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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이븐 할둔 강의1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2-01 10:02
조회
90

문명과 본성을 말할 때 동양/서양을 퉁쳐서는 안된다. 만약 가르치고 유지하는 본성이라고 할 때 그것을 가르치고 보존하는 본성으로서의 문명을 얘기해야 한다.

인간이란 어떻게 자기가 놓인 환경 속에서 다른 방식의 기질을 발휘하는가. 환경 결정론은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물적 토대가 아주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한다. 동양에서 문명과 본성을 말할 때는 장자/유가 등을 말해야 할 것. 동/서양을 비교할 때 디테일하게 말할 것. 그리고 문명과 본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도 시대 차이가 있다. 동양은 고대, 그리고 이븐 할둔은 15세기. 항상 비교를 할 때면 층위들이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동양 14세기의 텍스트와 이븐 할둔을 비교해볼 것.

14세기라면 어마어마하게 교역이 발달한 곳. 마그리브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이집트, 튀니지 등이 마그레브 지역. 그 지역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그쪽 출산 철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스 철학은 자생적으로 그 출신이 거기에서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정도다. 그리고 그들도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에게 배웠고 자연철학자들은 이오니아 이주민들. 외부자들. 그게 없었으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도 없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후에 사상적 다양성은 아프리카 쪽에서 많이 왔다. 서양 사상의 원류라는 것 자체가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양의 중심사상 이런 건 사실 말도 안되는 것. 모든 것은 합쳐진다. 아프리카 출신의 철학자들이 많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기독교 철학의 효시. 백인이 아니라 흑인. 그리고 예수 자체도 백인이 아니다. 서양과 완전히 다른 사람들. 그리스도 백인과 다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인은 북쪽에서 내려온 야만족의 후예.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은 사이드에서 묠려든다. 그래서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많이 있다.

14세기면 교역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했다. 천일야화가 정리된 건 18세기정도인데 그 이야기들은 어디서 왔을까. 칼리프 이런 게 나오기도 하지만 신드밧드의 모험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대 무역시대, 대항해시대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유럽이 워낙 척박하니 배 만들어서 지구 반대편을 돌기도 하면서 발전했다. 이슬람문명과 원나라로 가서 해상무역을 많이 했다. 중국 해안가 아래쪽에서(복권성, 천주성) 이슬람 상인들이 상업이 성행했다. 게다가 색목인들이 그렇게 많이 왔다고 한다. 불야성, 몇 층 짜리 건물. 너무너무 화려해서 밤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묘사가 있다. 밤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늘 낮이라고 할 정도로 불을 밝히고 화려한 문화를 만들었다.

천주성에 있는 이슬람인들과도 많이 섞인 중국인들. 그래서 이백이 색목인이라는 설도 있다. 이백의 존재도 혼혈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에 이탁오도 몇대 거슬러 올라가면 이슬람 혼혈.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혼혈인 그쪽 지방 사람들. 대가 거듭해서 지워져서 그렇지 14세기가 그정도로 어마어마한 대항해가 시작된 시기이고 무역이 시작된 시기. 우리도 지금 어디론가 팔러 간다고 한다면 공간적 제약이 있다. 그런데 얘네는 이슬람에서 중국 아래 천주성, 대만이 마주보이는 곳까지 갔다. 어마어마한 이동거리.

우리는 지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지만, 청나라에서 나온 책도 조선으로 일주일만에 들어왔다. 1920년대 일본 지식인들은 바로바로 서양에서 나온 사상들을 읽었다. 1910년대 바로 니체 읽은 이야기가 나온다. 루쉰도 일본에서 니체를 읽었다. 루쉰은 일본에 1908년에 유학을 갔는데 그때 번역이 되어 있었고, 또 독어본도 일본에 있었다는 것. 니체는 1900년에 죽었는데. 너무 빨리 왔다.

우리는 굉장히 속도가 빨라졌다고 착각을 하는데 그 속도와 거기 있는 에너지와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옛날과 속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속도를 단축시키기위해 드는 에너지 등을 고려하면 똑같다. 우리가 빠르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이븐 할둔 시대가 굉장히 빨랐다. 세계에 대한 시야가 달라졌다. 또 십자군 원정을 하면서 시야가 달라졌다. 그것과 비교도 안되게 무역을 통해 접속했다. 그러니까 신드밧드 모험에 나오는 기이한 것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무역을 하면서 어디까지 왔다갔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삼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겠다고 갔는데 그 고비사막을 건널 때 중간중간에 뼈가 있었다. 그 뼈가 있는 걸 보면서 돌아가지 않는 건 뭘까. 끝까지 목숨을 걸고 간다. 그래서 구법 여행이라고 한다. 그것과 견줄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상인들의 여행. 상인은 물자를 바꾸기 위해서, 희귀품목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페르시아의 중요한 것은 유리. 원나라 유물을 보면 도자기가 아니라 유리가 있다. 금 이런 것도 다 수입. 사치품목이 수입된다. 생필품은 수입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사치품이 또 거기로 간다. 인간은 생필품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지 않는다. 불경을 구하려고 목숨을 건다. 그런데 생필품을 구하려고 신드밧드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천일야화에서 희귀한 물건 내기를 하는 이유. 사람들은 늘 일상에서 구하는 것들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들이 못 본 것, 희귀템들. 인간을 이런 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은 대충 갖춰놓고 살면 된다? 우리의 잘못된 전제. 인간은 그러면 지루해서 죽어버릴 것. 늘 희귀한 것, 일상 얘기가 아니라 불경. 기꺼이 예술과 철학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일상적인 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 아테네로 갔을까? 철학을 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니다.

근대의 표상은 먹고 살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의 시대가 먹고 살이 위한다고 하는 유일한 시대. 그것도 잘 들여다보면 먹고 살기 위해 뭔가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것. 인간은 한번도 그런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다.

역사서설은 바로 그 엄청난 교역이 이루어졌던 14세기에 쓴 것.

역사서설의 목차는 새로운 목차. 인류의 일반적인 차원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서론은 역사학 자체에 대한 성찰. 1부가 가장 큰 일반론. 2장까지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보편과 아주 디테일한 부분부분에 대한 고찰. 이런 고찰이 드러난 역사책은 드물다. 이 사람은 최초의 구조주의적 시각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를 바라볼 때 아주 단선적으로 인과를 만들지 않으며, 얼마나 복잡한 요인들이 구조화되어서 인간의 행위양식을 만드는가. 인간의 행위양식과 사고패턴을 보는 것.

이븐 할둔이 구성하는 역사 자체가 그렇게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과 속에서 인간의 생활방식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드러나는가? 그런 것을 보여주는 참신한 역사책. 20세기에는 그런 게 많다. 아날학파. 브로델. 시간층을 다르게 보는 역사적 시각. 시간적인 구조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지리적 조건. 정치적 격변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 삶의 변화라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이란 정치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기 보단 지리적 요소들이 얼마나 다르게 구성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 시공간적으로 아주 다층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게 20세기 아날학파 역사. 그 비슷한 서술을 이븐 할둔이 하고 있다.

천 개의 고원에 이븐 할둔의 여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역사 속에서 작동한다.

1장, 2장, 3장은 정치. 4장은 도시의 삶. 5장은 경제적 기술. 6장은 문화사적 이야기. 여기서 재밌는 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삶에 대한 이해라는 게 많다. 마술, 주술, 점성술 등.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하나의 층위에서 인과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 경제, 문화, 시간의 문제, 장소의 문제가 다층적으로 교차하는 입체적인 역사를 보여준다. 이런 서양에서 아주 이후에 드러나는 것.

역사를 바라볼 때 한 인간의 삶을, 어떤 시공간의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다양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복합적인 요인들로 작동하는가를 서술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슬람 역사 책 중에서 독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븐 할둔의 서술과 관련된 배경. 이게 재밌었고 이븐 할둔의 역사를 읽고 역사에 대한 주제를 써 보겠다고 한다면 헤로도토스라든가 한번 비교를 해볼 것.


이븐 할둔이 살았던 시기는 이슬람 문명의 찬란한 중세가 지나갔다. 이슬람 문명의 찬란한 중세는 언제인가? 12, 13세기? 서유럽 중세의 끝무렵. 13세기를 호이징가가 중세의 가을이라도 말한다. 이슬람도 12, 13세기? 사파비 왕조. 대략 그때가 정점이었던 것. 그러고 나서 이븐 할둔이 보기에 이슬람 세력이 정체되고 마비되어 간다고 보았던 것.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가 위기라고 진단했던 시대를 구조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서술하는 지평에 있다 보니 이미 말이 안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도 있고 이 사람의 편파성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역사가든 그 사람의 한계 속에서 저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서술을 하는지 봐야 한다는 것.

투퀴디데스의 역사를 주로 역사의 출현으로 봐 준다. 이븐 할둔과 투퀴디데스를 비교하면서 서양에서 최초의 역사인식 그게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비교하며 이븐 할둔을 비교하며 볼만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븐 할둔 역사의 새로움도 볼 수 있다. 투퀴디데스가 역사의 진실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런 사람이 이슬람에는 이븐 할둔이 있다.


역사적 유물론. 이것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맑스로 말했다. 어떤 인간은 그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사회적 조건을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적 지평이 언제나 있다. 맑스, 니체, 프로이트, 이 19세기 위대한 사상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공통적으로 깊이다. 역사, 기원, 무의식. 표면에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표면들이 어떤 심층의 작용에 의해 드러났는지 문제삼은 사람들. 결론은 다르다. 맑스는 역사를 심층으로 삼았다. 인간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규정되는가. 역사의 방향과 흐름에서 인간. 니체는 심층을 탐사해 봤더니 그 기원의 순수하지 않음을 발견. 프로이트는 우리 의식은 무의식의 변형된 일부라고 생각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심층의 문제와 맞서 싸웠다는 것이 19세기.

프롤레트리아트는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어떤 일하는 자를 노동 계급으로 출현시키는 역사적 조건의 산물. 어떻게 물건이 상품이 되는가. 물건은 그냥 물건이다. 물건이 상품이 되려면 화폐의 역사를 봐야 한다. 어떻게 그 물건과 교환하는 화폐가 단일한 척도로 출현하게 되는가. 화폐야말로 모든 가치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가 양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옛날 물물교환 하는 시대에는 거리가 있었다. 각각 물건이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가 소거되지 않았다. 그런데 화폐는 교환가치. A라는 물건과 B라는 물건이 화폐라는 척도에서 봤을 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따라 그 물건의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물건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화폐의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 대용은 자본주의의 화폐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화폐는 가치의 단일화. 모든 가치의 블랙홀. 노동자는 그를 노동자로 만들어주는 물적 토대의 출현. 그러므로 맑스에게 모든 가치는 역사적. 어떤 것도 역사적 조건과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왜 유물론인가? 유물론은 어떤 것이 어떤 대상으로 출현하는 것을 고찰한다고 해서 역사적 유물론.

<안티 오이디푸스>, 지금 우리 시대 인간들의 정서, 욕망을 무의식으로 퉁치지 않고 어떻게 역사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으로 형성되는지를 보는 것. 20세기의 역사 유물론.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축은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 그러니까 사회 구성체를 분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표상작용이 일어나고 욕망이 흐르고 차단되고 접속하는가를 분석하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고 모든 사물은 유물론적이다.

모든 역사책은 그것이 인간의 활동을, 세계를, 자연을, 앎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는가를 봐야 한다. 팩트 체크는 의미가 없다. 헤로도토스도 그 보고 들은 걸 기록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어떤 층위에서 보는가를 고찰해야 하는 것. 역사는 비전, 통찰인 것. 그 전체적 관점을 놓치고 부분에만 집착하면 남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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