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2주차 공지_<해방된 관객> -1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08-13 20:14
조회
221
  예술 인류학 시즌3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주에는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 1장과 2장을 읽었습니다. 저희는 2장 내용이 어려워서 1장을 위주로 토론을 했었는데, 채운샘은 2장 <비판적 사유의 재난>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랑시에르의 '비판’이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존의 비판 구도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랑시에르는 기존의 비판이론에 전제된 고정된 정체성과 불평등한 거리를 문제 삼습니다. 지식인과 대중, 예술가와 관객, 자본가와 노동가, 스승과 학생과 같이 불평등한 거리에 대해 기존의 비판은 이 거리를 제거하고 평등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운동이 오히려 불평등을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채운 샘이 랑시에르가 맑스주의를 어떤 맥락에서 비판하는지를 설명해주신 부분이 인상에 남습니다. 랑시에르는 어떤 노동자가 쓴 글을 보면서 의문을 품습니다. 노동자가 쓴 글은 보통 비참한 시대에 노동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글에는 노동자적 계급의식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맑스가 구분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계급의식이 아니라 다른 의식에 물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요? 노동자의 정체성과 자본가의 정체성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노동자에게 노동자다움을 강조할 수 있을까요? 맑스주의가 이 불평등한 계급을 무너뜨리자고 비판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맑스주의가 불평등을 외침으로써 노동자에게 계급성을 각인시키는 것이 오히려 불평등한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등을 문제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도 해방이란 문제가 중요했는데, 이 해방은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서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평등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사유를 전복시키는 랑시에르의 관점이 어렵기도 하지만 흥미롭습니다. 그의 대표 저작 <무지한 스승>도 그렇고, <해방된 관객>도 그렇고 그는 모든 이의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이나 관객은 스승이나 창작자에게 뭔가를 배워야 한다거나 스승과 창작자는 이들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이 전제를 의심하지 않고 우리가 선생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관객의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불평등한 거리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적게 아는 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평등은 이런 양적인 평등이 아닙니다. 뭔가를 알게 되는 지적 운동이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모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어떤 것을 습득하는 과정이 지식인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통해 더 아는 자가 덜 아는 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앎을 매개로 서로 다른 앎을 알아갈 뿐입니다. 때문에 지적 평등을 전제로 할 때는 각자 앎의 방식이 다르며 아는 것들의 층위가 다를 수 밖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의 정치적 문제의식은 불평등한 요소를 제거하고 어떻게 평등해질 수 있는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제기됩니다. 그는 불일치 속에서 서로를 위한 해방이 어떻게 가능한지, 불일치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불일치 속에서 무엇을 함께 조직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예술과 관객의 불평등한 거리에 대해 설명한 책이 <해방된 관객>입니다. 2장에서는 예술의 생산 속으로 관객을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한 두 명의 예술가로, 브레히트와 아르토를 언급합니다. 브레히트는 어울리지 않는 사진들을 배치해서 관객이 이미지를 낯설게 보며 질문이 들게 하고 현실에 은폐된 것들을 보게 합니다. 이런 사례 중 하나로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예로 들어주셨는데, 고다르 영화 중에는 관객이 영화에 감정 이입하지 않도록 갑자기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건다고 합니다. 틈틈이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가 현실이 아닌 단순히 극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아르토의 경우에는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려고 합니다. 아르토는 남미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원시인이 의례에 참여할 때 관객과 배우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이 참여하는 극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관객을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관객과 창작자의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불평등한 거리를 전제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 거리를 폐지하려는 시도 또한 정체성의 분할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나 미술 작품을 볼 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보지 않습니다. 뭔가를 알기 때문에 동일한 영화를 보아도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관객은 뭔가를 알면서도 동시에 모르는 상태로 작품을 봅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알던 것과 모르는 것이 연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채운 샘께서 작품을 본다는 것은 앎에서 무지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누구나 작품을 보면서 기존의 앎으로 모르는 세계를 해석하게 됩니다. 작가가 관객을 설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2주차 공지입니다~
-<해방된 관객> 2~3장 읽기
-공통과제: 예술의 정치성/정치적 예술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던 영화나 그림을 선정해서, 그동안 어떻게 정치와 예술을 연결지어서 생각했는지를 중심으로 써오시면 됩니다.
전체 1

  • 2019-08-16 12:55
    평등은 출발점이다. 이 단순한 출발점으로부터 어떤 해방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랑시에르의 질문인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의 해방이겠군요. 해방. 이 멋진 단어에 대한 랑시에르의 생각도 궁금해집니다. 알뜰한 후기 계속 부탁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