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3주차 공지 <해방된 관객> (II)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08-18 23:53
조회
208
“사실 예술은 그 자체로 정의되는 자율적 실천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자율적 실천의 이름으로 미학의 월권을 고발할 수 있을 그런 것도 아니다. 예술은 예술 행위를 식별하고, 그 식별을 지각 방식, 정서를 일으키는 형태, 특정한 이해 가능성의 형태와 일치시키는 식별 체제 안에서만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p.193)

랑시에르는 예술과 미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예술 작품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에게 미학은 “지각, 사유의 체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환기되는 사실은 어떤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우리의 사유는 우리의 ‘지각’에 수반되는 신체적 지평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어떤 것이 예술적인 것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판단의 근거, 그런 판단의 근거가 되는 ‘지각 양식’을 문제적으로 보게 하는 렌즈입니다.

어떤 대상을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우리의 지각 양식을 되묻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왜일까요.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신체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식이 결국은 특정한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규정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느낌과 판단이 종종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실은 우리의 신체가 놓여있는 사회적 조건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출현된다는 것. 그렇기에 예술적인 것도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없고, 문제적으로 봐야할 것은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질서 자체입니다.

미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독특한 관점만큼, 정치를 이해하는 랑시에르의 관점도 남다릅니다. 우선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권력 행사나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이 아니고, 정치의 틀은 법과 제도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정치라는 이름 아래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투표와 정치적 권리에 대한 투쟁, 법과 제도에 대한 관념은 무엇일까요?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을 ‘치안 질서’로 규정합니다. 치안 질서는 “공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분배”, “말과 소음의 분배”를 허용하는 신체성의 차원을 포괄한 개념입니다. 반면에 랑시에르는 정치를 “공통 대상이 그 안에서 정의되는 감각적 틀을 재편성하는 활동”이자 “‘자연적’ 질서의 감각적 명증성과 단절하는 것”으로 봅니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불일치’가 놓여있음을 말합니다.

“불일치는 지각되고, 생각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의 명증함을 문제 삼는 동시에 공통 세계의 좌표를 지각하고 생각하고 변경할 수 있는 자들의 나눔을 문제 삼는다. (...) 해방의 집단적 지적 능력은 전반적인 예속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불일치의 무대 안에 투자된 능력들의 집단화이다. 그것은 아무나의 능력, 자격 없는 인간의 자격을 작동시키는 것이다.”(p.69)

랑시에르의 ‘비판’은 ‘좌파의 멜랑콜리’와 ‘우파의 격분’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합니다. 한때 좌파적 차원의 비판은 ‘이미지 너머 비참한 현실’(예를 들면, 서울 도심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미지와 대비되는 상계동 빈민가의 모습)을 환기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좌파 진영이 내세웠던 비판의 논리였는데, 즉, ‘불평등과 비참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공동체의 유대를 파괴하는 이기주의에 대한 고발’로써 비판이었던 것이죠. 오늘날 좌파의 아이러니함은 여기서 생깁니다. “전복을 꿈꾸는 우리의 모든 욕망이 여전히 시장 법칙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자본주의의 권력을 쓰러뜨리겠다고 믿었지만 거꾸로 그 권력에 이의 제기하는 에너지를 빨아들여 [그 권력에] 원기를 회복할 수단을 제공하고 만 자들이 빠진 바로 그 함정”이 좌파적 비판의 우울(멜랑콜리)을 이룹니다. 책에 인용된 조세핀 멕세퍼 <무제 Untitled>는 반전 시위대의 모습과 내용물이 넘쳐 쏟아진 쓰레기통의 이미지를 서로 충돌시킵니다. 이미지의 모순된 충돌은 오늘날 ‘좌파적 비판’이 갖는 냉소주의를 말해줍니다. 멕세퍼는 쓰레기 더미처럼 만연한 소비문화와 반전 시위가 갖는 이질성을 연결합니다. 전쟁의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과 이들의 과소비는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구호가 갖는 모순을 냉소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증을 낳습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사례를 두고 “의도가 아무리 도발적이어도 이 테제들은 여전히 비판 전통의 논리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파의 격분은 무엇일까요? 먼저 68운동의 효과에 대한 우파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68운동을 “우리 사회를 그 어떤 소속도 없이 풀려난 채 유일한 시장 법칙을 위해서만 전적으로 처분 가능하게 존재하는 분자들의 자유로운 집적으로 변환”했던 계기로 이해합니다. 우파 진영이 민주주의로부터 내세운 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개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평등’이었습니다. 이것은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유지되는 평등이자, ‘시장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파의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와 구분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타자들(이슬람 광신도들, 테러리스트들, 이주 노동자나 하층민들)을 배척하기 위한 결집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죠. 랑시에르는 9.11 테러 사건을 비롯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오늘날 우파 차원의 비판이 ‘문명의 충돌’과 ‘테러와의 전쟁’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좌파의 멜랑콜리는 우리더러 짐승의 권력에 대한 대안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그 권력에 만족함을 고백하라고 촉구한다. 우파의 격분은 우리가 짐승의 권력을 부수려 하면 할수록 짐승이 승리에 기여하게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 이 식견 있는 이성은 병자들ㅡ이들은 자신이 병자임을 모르는 병에 걸렸다ㅡ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체계에 대한 종결될 수 없는 비판은 결국 이 비판이 아무런 효과도 가질 수 없는 대상의 이유를 논증하는 것과 같아진다.”(p.59)

그렇다면 랑시에르의 ‘비판’은 어떨까요? 랑시에르는 종결될 수 없는 기존의 비판적인 사유의 순환을 끊어낼 필요와 방향을 제안합니다. “이 행보의 핵심에는 능력에 대한 해방의 논리와 집단의 농락을 비판하는 논리 사이 연결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랑시에르의 이 제안은 ‘다른’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무능력한 자들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현실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불가피한 메커니즘”이나 “모든 욕망과 에너지를 자신의 배 속에 흡수하는 괴물 같은 짐승”은 없다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여기에는 진짜 현실(좌파적 의미에서 참혹한 현실, ‘불편한 진실’)을 숨기려는 외양, 복원해야할 잃어버린 공동체, 회귀해야하는 유토피아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불일치’의 무대만이 존재한다고 단언합니다.

불일치는 어떤 색이 흰색이냐, 검은색이냐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흰색을 말하는 자와 흰색을 말하는 자의 불일치입니다. 불일치는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흰색이냐 검은색이냐’를 분할하는 우리의 감각적인 질서를 되묻는, 그것을 통해 다른 감각의 차원을 생산하는 논쟁을 만듭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 친일과 반일을 따지는 문제는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무엇이 더 ‘올바른’ 것인지를 추구하는 정치적 관념을 재생산할 뿐입니다. 이러한 관념은 언제까지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 여성과 남성을 놓고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택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죠. 랑시에르에게 그러한 것은 ‘논쟁’이 아닙니다. 랑시에르의 비판은 앞선 선택지를 분할하는 근본적인 가치와 질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고, 이것을 의문시하는 것이 논쟁의 출발입니다. ‘흰색’을 검은색의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흰색 자체를 다르게 느끼는 과정에서 출현된 ‘단절’이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의 가능성,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미묘한 ‘불일치’들을 낳습니다.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개념은 ‘소리’에 대한 개념과 더불어 분할됩니다. 여기서 침묵은 소리가 완전하게 차단된 세계로 이해되죠. 그런데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세계가 과연 있을까요? 우리는 주변 소음이 차단될 때조차, 신체 내의 곳곳에서 진동하는 무수한 소리들과 관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본래부터 청각을 상실하신 분들의 일상은 침묵으로 가득할까요? 오히려 그러한 분들은 ‘침묵’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이해하지 않을까요? 서로의 불일치를 작동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차이’를 긍정하기. 랑시에르에게 정치적 주체화 과정은 “아무나의 능력”을 긍정할 때 생깁니다. 채운샘은 열 살짜리 아이들과도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놓고서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을 만한 ‘자격’을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지각 양식’ 속에서 멋대로 소설을 읽고 느낄 것이며, 짧든 길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랑시에르의 ‘해방’은 유식한 스승이 무식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자가 다른 무지한 자를 가르칠 수 있음을 긍정할 때 이뤄집니다. 규문에서 남녀노소가 한 자리에 다 같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치고 참견하면서 왁자하게 배우는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다음 시간에는 <해방된 관객>을 ‘4장. 생각에 잠긴 이미지’에서 ‘부록’까지 읽고 옵니다.
중간 중간에 랑시에르가 인용했던 이미지를 주의깊게 참고하면서 읽어봅시다.

간식은 영민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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