어서는 그 거대한 질서 속에서 감독이 뭔가를 보는 것.

키아로스타미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너무 아름답지만 사회비판적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 그런데 그건 서구의 시선이라고 옹호하는 시선도 있다. 왜 우리는 모든 행/불행을 피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은 시스템이 해결해주길 바라고 불행을 계속 줄여가려고 할까. 불행이 아닌 것으로서의 행은 따로 있는가?

천일야화를 읽다보면 주인공이 또 불행을 만났구나 싶을 떄 행이 있고, 다행인가 싶으면 불행을 만난다. 행과 불행이라는 건 너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 행복했습니다, 불행했습니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행/불행은 서로의 씨앗. 이야기는 행도 불행도 아니고 둘이 얽혀 있기 때문에 끝이 안 나고 또 다시 시작된다.

옛날 할머니들 이야기가 그렇다. 할머니들 이야기는 끝이 없다. 할머니 이야기는 어디에 출처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무궁무진하게 이어진다. 구비문학에서 주로 채집되는 이야기가 그렇다. 어떤 마을에 가서 할머니들에게 이야기를 채집한다. 언제 어디의 이야기인지도 알 수 없는 게 끊임없이 나온다. 거기에서 이야기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가 아니다. 소설은 문어체 형식의 이야기. 이야기는 글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민족들의 이동경로, 부족들의 이동경로를 따질 때 첫번째가 유물, 두번째가 이야기. 이야기의 공통 모티프를 따라가보면 그 부족의 이동이 나온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살아남는다.



사랑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근대인들은 모두 감정의 문제로 환원한다. 굉장히 소모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는 사랑이 감정적인 방식으로만 상상되기 때문에. 온갖 표상을 만든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근대의 사랑은 표상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사랑은 몸이 맞으면 되는 이야기이지 사랑이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랑이 우리가 서로 교류하는 마음과 감정을 강조할수록 그 사람은 정신주의자일 경우가 많다.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놓는 편견 속에 있을 경우가 많다.

천일야화에서는 누가 어떤 이유로 사랑에 끌렸다고 하는 감정적 당위가 하나도 없다. 한눈에 보면 반한다. 근대인들도 이에 대해 꿈꾸는데, 근대인들은 그 운명적 사랑을 미화하기 위해 온갖 인과를 갖다 붙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인과가 없다. 완벽한 인간의 사랑일 뿐. 내면의 갈등이 하나도 없다. 이게 근대인과 다른 점. 감정 싸움이 없다. 사랑에 점점 빠져든다고 하는 그런 과정도 없다. 두 남녀의 자연스러운 결합.

셈셸니하르와 페르시아 대공.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의 과정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드라마는 그 직전까지 공을 들인다. 그 다음의 갈등과 시련은 이 앞의 것이 없으면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없다. 그냥 둘이 만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워한다.

중세 기사도문학. 기사도문학의 특징. 기사들은 절대 자기가 보호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게 기사도 정신의 첫번째다. 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떨림과 쾌락을 경험한다. 기사도는 다소 마조히즘적. 마조흐의 대표적 소설이 모피를 입은 비너스. 그런데 거기에는 육체적 관계가 하나도 없다. 마조히즘은 계속 규칙을 정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정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얼마나 최대한 충실하게 규칙을 지키느냐.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서 스톱하기. 마조히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조히즘의 본질은 맞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상대가 원하는 규칙을 완벽하게 수용하는 것. 상대 여자에 대해 완벽하게 자신을 수동성에 놓는 것. 그만큼 쾌락이 극대화 된다.

기사도 정신이 딱 그렇다. 어떤 육욕도 없으며 육욕을 뛰어넘는 차원의 무엇이 있다. 일종의 사랑의 기술. 상대에게 향하는 열정과 저 사람에게 치닫는 감정과 이런 것들을 최대한 제어하는 것만이 상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기사도의 핵심. 모든 사랑의 형태가 자기수련이라는 아트, 기예가 있는가 없는가를 핵심으로 본다. 푸코도 들뢰즈도 중요하게 보는 것. 로마 성애술의 핵심은 섹스의 문제가 아니라 섹스를 하기 전에 나 자신이 성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섭생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 근대 이전까지 성애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근대 이전의 인간들에게 사랑에서 감정이 핵심적 문제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랑이라는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내가 발명해야 하는 일종의 아트, 기예가 있어야 했다.

감정의 진폭과 사랑을 동일시하는 지금은 자기의 사랑을 위한 어떤 자기수련도 하지 않는다. 그럼 사랑이 너무 연약해진 시대. 사랑을 발명한다는 것. 더 사랑하거나 특별하게 이벤트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나 자신에게 이전과 다른 행위를 나에게 유도하는가. 사랑을 통해 어떻게 나 자신의 역량이 이전과 다르게 되는가. 이런 기술의 문제.

그러지 않으면 사랑은 둘 중 하나다. 자본에 끌려가기. 이벤트는 자기단련이 아니라 돈을 쓰는 것. 혹은 감정의 노예가 되는 사랑. 계속 질척거리는 것. 울고 매달리기. 그런데 천일야화에는 그런 감정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이들은 만난 다음에 사랑의 이후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시련의 코스들을 겪는다. 시련을 겪고 만난다기보단 만나고 그 다음에 사랑을 시험하는 일련의 시련들 속에 자기를 놓는다. 대공과 셈셸니하르. 둘이 만났다. 그 다음에는 칼리프라든가 불륜이라든가 하는 역경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시험한다. 사랑 다음에 시련이 온다.

뒤의 이야기도. 결혼혐오. 카마르알자만 왕자. 결혼혐오에 걸린 왕자. 공주는 남자에 대한 혐오. 똑똑한 것들이 똑똑한 생각을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삐대던 사람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다가 하룻밤의 좋은 것도 못 본다. 거기다 실신을 잘 하더라. 감저의 깊이가 실신으로 드러난다. 마음의 강도가 몸의 강도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세계.

왕자와 공주도 하룻밤을 만나고 헤어진 다음 바로 시련을 만난다. 그런데 그 시련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우정을 만나기도 한다. 두번째 이야기의 칭송 대상은 칼리프 아닌가? 다 죽여라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감동해서 왕비의 마음을 100% 이해하는. 둘이 겪는 시련 속에 모든 사람들이 동참한다. 대화들을 보면 약재상도 보석상도 감동하면서도 빨리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험난한 마음의 파노라마를 겪는 것을 보면서 같이 겪는다. 그들이 같이 무릅써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 위험을 같이 겪는다.

들뢰즈.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일을 이루는 게 아니다. 삼도 사도 아닌 n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시련을 겪은 다음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근대. n개의 만남 속에서 하나가 된 남녀 둘을 만드는 게 우리의 러브스토리 해피엔딩.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정형화된 러브스토리가 아직까지 이어진다. 불치병, 계급차, 반대. 온갖 시련들을 무릅쓰고 드디어 만나서 불치병에 걸려 죽는다. n개의 관계가 두 사람의 하나의 관계로 끝나는 게 근대의 러브 스토리. 그런데 천일야화는 보자마자 서로 빠지고, 그 관계에 온갖 관계가 끼어든다.

세번째 얘기 같은 경우는 온갖 사람들이 나온다. 바두르는 그 가운데 우정을 만든다. 부부의 관계인데 우정의 관계. 묘한 동성애적 관계이기도 하고. 여성들만 들어가는 공간이 있고, 여자 하인들이 있다. 그 공간에 대한 서양 사람들이 상상력이 거기서 증폭된다. 그 여성들끼리 부부가 되어 나누는 우정. 그리고 그 둘이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남자랑 만나겠다고 온갖 위험을 무릅썼는데, 나중에는 같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모습이 된다. 그렇게 둘이 너무나 강렬한 우정을 나누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서로의 아들을 사랑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결코 사랑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서로 닮은 남녀가 만나서 우정을 겪고 더한 것을 겪고, 처음 만난 남자와 하지 못했던 이상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동성애의 형태가 강렬한 우정의 형태이기도 하고, 또 서로의 아들을 사랑하는, 호칭을 뛰어넘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건 사랑 이야기로 환원하기 어렵다. 사랑 이야기로 보더라도 그 사랑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관계가 확장되는 사랑이다. 얼마나 많은 심부름꾼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에 모두가 마음졸인다.

두번쨰 이야기. 정념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그 정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 화신.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기꺼이 자기 정념에 모든 것을 바친다. 머릿 속에 재는 게 없다. 둘은 만난 순간부터 그 정념에 사로잡혀서 오로지 그 정념을 향해 간다. 이것도 희한한 일. 정념이라고 한 이유.

센티먼트. 기억과 연관된 정서. 감정. 어떤 상화이 되면 딱 그런 감정이 올라온다. 문화적으로 습득된 감정. 이모션. 생성적인 것. 어떤 그림을 보고 어떤 상황에서 정서가 생산된다고 할 때. 스피노자가 쓰는 것은 주로 이모션. 어펙션. 패션은 이 둘은 다 아우르는 말. 어떤 것을 수동적으로 겪음. 예수 그리스도의 패션도 겪음. 정념은 내가 겪는 것. 당하는 것. 내 의지와 상관 없는 것. 그런데 그 겪는 것을 우리는 반쯤 겪으려 하고 겪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완벽하게 겪어내는 것. 그래서 예수의 수난을 위대하게 본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또 제자가 자신을 팔것을 예감했다. 겟세마네 동산의 호곡과 제자들에게 실망하는 이야기. 이때 그리스도는 제자를 원망하거나 억울하다거나 하는 항변을 하지 않고 다 겪는다. 이반 일리치와 자끄 엘륄이 위대하게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점. 시몬 베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에게 닥친 것을 고스란히 겪어내는가의 모델.

이들의 사랑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온 몸으로 사랑을 겪어내는 이야기. 적당히 궁에서 누릴 것 누리고 대략 뒤에서 만나면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들에게는 순수한 정념. 자신의 정서를 고스란히 자기의 삶으로 겪어내는 것. 이들을 칭송한다면 이들이 사랑하다 죽어서가 아니다. 이거는 근대인들의 감정을 위주로 하는 세계에는 없는 것. 상대의 안위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걱정. 편지가 우리 감각으로 맞지 않을 뿐. 이런 게 연애편지. 정념. 편지를 받는 순간 정념의 무게에 쓰러질 것 같은 것.

근대의 사랑이 어떻게 표상화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천일야화의 사랑을 볼 것. 19세기 서양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코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야기. 그래서 공주와 왕자의 결합과 가족 성립이 많다. 그런데 천일야화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것도 이루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편협하다는 것. 거기에서 우정도 생각하고 근친도 생각하고 오만가지 것들이 딸려 나오게 하는 사랑의 거대한 지평을 우리는 천일야화에서 볼 수 있다.


사랑, 환대의 윤리, 상인의 윤리 등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혹은 행/불행에 대해 쓸 수도 있다. 우리는 도대체 행/불행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우리가 말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서 우리는 더 행복한가? 행복과 불행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합리성이라는 건 얼마나 허술한가.

<올리브나무 사이로>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는 바로크 음악을 썼다. 17세기 음악. 대위법. 바흐의 음악처럼 단순하면서도 반복되는데, 끊임없이 차이가 만들어지는 반복. <올리브 나무 사이로> 같은 것도 계속 굽히지 않고 따라간다. 굽히지 않고 따라가는 장면을 카메라가 멀리서 본다. 그러다가 남자가 막 뛰어서 반대로 올 때 음악의 톤이 바뀐다. 그게 화면과 음악과 맞게 사용한 것.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남자의 방식이 통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직 그런 게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정의 표상, 연애의 표상이 아주 많은 것들이 아주 많은 사랑의 형태 속에서 이질적일 수도 있다.

혹은 가족관계. 가족들이 서로 걱정하는 것은 맞는데 가족과 고향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다. 분명 가족이라는 형태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가족주의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건 또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뽑아서 쓸 것.



샤나메에 대한 정리는 조장이 일요일까지 올릴 것.


일리아스는 5권까지 읽기.

주요 인물 체크하고 샤나메를 관통하는 키워드와 정서.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행위의 근거가 있다.

일리아드를 보면서도 마찬가지. 그 민족의 정신과 연관된 서사시. 일리아드를 읽으면서도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명분은 무엇인가. 죽음의 명분은 무엇인가. 이들의 행위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를 체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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