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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천일야화 강의 4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25 09:01
조회
103

묶인 에피소드 같다. 1. 마법의 문제. 2. 돈을 흥청망청 쓰고 나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경우. 프로테스탄티즘 차원에서는 돈을 흥청망청 쓰면 비난한다. 흥청망청하게 써서 걔가 나중에 망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는 누구도 그걸 비난하지 않는다. 돈을 자기가 헤프게 쓴다는 건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도덕적 결함. 그러니까 부가 하느님의 은총과 비례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왜 이슬람이 자본주의화 되지 않았을까. 상인들의 돈에 대한 마인드가 좀 달랐던 것 같다. 신드바드도 돈을 많이 벌지만 또 많이 쓴다. 어렵지 않게 돈을 쓴다. 그런데 이건 농경민. 서양에서의 자기 땅을 가지고 살아가는 정착민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무장된 서양의 중세를 생각해보면 물론 구두쇠도 비난을 한다. 하지만 동일한 정도로 또 어쩌면 더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더 크다. 그래서 낭비와 사치를 금한다. 신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제 1의 죄. 중세의 여러가지 죄가 있는데 최후의 심판 장면이라든가 지옥에 관한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걸 보면 빠지지 않는 건 사치와 낭비. 왜 이렇게 사치와 낭비에 대해 혐오할까. 그건 굉장히 자본주의적인 것. 지금의 자본주의는 소비자본주의가 되어서 쓰라고 하지만 그건 전제가 항상 축적과 함께 간다. 축적의 욕망. 축적하지 않고 쓰는 자, 없는데 쓰는 자에 대한 비난이 심하다. 사치와 낭비에 대해서는 도덕적 결함으로 보는 것.
누레딘. 흥청망청 돈을 쓰는 자. 그런데 별로 비극적이지 않다. 사람들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심각한 도덕적 죄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서는 돈에 대한 다른 마인드가 있다. 헤픈 애들은 돈을 헤프게 쓰긴 하는데 축적에 대해서 죄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인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돈은 어딘가에서 오고 어딘가로 간다. 이 돈은 내거고 절대적으로 내가 써야 하고 그런 마인드가 있다. 돈 자체가 흘러들어올 때 들어오고 나갈 때 나간다는 마인드가 있다.
고대인들도 화폐에 대한 생각이 다 똑같지 않다. 고대 그리스인은 절제를 중시한다. 그래서 사치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있다. 사치는 중용을 지키지 못하는 자라는 비난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치를 아름답게 그릴 지경. 왜 서양인들은 페르시아를 그릴 때 화려하게 그릴까? 이들이 실제로 손님이 오거나 궁궐을 묘사하는 걸 보면 불을 밝히는 등 사치스럽게 묘사한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이미지화할 때. 중국도 마찬가지. 15세기부터 인도개척 한다고 나가는 대항해시대. 이들이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아메리카. 최초의 서양인들이 정신을 차려서 원주민들이 깨우면 금광이 어딨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원주민들에게 금은 중요한 게 아니고 화폐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양인은 오는 족족 금이 어딨냐고 물어봤다.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그걸 참지 못하고 몸이 회복하기도 전에 금이 있는 곳으로 가서 누가 가져갈세라 금을 캤다. 이들은 왜 죽어가는 와중에도 금을 찾지?
서양 문화가 현란하게 그리는 동양. 서양이 보는 동양이라든가 오리엔트라는 이미지 자체가 화려하고 찬란한 이미지. 그럼 유럽이 빈곤한 애들이었나? 지금은 우리가 유럽을 부이자 문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리스 가면 풍요롭지 않다. 중국은 중국이라는 나라 안에 어마어마한 지세가 다 있다. 항주랑 호수 가면 그냥 산수화. 북방 쪽의 험준한 산. 중국에는 먹을 거나 지형적인 것 모두 다 풍부하다. 서양은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생각이 없었다.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 우리는 세상의 가운데다. 내가 세상이라는 뜻. 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바다로 둘러싸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양은 왜? 너무 가난했기 떄문에.
대항해시대에 대한 연구를 보면 서양은 너무 물자가 없었다고 한다. 물자도 풍부하지 않지. 북쪽에서 온 애들이 배를 만들어서 조선 기술이 발달했다. 싸움꾼들이 내려와서 온통 침략당한 역사. 그들은 자기 땅에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다. 이게 다른 문명을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위스 몽블랑을 얘기하는데 정복할만한 산이고 아름다운 산이고 이런지 모르지만 산이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산이 아니다. 왜 동양에서는 산에 가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하는가? 산에 음양오행이 다 있기 때문에. 산은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 산에 살면 일단 아픈 건 낫는다. 왜냐하면 동양의 산은 많은 것을 품고 있으니까. 그런데 서양의 산에 가면 품는 산이 아니라는 것을 상식이 없어도 딱 알 수 있다. 항상 공간에 가면 그 지형을 봐야 한다.
페르시아쪽은 금이 많다. 자원이 많다. 이 땅이 사막 같아 보이고 그래도 천혜의 자원들이 많은 장소. 서양인들이 보기에 이들은 너무 화려한데다가 더군다나 그리스인도 옷이 별로 없다. 천을 두르는 것에 불과. 그런데 이들은 옷도 종류가 많고 화려하다. 서양인들이 19세기 보고 놀란 게 저런 문양이 없었던 것. 기껏해야 바로크 시대의 금박, 꽃문양 정도. 서양의 화려함은 서당의 조각 정도가 전부. 일상 복식은 화려하지 않다. 우리가 너무 서양 중심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까 그들이 문명의 중심인줄 알지만 전혀. 태국이나 미얀마만 보더라도 금빛으로 빛난다. 미얀마의 사원은 금으로 칠해져 있다. 우리가 이미 서양 중심이 되어서 그런데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리엔트는 자기네들이 갖고 있지 않은 대단한 화려함을 가진 곳. 그런 시각을 가지고 묘사된 것을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곳. 먹을 것도 많고 미인도 많고 건축도 훌륭하다. 이란은 정원의 나라. 화려하게 정원을 잘 가꾸고 페르시아 제국의 사치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 그 사치라는 걸 어떻게 볼까 했을 떄 이들에게 사치가 도덕적인 비난을 들어야 할 건 아니었다. 어떤 인간의 앞뒤 안 가리는 기질 정도. 쟤는 사치해서 망하는 게 당연하다는 그런 태도가 없다. 이거는 돈에 대해 다른 인식이다. 자본주의는 일단 돈이라는 게 들어오면 여기서 모여야 한다. 자본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capital이라는 것. 그건 모든 것이 그것에 힘입어서 나오는 근본이라는 뜻. 어떤 게 나오기 위한 기본적인 베이스. 들뢰즈 왈, 모든 것이 나오는 원천처럼 보이는 마법. '마법의 기계' 마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제로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이 있어야 뭔가를 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자본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기적을 행하는 기계.
돈이라는 게 순환하는 건 똑같을지 모르지만 서유럽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축적에 대한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천일야화는 기본적으로 돈이 있으면 쓴다는 생각이 있다. 실제로 농부들은 돈 잘 안 쓴다. 진짜 농촌공동체는 흥청망청 하는 것을 제일 비난한다. 그런데 장사치들은 돈을 잘 쓴다. 그리고 어부가 돈을 잘 쓴다. 강원도에서 강릉사람들은 농사를 중심으로 하고 삼척이나 동해쪽은 어업을 중시한다. 강릉 사람들은 어부를 지금도 있으면 있는대로 쓴다고 비난한다. 어부의 특징. 돈을 그냥 쓴다. 한번 배타고 와서 번 걸로 다 쓴다. 어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는 그런 게 많이 나온다.
상인의 항해. 자원을 뺏으러 가는 탐사가 아니라 물건과 사람을 파는 마인드. 이들은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문화가 이어졌다.
두 번째 이야기. 용궁 이야기. 놀라운 발상. 바다가 고향인 사람들이 나온다. 그 고향이란 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다 속에서 모든 걸 다 한다고 묘사가 나온다. 어부들을 그렇게 묘사한 모양. 아마도 터키 쪽. 육지의 왕과 바다의 왕. 아예 바닷속에 집이 있는 것처럼 하는 묘사. 이런 것이 흥미롭다. 우리는 기껏해야 인어공주. 그런데 물고기라 왕자를 만나려면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 비극적 조건.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만난다.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가 너무나 없다. 이런 게 우리의 해석 욕구를 자극한다. 너무 다른 세계 치고는 결합이 너무 쉽다.
그런데 인어공주가 육지의 왕자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역경이 있고 다른 세계가 결합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런데 여기서는 희한하게 왔다갔다 하는 교류가 이루어진다. 인어공주의 세계가 더 합리적으로 보일 지경. 아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의례와 비극성. 그런데 천일야화에서는 기본적으로 비극성이 없다. 불행한데 비극적이지 않은 사람들. 어떻게든 되겠지.
서양 비극을 읽으면 어떻게 파국을 맞을 것인가를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천일야화를 읽을 때면 파국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마법이라는 것도 재밌다. 저주 비슷한 것을 마법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쉽게 풀린다. 마법이 안 풀리는 극강의 저주도 아니다. 쉽게 알아보고 쉽게 풀린다. 마법이 흥미로운 건 그게 영원한 저주가 아니기 때문에. 마법에 걸려도 비극적이지 않은 사람들. 이 세계는 도대체 무슨 세계인가. 천일야화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성, 경제관념이 중요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복수도 별로 없다. 사랑도 백프로 몸매와 얼굴. 소리로도 사랑에 빠진다. 또 대단한 비극이라고 해서 그렇게 이상하게 일을 만들지도 않는다. 비밀도 없고, 몇 페이지만 지나면 모든 걸 다 알게 된다.
어떤 것을 준다는 것에 대해 내가 즐겼다고 하면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많다고 할 때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그걸 서양인들은 사치와 낭비라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오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페르시아 입장에서 보면 문화가 그런 것일 뿐. 어딘가에 정착해서 농경사회에서 어떻게든 모든 것을 해소해야 했던 문화 속의 애들. 이들 사이에서는 민주정치가 발달했다. 헤시오도스가 서사시를 쓸 때 자기 형이 자기한테 줄 유산까지 독차지했다고 나온다. 그럴 때 그걸 불공정하다고 본다. 제우스의 정의라는 건 우리가 받고 있는 게 제우스가 준 것. 그런데 헤시오도스로 가면 제우스의 정의가 분배의 정의라고 나온다. 그 정의가 자리를 잡아야 소송이 생긴다. 분배의 정의라는 관념이 있어야 거기에 어긋난 것이 있는지 따지게 된다. 5,6세기의 그리스는 소송의 세기. 그리고 그 소송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변론한다. 이게 민주주의.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자기가 변론할 수 있는 능력. 그리스인들은 이러고 살았다. 농경사회에서 정착해 살아가면서 얼마 안되는 자원으로 아둥바둥 싸우며 따진다. 그런데 천일야화에는 분배의 정의 비슷한 것도 안 나온다. 얼마나 똑같이 줘야 하는가를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 그저 즐기고 사는데 즐기지 못하는 게 불행한 것.

불행
무엇이 불행인가? 우리의 불행은 내 건데 뺏기는 것. 그런데 이들에게 불행은 즐길 수 없는 것.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은데 그와 함께일 수 없을 때 불행을 느낀다.
누레딘과 페르시아 미녀. 마치 큰일이 날 것처럼 구는데 전혀 큰 일이 아니게 된다. 여기의 왕들도 이상하다. 왕들도 영토를 빼앗고 내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싸우지 않는다.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재상과 왕 자리를 맡긴다. 상인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건 신뢰.
농경사회는 물론 신뢰라는 덕목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산을 함께 지킬 수 있는 공동체. 그러니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발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국가나 공동체 관념이 희박하다. 공동체를 지킨다는 건 재산을 지킨다는 것.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오이코스)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건 공동체와 직결된다. 오이코스와 공동체가 직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 그 공동체의 정치를 지키는 것이어야 가정의 관리 영역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서는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공동체 관념이 없다. 그 주변인들이 나와서 즐기고 예쁜 여자를 얻고 죽기도 하고 사건을 겪기도 한다. 불행하다는 것은 좋은 음식과 예쁜 여자를 즐길 수 없는 것. 심플한 세계. 줘버리면 미련이 없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가면 미련이 없다. 감정의 찌꺼기가 없는 사랑. 차라리 죽이면 죽이는 거지 끈끈한 게 없는 세계.
돈과 이 세계의 인간관계에서 보여주는 쿨함. 집착을 하지 않는다. 아마 굳이 영향을 따지면 풍토적인 게 있을 것.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이란에 가면 가장 특징적인 것이 여자애들에게 그렇게 찝적댄다고 한다. 여자애들이 지나가면 그렇게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한다. 귀찮을 정도로. 그들의 부호도 돈을 쓰는 태도가 다르다.
계승에 대한 감각도 가볍다. 혈연으로 맺어진 견고하고 끈끈한 서유럽의 관계성과도 다르다. 이들은 마인드가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구단주라고 해도 인색하다. 그런데 맨시티의 구단주 만수르가 하는 걸 보면 장난 아니다. 돈이 많다고 저럴 수 있는 건가? 얼마나 많으면? 이라고 묻기보단 저렇게 쓸 수 있는 건 문화적인 거라고 봐야. 이들의 삶의 목표는 누리는 것이 아닐까?
계산이 없는 세계. 주고 나면 끝. 돈이라는 건 가는 사람에게 끝인 것. 오면 나에게 오는 것이지 교환관계를 통해 세계가 시스템화 되어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아주 이상한 세계를 천일야화를 통해 보게 된다.
상인의 문화? 상인이라는 존재를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인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둘 것. 지금도 여자에게 찝적거릴 뿐만 아니라 너무나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끌어들인다. 중동의 문제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미국과 서유럽의 패권 다툼에서 시작된 거지 그 안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문화가 사람들에 대해 별로 경계가 없는 문화다. 장사 하는 사람들과 연결해보면 경계가 있으면 안되는 사람들. 농경사회는 일단 경계의 눈초리.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
어떻게 보면 환대의 윤리가 중시된 것은 오랫동안 농경사회 중심으로 살면서 배척하는 배제의 문화가 있었기 떄문에 그러면 안된다는 환대의 논리가 일종의 윤리로 자리잡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무 스스럼 없는 문화가 있다. 환대도 윤리로서 정착되는 것과 아예 윤리라고 할 게 없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마법
마법이라는 것. 변신과 다른 문제. 그리스 신화에서는 존재의 변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법. 나카자와 신이치가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법 얘기를 잠깐 한다. 마법사가 나오는 문화. 우리가 현상적으로 실존한다고 규정하는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는 이런 시간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공간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그 균질한 시공간 속에서 너와 나로 구분된다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전제를 깨면 시간과 공간 자체가 지금처럼 균일한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차원에 있는 것은 다를 것이다. 마법이라고 하는 소재. 마법사의 등장. 신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다른 시공간에 대한 생각의 반영 아닐까.
자기가 살지 못했지만 동물들의 세계, 초자연적인 힘들에 대한 세계는 분명 다른 시공간이 있을 것이다. 다른 시공간이 여기에 중첩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남미의 주술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같은 경우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 전혀 다른 시간이 작동하면서 갑자기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
외계인은 다른 행성에서 와서 외계인이 아니라 시공간이 비틀어지기 때문에 외계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 시공간만 있을 리가 없다. 이 시공간이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차원이 있다. 마법이라는 건 그런 차원의 시공간적 변형. 그렇게 상상할 수 있으면 마법은 그런 상상의 결과물이 아닐까? 하나로 변하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이 되었다가 등등.
마법사라는 존재는 다른 기운을 감지하는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근대의 스토리가 갖지 못하는 고대의 스토리 속에 담겨져 있는 상상. 그걸 통해서 이야기가 현실 공간을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빈약한 상상력은 천국. 현실 공간의 좋은 것을 갖다 놓은 게 천국. 다른 시공간성이 작동하며 다른 존재끼리 소통하는 게 아닌 곳. 인간이 상상한 것 중 가장 빈약한 상상력. 가장 풍요로운 상상력이 마법사의 존재. 신화의 세계. 천일야화는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모티프가 등장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리얼리즘 영화일까? 어떻게 보면 극 리얼리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생각해보자. 마지막의 꽃은 뭘까? 마법. 생애 마법같은 순간. 그 애가 정말 숙제를 하고 꽃을 꽂아 놓았을까? 맨 마지막의 꽃. 거기서 키아로스타미가 그냥 리얼리즘을 다 넘어간다. 그 전날 밤에 헤매던 길과 만난 할아버지들의 웅얼거림이 그게 꿈이어도 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최근 영화까지 보면 이상한 말은 아니다.
마법은 현실이 아닌 게 아니다.
마법사라는 악. 그의 악이라는 것도 웃긴 일. 귀여운 마법.
서양의 마녀는 배제되어 있는데(숲) 천일야화의 마법은 집이나 동네나 왕궁에 있다.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마법. 인디언 주술사도 경계에 있는다. 그런데 여기는 마법사가 흔하고 마법도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다.
일리아스
로마는 그리스문화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로마는 자기 토착문화랄 게 없었다. 그리스 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서 토착화 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는 터키와 면해 있다.
서사시의 기본.
루카치. 철학은 외부와 내부가 갈라질 떄 생겨난다. 별을 보고 인간이 간다는 건 내부에 내가 살아갈 길이 다 있다고 생각할 때. 그떄는 모험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처럼 내면이 뚱뚱한 사람들은 자연이 보내오는 신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철학은 외부와 내부가 균열되고 나서 등장한다.
서사시의 시대는 별을 보고 걷던 시대. 내면이 없고 타자가 없는 시대가. 심연이 부재하는 세계다.
호메로스를 읽다보면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에 그 세계를 단죄하는 또 다른 초월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플라톤으로 가면 기준이 필요한 시대가 오게 된다.
바흐친. 소설을 보는 관점은 민중성. 그런데 그 민중성은 서사시에서부터 찾는다. 1. 절대적 과거를 주제로 한다. 이때 절대적 과거란 우리가 감정을 섞을 만한 과거가 아니다. 그냥 언젠가 있었던 사건. 우리의 기억에 의해 변형이 불가능한 사건. 2. 민족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이 땅에서 살아오며 구성한 멘탈리티. 3. 음유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과 절대적으로 분리된 세계.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낭송자나 저자의 멘트가 일절 없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에.
에리이 아우얼바흐. <미메시스>. 서사시와 구약을 비교. 서사시는 긴장감, 서스펜스를 부여하지 않는다. 과거는 회상씬이 아니다. 현재와 나란히 서술된다. 신 역시 인간과 같은 평면 위에 있다. 구약은 끊임없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세계다. 구약의 세계에서는 얘기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현상만 강조되고 그 사이는 중요한 게 없다. 그리고 시공간은 구체화 되어 있지 않다. 생각과 감정은 대화에 의해 암시되어 있을 뿐. 그래서 구약은 서스펜스로 가득차 있다. 서사시는 긴장감으로 넘치지 않다. 심지어 결말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서사시의 세계에는 절대적 현재만 있는 것이다.
천일야화는 의외로 교훈이 없다. 서사시도 교훈이 없다. 그렇기에 인물들도 발전하지 않는다. 성장드라마는 근대의 것. 성장소설이라는 건 고대에 나올 수 없다. 인물들은 태어날 때 자기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운명 안에는 성격도 함께 있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끝까지 분노한다. 인물들은 절대 변화를 겪거나 성장하가거나 하지 않는다. 오뒷세우스나 아킬레우스는 끝까지 오뒷세우스나 아킬레우스다. 천일야화도 서사시에 가깝다. 그들은 그 많은 일을 겪어도 겸허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인물 앞의 형용사구는 변하지 않는다. "꾀 많은 오뒷세우스"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 "흰 팔의 헬레나"
구약의 인물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겪는다. 그러면서 개성을 드디어 갖추게 된다. 성서는 감각을 매혹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종교적 도덕적 심리적으로 변화를 겪는가. 우리가 교훈을 새기면서 저렇게 살면 안된다 등등 역사의 진실성을 요구한다.

헬라스 역사
1600년에서 1200년대 미케네 문명 형성. 그 당시 문명은 크게 세 개. 1. 크레타.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크레타 섬. 이 섬에서 산토리니를 간다. 여기가 그리스와 달리 독자적인 어마어마한 문명이 있었다. 그리스에 없는 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터키나 이란 쪽. 크노소스 궁전이 어마어마한 유적이 있다. 궁전이 미로였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 2.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미케네 문명. 3. 트로이. 터키 쪽.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제설분분.
트로이 전쟁. 기원전 12세기경의 일. 1100년, 도리아인 침략으로 미케네 문명 파괴. 그리고 암흑시대가 계속된다.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무렵 이 지역을 헬라스라고 한다. 서양은 이때가 철기시대. 농기구 만들었으니 생산력 급증, 무기 만들어서 학살 대량화.
9~8세기. 서사시의 시대.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트로이 전쟁 이후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기억을 노래처럼 만들었고 그 면면이 살아남은 노래들이 정리되어 그걸 노래부르는 뛰어난 시인 호메로스. 이때부터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전통이 기억이 되고 도시국가가 형성된다. 그럼녀서 점점 아테네 중심으로 헬라스 지역이 지중해 일대의 강자로 등극한다. 그때 정치는 참주정치. 그러다가 7세기부터 탈레스, 솔론 등장.
솔론. 그리스의 주공. 336~323년. 알레산드로스의 그리스 정복.
323년부터 헬레니즘 시기.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이후.
220년부터 로마가 부상. 알렉산드로스의 영토를 로마가 흡수.

트로이 전쟁 발단
1. 신과 인간(테티스와 펠리우스)의 결혼. 하지만 인간은 늙을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여 있다.
2. 펠리온 산에서의 결혼식. 신과 인간이 한데 모인 곳. 그런데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한다. 황금사과. 결혼은 분명 사랑과 축복이 넘치는 것. 하지만 그 안에는 전쟁과 불화가 도사리고 있다.
3.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파리스가 트로이에서 오다. 그래서 환대의 윤리에 따라 헬레네에게 파리스의 환대를 대신 부탁한다. 그동안 눈이 맞아 도망간다.
일리아스를 읽고 오뒷세이아를 읽는데 여기 나오는 누구도 헬레네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름다우니까 그럴 수 있다. 헬레네는 아름다운 거니까. 아름다움이 헬레네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

아킬레우스를 움직이는 힘
그는 결정적으로 감정에 약하다.
아킬레우스는 상수라기 보다는 변수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끌고 간다. 일리아스 18권쯤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삐져 있었기 떄문. 그러다보니 전쟁이 더 오래간다고 하는 것도. 일리아스에는 네 가지 축이 있다. 브리세이스, 아가멤논, 파트로클로스, 헥토르. 아킬레우스는 축이 아니다. 아킬레우스는 네 개의 축을 날뛰고 있는 감정이다.
아킬레우스의 기념비: 왜 싸우는가? 역설적이게도 평화를 위해.
시몬 베이유. 맑시스트. 레지스탕스 철학자.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혁명가. 일리아스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을 쓰라림. 그것은 정당화 할 수 있는 유일한 쓰라림이다. 누구도 덕성이 훌륭하다고 운명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우리가 열심히 산다고 복을 받는 건 아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운명에 압도당한다는 이유로 경멸의 눈초리를 받지 않는다. 다만 힘의 지배를 받되 거기에 예속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받는다. 그리스도는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통을 떠안은 자.

서사시의 시대에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없다. 나라고 하는 전체를 구성하는 유기체의 일부인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째려볼때의 본다, 존경스럽게 본다 할 때 눈은 다른 눈이다. 그리고 내가 보는 게 아니라 눈이 보는 것이다. 내가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 팔이 때리는 것이다. 유기체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몸과 팔과 다리를 따로 그린다. 주체 개념이 없다.
정신도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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