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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이븐 할둔 강의 2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2-01 10:03
조회
107
지금 우리가 읽은 책은 50년대 축약본. 그리고나서 2012년에 완역본 <무깟디마> 번역. 축약본에도 중요한 내용은 다 있다. 하지만 예가 많이 생략되어 있다. 예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이 없거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치판을 많이 읽으니까.
이븐 할둔은 독특하긴 하다. 하지만 무엇인가? 우리가 읽은 역사책도 별로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이것 때문에 철학이 필요하다. 담론화가 안되니까. 항상 어떤 철학을 배우면 그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으로 사고하면서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니체를 인용하라는 게 아니라 니체적 방식으로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텍스트를 만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꿰맞추게 된다.
무깟디마에 대한 논문 자체가 많지 않다. 학위논문도 스무 편 남짓. 이슬람 사회는 하나의 평등한 공동체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 이전까지의유목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집단의식은 설명이 안된다. 아사비야는 '연대의식'으로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연대의식이라는 번역이 틀린 건 아니지만 거기에 고착되어 버린다. 아사비야를 가지고 있던 견고한, 국가로 환원되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집단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자들이 이걸 바탕으로 해서 왕권이 성립된다. 그래서 그 둘 사이를 진화론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고 자체가 작은 것에서 점점 큰 국가로 본다고 생각하니까. 자연진화론적 생각. 상식으로 환원하는 것. 그런데 푸코는 역사에서 단절을 말한다. 그리고 그 단절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자연스럽게 A에서 복잡한 B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대상 자체가 단절을 거쳐서 출현하는 것. 푸코가 역사를 보는 방식은 역사의 불연속성.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 구도가 지금 우리 시대의 바깥, 우리와 다른 에피스테메를 가진 시공간 속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험되고 느껴졌다.
그런데 전제를 버리기 어려우니 역사를 진보적으로 보게 된다. 물론 역사서설을 보면 진보사관이 아니라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국가의 발생이 자연적인 진화라고 보게 된다. 아사비야가 집단의식이었는데 나중에는 국가적 애국심으로 통합 확장된다고 해석되게 된다. 그렇게밖에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
이분할둔의 아사비야와 국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양가성이 있다. 니체에게 배운다면 니체는 어떤 단어도,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도 동일하게 같은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선악은 하나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니체는 누구의 선악인가를 항상 문제삼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선악을 말하는데 선은 좋은 것 악은 나쁜 것이라고 보면 실패한다. 아사비야 역시 마찬가지. 집단이 가진 혈연적 유대의식으로만 읽으면 실패. 그걸 해석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철학. 담론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지금의 관점에서 구성해 낼것인가. 이것이 담론. 그 개념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내지 못하면 안된다. 안그러면 누구도 거기에 접근할 수 없거나 권위적인 사람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왕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 전야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고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무깟디마>는 이븐 할둔 생전 당시 필사본 번역. 필사본 4개는 모두 터키에 있다. 알아볼 것. 즉 판본 자체도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나중에 조금씩 수정하기도 했다. 책 자체가 그런 식으로 변이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책 속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변이적 측면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어떤 언어도 다양한 뉘앙스의 차원에서 본다는 것, 우리는 역사를 뭐라고 생각하지? 우리 자신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푸코적으로 생각하는 것. 정주, 왕권, 국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서 이븐 할둔에 접근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의 전제를 밀어둬야 책을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던 생각하고 대충 때려맞춰서는 안된다.
철학을 하나 배울 때마다 그 철학자의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어야 우리 자신의 관심을 이동시킬 수 있다.

이븐 할둔은 투퀴디데스, 마키아벨리, 사마천과 비견된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 투퀴디데스는 역사를 인간 본성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일단 우리는 역사를 근대의 주류 역사 마인드 속에 갇혀 있다. 그런 것에 갇혀있다보니 자꾸만 역사를 정치적인 변동으로 환원하려 한다. 그리고 그 정치적 변동을 가능하게 한 굵직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류 역사는 정치사. 조선시대 연구는 왕조의 정치적 변동을 주로 연구한다. 풍속사, 사상사는 아주 일천하다. 역사 하면 정치적 사건. 즉 주권정치의 변동. 나머지 것들은 미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
마키아벨리, <로마사논고>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 그리고 <군주론> 등에 드러난 역사적 마인드. 그리고 사마천. 이들은 역사를 단순히 정치적 변동이라고 환원하지 않는다. 이들 역사의 공통점은 이 사람들이 언제나 권력의 중심부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
지금이야 역사는 학술이 되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계속 한무제 옆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왕권의 한복판에서 부침을 자기가 직접 경험한 사람. 투퀴디데스, 직접 참전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유배 가서 떠돌면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쓴 것. 이 사람도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공직자. 그리고 마키아벨리 역시 메디치 가문의 공직자. 이븐 할둔 23년동안 교체된 왕만 일곱명. 공직자 생활을 했던 20여년간 그렇게 왕이 일곱번 바뀌는 것. 즉 삼년만에 한번씩. 그리고 자기가 공직생활을 나아가고 물러나고 이런 것을 반복한 게 일곱번. 이 사람은 정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쓰는 역사에 공통점이 있고 또 차이도 있다. 이들은 역사를 어떤 왕조가 어떤 사건으로 일어났고 망했고 이런 표면을 훑지 않는다. 그 공직 생활의 핵심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이 보였을까? 모든 권력이 무너지는 건 인간의 탐욕, 분노 등. 그런 역사의 표면적인 것들을 추동하는 인간의 힘을 본 것. 투퀴디데스는 그걸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 것. 니체는 투퀴디데스와 마키아벨리를 역사를 힘의 차원으로 본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좋은 것,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투쟁적이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그 투쟁 속에서 일어나고 또다른 투쟁 속에서 몰락한다. 그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유.
마키아벨리 역시. <로마사>에서 중요한 것을 본다. 인간에게는 선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늘 갈등, 그리고 갈등에 내포된 힘의지에 있다. 갈등이란 더 큰 동일성을 향해 가지 않고 그 자체가 다양한 힘들의 공존을 향해 갈 수 있다. 갈등 자체가 좋고 나쁨이 없다. 이런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대립/갈등이 좋다/나쁘다고 보는 게 아니다. 그 대립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힘의지가 무엇인가. 이걸 봐야 한다.
<사기>를 보면 역사에 선/악이란 없다. 역사란 끊임없는 인간의 암투와 욕망,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끊임없이 다투는 투쟁의 장. 역사란 생과 사. 뭐가 일어나고 뭐가 망하고 이런 과정일 뿐이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망하는 것도 악하기 떄문이 아니다. 사기의 세계에는 선악이 없다.
역사적 지평을 갖게 되면 인간의 선악이라는 것이 너무 우스워진다. 왜 니체가 역사적 지평을 중시했을까? 니체는 아무튼 출발을 그리스와 로마 문헌학. 니체에게 굉장히 중요한 지점. 역사적 지평을 가질 때만 이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에. 고대를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선악,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븐 할둔 역시.
개념이 가지고 있는 모호한 양가성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 그리고 이븐 할둔이 근대 이전의 뛰어난 역사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으로 소용돌이치는 사건,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상이한 힘들의 투쟁을 보았다는 것.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사회적 조건, 경제적 조건 차원의 유물론이 아니다. 들/가 <안티 오이디푸스>는 일종의 역사 유물론적 텍스트. 인간의 무의식을 역사 유물론적으로 파악한 책.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도 마찬가지. 인간의 역사적 사건은 결과일 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밑바닥의 다양한 힘들. 그 힘은 인간의 힘도 중요하지만 지리도 중요하다. 이븐 할둔은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 유목민은 단순히 그렇게 형성된 게 아니다. 아사비야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물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슬람 계에서 유명한 역사책은 과장과 흥미 위주였다. 역사에서 약간 비틀어서 더 흥미롭게 만들면 <삼국지연의>. 사람들이 재밌는 얘기를 과장해서 말하기 때문. 역사가 있다면 거기에 각종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원형의 역사랄 게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흥미로워 하는 역사는 통찰이 아니라 누가 어땠다더라라서, 그런 역사를 이븐 할둔은 비판했다. 그리고 이븐 할둔 시대에는 화려한 문체로 서술된 역사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븐 할둔은 전혀 다른, 무미건조한 문체로 썼다. 그런 과장과 호기심을 뺀 것.
이븐 할둔이 바라보는 역사를 따져보면, 기존의 역사 서술에 뭐가 문제인가. 나는 그런 것들을 지양하고, 역사로부터 인간이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를 보겠다는 것.

2,3장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
1부의 계시와 예언 이야기. 이것을 시대적 한계로 보는 연구가 많다. 그런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몰랐다고 하는 것은 한계인가? 왜 역사에 계시가 있어야 하는가. 예언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부 6장 자체가 예언에 대한 내용.
3부에 가면 53장이 예언 얘기.
6부에도 예언 얘기도 있다.
이걸 비과학적이라고 보면 안되다. 그건 우리 기준에서 언제나 과거로 돌아가는 것. 우리와 그들 사이에 불연속이 있다는 것을 염두하면 역사에 예언이 있다는 것을 뭐라고 봐야 할까?라고 물어야. 우리는 합리적 역사서술을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역사일 뿐. 그리고 이들의 역사라는 건 천지창조부터 시작된다. 원래 역사서설 자체가 성찰의 책. 충고의 책. 그 긴 책의 많은 부분이 신비로운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한다. 긴 책은 천지창조터 시작된다. 역사를 서술한다고 할 때 어디서부터 서술할 것인가. 이것부터가 해석이다. 삼황오제부터 역사라고 하는가 아니면 신화부터 역사인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단군신화부터가 역사인가? 아니면 고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물이 있고 자료가 있는 것부터 역사라고 하는가? 근대 역사는 실증적인 것에 입각해 있기에 후자를 역사로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어디서부터가 역사인가?
원래 이븐 할둔의 책에서는 천지창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인간이 조직을 이루고 사회를 이룬다. 그때 인간을 추동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문명과 국가를 뭐라고 생각했나? 내가 가지고 있는 역사가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검토해보고, 어디에서 어긋나는지를 얘기할 때 흥미롭다. 그리고 그걸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토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 토론이 잘 안되는 이유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서 끝내거나. 아니면 그냥 묻기만 하기 때문에. 토론이 되려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긋남의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토론을 진행하는 기술이라는 것은 어긋남을 발견하는 것. 나는 어떤 것이 왜 흥미로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흥미로움이 내 기존의 생각들, 관념들, 상식들과 비껴난다는 것이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말하기를 배우고 정제된 문제로 만들어 글을 쓰는 문제.
이븐 할둔은 인간의 역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 인간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도록 한 근본적인 힘들을 1,2,3,4을 거치며 쭉 얘기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사람의 새로운 것. 인간이 구성하는 집단의 유형이 두가지가 있다는 것. 이런 것이 아주 독특한 점. 인간이 집단을 구성하면 씨족, 부족 그 다음에 연합을 하고 더 커진다는 식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이 집단을 구성할 때 전혀 다른 힘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유목민, 다른 하나는 정착민. (전야민과 도회인). 이때 도회는 아테네 폴리스라고 할 때 폴리스. 중요한 건 그 두 가지를 가르는 원리. 인간의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원리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원리가 어떤 방식으로 충돌하고 결합하면서 국가의 형성을 향해 나아가는가. 그때 존재하는 게 모호한 양가성. 그걸 읽어내야 한다.

<천개의 고원> 열두번째 고원,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 들뢰즈의 주요 개념이 바로 노마드. 재밌는 건 페르시아가 유목민에게 작살이 난다. 그럼 유목민은? 지구의 절반 아닐까? 수적인 게 아니라, 어디가 망하는 건 유목민이 휩쓸고 가서 망한 경우가 많다. 들뢰즈가 유목민과 전쟁기계를 말한 부분은 욕을 많이 먹기도 한다. 제국주의자라고.
우리가 어떤 역사에서 어떤 집단을 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사회조직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게 점점 커진다고 봐선 안된다. 인간은 사회조직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걸 추동하는 원리는 같지 않다. 이게 새로운 시선. 조직원리를 다르게 본다는 것은 어떤 정치철학적 함의가 있는가.

루쉰, <이러한 전사>

아사비야를 가지고 있던 유목민들이 국가로 포섭될 떄는 제도화되는 것. 아사비야는 혈연적 유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혈연이 있고 동맹, 주종이 있다고 나온다. 이때 혈통은 수직적 연대. 이 수직적 연대 속에 있는 자들이 그 상태로만 있으면 국가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가 형성되려면 항상 외부에서 뭔가가 치고 들어와야 한다. 혈연과 결연이라는 세로와 가로 축. 이것이 <안티 오이디푸스>에도 있다. 혈통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이유, 아직까지 이들을 포획하고 다른 방식의 코드로 가로지르는 횡축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비야는 그 부족이 가지고 있는 집단의식. 그 몸체를 가로지르는 가장 지배적인 힘. 아사비야가 있는 부족, 강하다고 하는 것은 그 부족이 가지고 있는 위신, 명예 같은 것.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부족의 위신. 이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일. 우리의 명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의식이 아사비야. 위신, 강함이 다른 부족과 섞이지 못하게 한다.
쟤네들은 훨씬 더 약하다. 그런 것이 어떻게 우리 혈통과 같은가? 그런 순수성으로 자신의 위신을 지킨다. 자신의 힘을 가지고 다른 애들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데 관심이 있지 자신을 더 크게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 그것이 제국과의 차이.
아사비야라는 것이 집단을 구성하는 가장 견고한 힘. 그래서 다른 약한 애들을 침략하고 약탈한다. 이걸 옹호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기 떄문에 부족을 유지하려고 하지 연합해서 확장하려는 마인드는 없다. 그런 것들은 다른 집단, 도회인이라는 훨씬 더 약한 집단과 함께할 때. 아사비야를 말하면 이미 지나간 부족주의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서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서설. 부족주의라는 개념은 이븐 할둔이 처음 만든 개념도 아니다. 그런데 이슬람 전체를 다룬다고 하면서 아사비야를 가지고 오는 것은 일종의 양가성이 있는 것.
아사비야라는 개념은 고유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역사서설>에 드러난다. 이들이 훨씬 약한 도회인에게 굴복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품, 필요에 의해서 교류하면서 그냥 약해지는 것. 자신의 강함을 더는 유지하지 못하는 것.

"한본새로 인사" : 코드. 전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길들이는 것. 도회인이 전야민을 길들이는 것. 자부심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이 원하지 않는 전야민. 아사비야라는 의식이 강한 자들의 특징. 그런데 점점 도회인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의 물자와 문화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러는 순간 전야민은 사라지게 된다. 유목민들이 도회인들에게 지는 것은 힘을 통해서가 아니다. 약해짐으로써. 싸워서가 아니라 길들여짐으로써.
전사는 고유한 나타남. 그것이 전사가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움. <역사서설>에서도 비밀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중요하다. 유목민들의 비밀. 우리가 공유하는 코드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비밀스러워 보인다. 국가는 모든 것을 공공연한 코드로 만들어버린다.
문인과 학자들이 군벌귀족을 돕는 것을 두고 비판하는 <이러한 전사> 막상 그들은 창을 맞아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 자기가 없는 존재. 루쉰은 이런 것과 싸우고자 했다 한다. 그리고 전사의 모습은 전쟁기계를 말한다. 유목민의 핵심, 유목민의 강함. 들뢰즈도 니체처럼 항상 모든 언어가 두 가지 방향으로 분기된다.
전쟁기계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과 접속하는가. 전사가 홀로 다니다가 국가와 접속하면 국가의 노예가 된다. 하지만 전사가 다른 전사와 접속하면 더 강한 전사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그 자체로 약하고 강한 것은 없다.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힘과 접속하는가.
공부도 마찬가지. 공부가 자본과 접속하면 스펙을 높이는 것. 그런데 공부가 다른 탈자본적 힘과 접속하면 다른 길을 그린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힘의지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유목민 자체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이 힘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도회인과 접속하면서 어떻게 변질되는가. 유목민과 도회인을 단순히 대비시키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 것.
아사비야가 결국 왕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애초에 목표가 왕권이었따고 말하면 안된다. 이븐 할둔이 힘관계의 다이내믹함을 서술해 놓았다. 그런 시각으로 읽어야지만 역사서설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전쟁기계는 개념적으로 보면, 왜 이런 이상한 개념을 발명했는가. 어떤 개념을 통해서 탈주선을 모색한다는 것. 전쟁기념은 힘의 차원에서 볼 떄 국가와 대립한다. 전쟁기계가 국가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군대를 의미하진 않는다. 전쟁기계는 본성적 차원에서 국가에 반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고원에 있는 것.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어디 있지 않다. 국가란 일련의 장치들의 중심이다. 관공서, 의호, 경찰서, 학교 등 장치들을 통해 생성되는 중심이 바로 국가 권력.
권력의 거점은 국가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국가 장치. 국가 타도라는 구호가 너무 공허한 게, 국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는 공명할 따름이다.
"합리성을 관정하는 합리성의 사령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름대로 기관들과 합리적으로 관계맺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관으로 된 시공간 같은 것은 없다. 국가는 모든 것이 공명하는 중심. 하나의 공명상자. 국가는 선들, 끊이지 않고 욕망하는 시계들이 접속하는 선을 끊어내는 절편이다. 시작과 끝을 만드는 선분. 시작과 끝을 갖는 당위들. 학생은 학교에서 생성되는 선분이다.
학교로 중앙집권화 하지 않고 다양한 곳을 주파하며 배운다면 선분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성적으로만 환원되는 공부를 한다면 우리는 선분화되는 것이다. 그런 절편들을 가지고 구심력으로 빨아들이는 중심 그것이 국가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국가는 주권이다. (즉 지배권) 이 정치적 주권을 구성하는 두 극이 왕과 사제. 왕과 사제는 하나의 군주와 입법자. 전제군주 시대에는 이 전제군주의 말 한마디에 모두 달려있다. 전제군주가 기관없는 신체이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해석하는 이들이 관료. 해석된 법을 그대로 시행하는 이들이 관료. 긜고 우두머리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법을 만든다. 법 해석자.
국가가 성립하려면 한축에 계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목민은 약탈하고 빼앗는다. 거기서 끝. 굳이 계약을 맺고 연합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혈통적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위신이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부족과 결합하지 않으려고 한다.
클라스트르는 국가가 되지 않으려는 힘이 작동하는 원시사회가 많다. 국가 사회 저지 매커니즘. 위신 외에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 법 때문이 아니라 위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죽이는 유목민. 정치적 수단은 투표가 아니라 설득 뿐. 그래서 수장은 권력자라기보단 그냥 리더다. 그런 유목민들의 지도력, 거기의 수장은 어떻게 지도력을 획득하는가. 가장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투표를 통해 당선 이런 건 없다. 수장은 권력자가 아니라 리더이기 때문에 언제나 버림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원시사회에서 국가를 저지하는 매커니즘이 전쟁. 이들은 동일화 하는 방식의 의지가 작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모두 우리편이라는 식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계속 자기네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진짜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많은 경우 상징적으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금을 그어놓고 더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상징적 전쟁. 서로를 압도할만한 퍼포먼스를 하기. 이것이 제도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스포츠. 그중에서도 축구. 온갖 할 수 있는 퍼포먼슬릉 치르며 끊임없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각인하고 크게 되는 것을 막는다. 자연스럽게 더 합쳐져서 더 좋게 살기 위해 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계속해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으로서 상징적 전쟁을 벌인다. 진짜 전쟁을 할 때도. 내가 얼마나 명예롭게 싸웠는가, 명예롭게 죽었는가가 중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영화. 인디언들이 말하는 '철의 인간'. 이들이 보기에 백인은 철이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실제로 전쟁을 할 때도 그 다름을 확인하는 것들. 너희들은 그렇구나 우린 그렇지 않다. 싸우면 질 것을 빤히 알아도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그건 위신을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들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싸움을 벌인다. 국가를 저지하는 매커니즘.
클라스트르는 국가가 갑자기 생겨났다고 말한다. 갑자기 도회인에게 길들여지는 식으로. 갑자기 도회인의 것을 원하게 되면 확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항상 외부의 것과 연관되면서 그 조직원리, 기존의 국가를 저지하는 시스템이 깨질 때 국가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전쟁기계는 국가의 외부다. 모든 인간 사회 조직은 모두가 국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국가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다.
국가가 왜 출현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들뢰즈). 사람들은 왜 자발적 예속을 원하는가? 나는 나의 강함을 내가 지키겠다, 우리가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떠맡겨버리는 것이 왜 일어나는가? 왜 국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지? 클라스트르는 여기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들/가의 국가. 국가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원국가 개념. Urstaat. 국가가 진화론적 산물이라는 해석을 피하는 방법. 국가가 최종 결과라고 하면 그것이 진화론적으로 설명되고 그게 아니면 예외 취급 받는다. 국가란 점점 진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조직의 원리라 국가적으로 작동하는 순간 국가는 거기에 있게 된다. 힘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힘들이 집권적이고, 중앙을 향하지 않는 힘들을 제외하는 식으로 작동되면 국가가 된다. 그래서 원국가. 국가는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 부족들이 추장의 권력을 끊임없이 분산시키려는 매커니즘이 있다. 그런데 어느순간 추장이 재산을 독점한다면 국가는 거기에 있게 된다. 국가는 조직원리의 결과이지 진화의 끝이 아니다. 국가가 발생하는 것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조직원리를 달리한다면 우리는 국가적인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기계는 국가적인 힘에 포획되지 않는 힘.
아사비야에서 비롯되는 유목민. 이들이 자생적으로 점점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견고한 집단의식을 통해 국가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도회인과의 교류를 통해 점점 아사비야가 약화되어 국가가 된다. 조직원리라 사라져 버릴 떄 국가가 탄생한다. 제도화되고 길들여질 때.

유목적 기원.
유목민의 전쟁 기계는 가족 내지 가계 더하기 단결심(아사비야).
아사비야는 혈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아사비야라는 것은 국가로 포획되기 거부하는 집단의 견고한 위신. 전쟁기계는 국가와 전혀 다른 관계를 맺는 것. 가족 자체가 국가에서는 세포라고 생각하지만 베두인에게서는 국가는 패거리의 벡터. 그것 자체가 하나의 견고한 무리.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리지어 다니는 동물들. 길 위의 애들. 애들은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서열은 없다. 가족은 근대적 의미의 가족이아니다. 혈통도 위신의 문제.
더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기꺼이 거기에 복종한다.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제압하는 것. 어떤 애들이 다른 패거리에 복종한다는 것은 그 패거리가 더 강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계약이나 더 큰 연합을 형성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사비야는 자부심의 문제. 쎈 놈들의 세계. 정말 니체적 의미의 강자가 연관된다. 비밀스러운 역량이란 공공연한 코드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복종한다고 할 때, 누구와 공유할 수 없는 것. 센놈이 센놈을 알아본다. 비밀스러운 역량이 작동하고 있다.
아랍에서는 사회주의를 아사비야에서 유래한 말로 번역한다. 또다른 차원으로 변이 가능한 아사비야. 이븐 할둔은 부족의 추장은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유목민에서 중요한 건 추장이 가지고 있는 능력 뿐. 그런데 이게 도회지에서는 아사비야가 결국 권력의 차원으로 환원된다. 들뢰즈의 놀라운 지점. 보통은 아사비야가 애국심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해석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다르게 해석한다. 아사비야가 어떻게 계속해서 국가적인 것으로 귀속되는 것을 방해하는가. 그런데 도회인과 만나면 그것은 국가적인 단결심으로 포획된다. 아사비야 자체는 애국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연구를 보면 이븐 할둔의 아사비야는 광의의 애국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아사비야가 어떤 식의 벡터를 그리느냐에 따라서 국가를 부정하는 형태로/혹은 국가와 결합해 애국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사비야 자체는 애국심으로 환원해서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사비야 개념의 양가성이라고 보는 것.
이것이 들뢰즈가 니체를 따라서 힘을 바라보는 방식.
어떤 힘도, 조건도 그 자체로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떤 계열과 연관되는가가 중요. 그것이 그리는 두 가지 벡터로 아사비야를 봐야 한다.
어떻게 힘을/해석을/사건을 분기하도록 할 것인가. 담론이라는 것 자체가 방향이 갈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담론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것에 대해 방향이 분기되는 론. 분기하는 언표들이다. 성을 둘러싸고 분기하는 언표들. 담론화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옳다고 하는 것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닌 것. 여러 방향으로 뛰게 만들어야 한다.
이븐 할둔은 다른 이슬람 학자들이 끝난 개념이라고 한 아사비야를 가져와서 그 개념이 어떻게 분기하느냐를 보여주었다. 이 사람이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래서 유목민들이 어떻게 점점 길들여지는가. 국가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축. 그래서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 베두인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가능성이 많이 나와 있다.
도회인, 지나친 겸손과 복종. 이렇게 길들여지면 유목민은 끝나는 것. 도회인의 사치라는 것도 베두인에 비해서 사치스럽다는 것. 베두인은 워낙 척박한 땅엣어 자라난 사람.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았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

국가의 외부라고 해서 다 전쟁기계는 아니다. 국가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보존하는 세계적 기계(ㄷ국적 기업)가 있다. 그런가하면 국가권력에 맞선 패거리, 소수집단 같은 국지적 매커니즘이 있다. 외부는 이미 국가 안에 있다. 그렇지만 절대 국가 장치로 포획되지 않는, 그렇다고 국가 장치에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극가가 홈을 파놓은 곳으로 가지 않는 흐름들.
유목민들은 도회인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변이하는가를 보여준다.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생산력도 아니고 토목사업도 아니다. 국가는 항상 쌓아놓는다. 그리고 국가 외부의 사람들을 꼬드긴다. 축적하지 않는 유목민. 이븐 할둔은 세금 내는 순간 국가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목민의 아사비야는 세금을 내는 순간 끝.
국가의 의무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일정한 리듬, 코드를 부여하는 것. 그들의 독특한 비밀스러운 영역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 공공연한 국가 속에 편입시키는 것. 그것을 길들인다고 하는 것이다. 문화의 본질은 낙인을 찍는 것. 길들이는 것. 다른 말로 코드화. 길들여지고 국가에 뭔가를 내고 국가로부터 뭔가를 받는 순간 유목민적 삶은 끝장나는 것.
이런 원리를 가지고 <역사서설>을 읽으면 좀 더 잘 보일 것. 아사비야와, 베두인의 성격 등을 읽으며 양가성을 읽어낼 수 있을 것.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의 외부로서 국가와 본성이 다르다. 그것은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다양체. 변신역량에 의해 정의된다. 그래서 이들의 변신 문제는 유목민적인 것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면 좋다. 정쥔도 변신 모티프가 있긴 하지만.
장기와 바둑. 장기는 코드화된 개체들의 게임. 하지만 바둑알든은 위계또 동선도 없다. 상황적 특성만 있다. 어떤 배치 속에 놓이는 수인가가 중요. 어떤 배치에 이 수가 놓이는가. 이것은 외부적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개체. 이것이 전쟁. 닫힌 공간을 분배해서 최대한 차지하는 장기와 달리 열린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바둑. 운신의 폭을 만드는 바둑. 이게 국가성과 전쟁기계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조직원리.

민중은 어느순간 전쟁기계로? 전쟁기계이길 중단? 들뢰즈는 정동의 문제로 본다. 이븐 할둔의 아사비야도 정동의 문제로 보면 좋다. 우리는 경제 환원주의를 가지고 전환을 생각한다. 이 전환에 있어서 정동을 고려하지 않는다. 힘의 이행, 정서적 이행. 전쟁 기계에서 중요한 문제가 정동. 위신 떄문에 싸우고 위신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유목민, 거꾸로 말해 그게 끝나면 금방 무너진다. 전쟁기계의 중요한 문제는 정동. 정동은 강렬하다. 훨씬 멋있는 것이 등장하면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아사비야 같은 인간의 정념, 그 집단을 구성하는 위신과 자부심. 의식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서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이븐 할둔은 중요.

역사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근대가 만든 생각. 이들에게 역사는 자연스럽게 언제나 순환한다/인간에게 선악도 없다. 역사가 악을 없애는 것과도 상관이 없다. 투쟁과 갈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쁜 게 아니다. 투쟁과 갈등이 이 모든 것들을 추동하는 근본. 니체식으로 말하면 힘의지.

조로아스터교의 본질은 세상을 선이 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 기독교와 다른 것. 세상 자체가 계속해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 이상주의적 비전을 설파하는 것이 쉬울텐데. 조로아스터교는 창시자가 조로아스터라서 그렇게 종교 이름이 있는 것. 원래 이름은 '마즈다 교'. 이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도덕 관념이 다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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