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4주차 공지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08-26 15:10
조회
153
이미지를 통해서 ‘죽음’을 전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은 재현 가능할까요? 시체를 보여주면 죽음이 전달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면 되는 것일까요? 작가가 ‘죽음’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다고 해서 그 의도대로 우리가 죽음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미지는 실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번 주에 읽은 <해방된 관객>에서 랑시에르는 ‘생각에 잠긴 이미지’라는 개념으로 이미지의 재현 논리를 비판합니다.

 

알렌산더 가드너의 <루이스 페인의 초상>


랑시에르가 참조한 이미지들 중에서 토론 중에 논란이 되었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알렌산더 가드너의 <루이스 페인의 초상>입니다. 사진 자체만 보면 미학적 구도 속에서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고 사진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 속 청년은 사형수입니다. 가드너는 사형 선고받은 청년이 앉아있는 순간을 포착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자체만 봐서는 그 청년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형수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미지 자체만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사형수라는 전형적 이미지와 그와 다른 모습을 하고있는 청년 이미지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전형과 비전형 사이의 갈등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는 점에서 이 사진이 ‘생각에 잠긴 이미지’일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갈등이 전형화된 이미지를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논지를 따라가 본다면 사형수와 사형수답지 않음의 대립 구도 속에는 ‘사형수는 이렇다’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주어진 사유의 분할선을 유지한 채 또 다른 사형수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형수를 가드너처럼 볼 수도 있겠다’라는 ‘다른 생각’만으로 기존의 전제는 깨지지 않습니다. A와 B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A와 B사이를 오갈 뿐이죠.

랑시에르에게 ‘생각에 잠긴’다는 것은 기존의 분할선을 깨뜨리는 긴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동일한 전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재현 논리를 깨고 분할선 자체를 문제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생각에 잠긴 이미지’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이것이 무엇을 재현하는지 알 수 없음을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고 찍었는지, 뭘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를 재현 논리 속에서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그런데 랑시에르가 말하는 ‘생각에 잠긴 이미지’는 찍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보여지는 것’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킵니다. <루이스 페인의 초상>을 보면서 재현 논리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사형수를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죽음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사형수에게서 죽음이 연상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통해서 죽음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해방된 관객>을 3주에 걸처 읽으면서 기존의 비판 구도의 전제를 비판한다는것은 무엇인지, 글을 쓰면서 어떻게 기존의 분할선을 문제 삼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4주차에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을 읽겠습니다. 전체 분량을 모두 읽어오시고, 편지 중에서 각자 관심이 가는 주제를 선정하셔서, 그 주제를 토대로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택1: 추성적인 것, 포스트모던, 숭고, 집단적인 노동, 아름다움, 구축, 사건, 신체, 삶정치) 3주차 강의 후기는 지안샘이 써주시기로 했습니다. 4주차 간식과 후기는 다솜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금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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