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3주차 후기 <해방된 관객> (4장, 5장)

작성자
푸른달
작성일
2019-08-27 00:16
조회
279

4장.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


우리는 비참함이나 고통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이는 비참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재현하는 것으로 가능할까요? 아니 애초에 이러한 감성들을 타자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 4장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기존의 비판적 체제에서는 어떻게 다루는지 또한 그가 말하는 미학적 체제는 이와 어떻게 다른지 몇 가지 작품 분석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라는 영화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 의해 매끄럽지 않습니다. 감독은 이들의 눈물, 침묵 등을 통해 오히려 말할 수 없음, 이야기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진실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는 분명 이전의 비판 담론들이 보여준 방식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지만 랑시에르가 지적하길 이는 여전히 감독이 자신의 의도에 예술과 관람자의 위계 즉, 관람자가 그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감독(예술)을 전제합니다. 이 위계는 그 자체로 예술가와 관객, 언어와 이미지, 능동과 수동의 기존 분할을 반복하며 재생산합니다. 랑시에르는 여기서 비판적 담론의 자기모순을 지적합니다.


예술이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랑시에르가 주목한 작품 중 알프레도 자르의 <침묵의 사운드>가 있습니다. 이것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와 그 옆에서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가 케빈 카터의 삶에 관한 작품입니다. 카터는 그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그러한 (용납할 수 없는) 사진을 찍은 것에 대한 비난 캠페인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특종 사진에 눈이 멀어 눈앞의 소녀를 구하지 않고 그저 피사체로만 바라본 그의 태도에 대해 비난했죠. 자르의 <침묵의 사운드>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부추기면서도 거절하는 이 체계의 이중성(140)에 대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카터가 어떻게 그 광경의 강렬함에 이끌렸는가를 관객이 느끼게 합니다. 작품이 보여주는 단어들은 그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조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 투쟁한 활동가로서 어떻게 그 깊숙한 수단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종국에 그 광경을 보았을 때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것, 지체할 수 없는 것으로서 대하게 되었는지 관객이 알도록 이끕니다. 랑시에르는 카터의 삶을 보여주는 자르의 장치가 기존의 윤리적 분할선 위에 놓여 있는 관객을 탈맥락화함과 동시에 새롭게 재맥락화했을 때 관객을 동일한 사진에 대해 어떻게 다르게 감각하도록 이끄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가 얼마나 많은 견고한 분할선들 속에 위치하게 되는지를 바로 그 언어적 분할선들을 통해 교란시키며 이미지를 새롭게 위치시킵니다.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란 바로 이러한 분할선 자체를 문제삼는 담론입니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현실을 그것의 외양에 맞세우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다른 현실, 공통 감각의 다른 형식, 다시 말해 다른 시공간적 장치, 말과 사물, 형식과 의미작용의 다른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 창조는 곧 허구의 작업이다. 이 작업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과 가시적 형태들, 말과 기록, 여기와 저기, 당시와 지금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145)


랑시에르에게 예술은 혹은 정치는 지금 우리가 공통감각이라고 믿고 있는 견고한 분할선들을 의심하고 그 분할선 자체를 질문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허구로서 역시 허구일 수 있을 기존의 분할선 자체를 교란시키며 모든 구분되는 것들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예컨대 랑시에르가 분석한 <S21>의 작품은 수용소에 있었던 생존자와 간수였던 사람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도록 합니다. 이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뒤섞입니다. 어찌 보면 앞서 언급한 <쇼아>는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앞에 피해자 가해자를 영원히 그 각각의 분할선 속에 가둡니다.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누구도 그 역사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반면 <S21>의 방식은 가해자 역시 또 다른 역사 속 피해자였음을 보게 하며 이들 간의 또 이들과 역사간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게 하고 이로써 그들 모두를 역사적 규정성, 분할선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5장. 생각에 잠긴 이미지


우리는 대개 이미지를 두 가지 관념 체계 내에서 봅니다. 사물의 재현물로서 보거나 혹은 작가에 의한 예술적 조작. 랑시에르의 생각에 잠긴 이미지는 이러한 분할선을 의문시하는 비규정 상태, 즉 실제로도 허구로도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서 바라봅니다. 랑시에르는 <루이스 페인의 초상>이라는 이미지로 이를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과 스투디움의 관점을 설명하며 이와 자신의 논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바르트는 이 사진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사진을 스투디움 즉 정보 전달의 측면으로 바라보면 이는 아름다운 한 청년을 아름답게 찍은 사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바르트 식의 생각에 잠긴 이미지 즉 푼크툼으로 바라보면 이는 사형수의 사진이기에 곧 죽을 청년, 나아가 사진의 옛 라틴어 기원 이마고(옛 사람들이 죽기 전, 죽은 사람의 계속되는 현전으로서 만든 영정)적 속성에 의해 미리 실현된 ‘죽음’ 자체를 뜻합니다. 바르트의 푼크툼은 모든 참조적 맥락을 제거한 채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순간적 마주침, 사건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박제된 순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바르트의 푼크툼은 사진이라는 매체에서 여전히 ‘(작가에 의해서든 이미지 스스로 그렇든) 보이고자 하는 것’과 ‘(관람자가) 보는 것’ 사이에 연속성을 전제합니다. 예컨대 이 사진에서 바르트의 해석에 따르면 이미지는 ‘죽음’ 을 보이고자 했고 관객 역시 그것을 볼 것을 기대하기에 미적 체험의 순간은 서로간의 바로 그 합의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이미지가 관객과 감응할 수 있는 것은 관객의 의식 혹은 감각에 이미 자리잡은 어떤 공통의 지반을 가시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조우 역시 예술의 교감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만 랑시에르에게 분명 이는 기존 질서의 재생산이기에 미학적 감응에 닿지 못합니다. 바르트는 분명 푼크툼이라는 해석 개념으로 사진의 모든 참조 맥락들을 탈각하여 이미지가 가진 어떤 힘을 드러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지적하는 바는 바르트의 해석 틀이 여전히 이미지를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일치 속에서 하나의 합의된 규정(여기서는 ‘죽음’) 속으로 환원시킨 점입니다. 이러한 환원은 결과적으로 사진의 다채로운 비규정적 특질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 사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이 보이고자 하는 것과 어긋나 있음에 주목합니다. 그 어긋남, 단절이 만드는 여러 비규정적 매듭이 바로 이 사진을 생각에 잠기도록 즉, ‘사유’하도록 만듭니다. 그는 바로 여기에 미학적 체제가 작동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사진과 미적 교감을 나누는 순간은 바르트의 ‘죽음’이라는 동질적 합의가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삶’을 떠올리는 불일치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너무나 멋있었던 랑시에르의 글들 중 특히 좋았던 5장의 몇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사실 생각에 잠김은 행위의 논리를 저지하러 온다. 한편으로, 생각에 잠김은 중단되려 하던 행위를 연장한다. 다른 한편, 생각에 잠김은 모든 결론을 중지시킨다. 중단된 것은 바로 서사와 표현의 관계이다. 이야기는 그림 위에서 정체된다. 이 그림은 이미지의 기능의 전도를 표식한다. 시각성의 논리는 더는 행위를 보충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를 중지시킨다. 또는 오히려 행위를 배가한다. (174, 발자크의 ⌈사라진느⌋의 마지막 문장—“후작 부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에 대한 랑시에르의 논평 중.)


나는 생각에 잠김이라는 관념에 내용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 생각에 잠김이라는 관념은 이미지에서 생각에 저항하는 어떤 것, 그 이미지를 만들어낸 자의 생각과 그 이미지를 식별하려고 애쓰는 자의 생각에 저항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이 저항의 몇몇 형식을 탐구하면서 나는 그 저항이 어떤 이미지들의 본성을 구성하는 특성이 아니라 같은 표면 위에 있는 여러 이미지-기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간극의 작용임을 보이고 싶었다. 따라서 바로 이 간극의 작용이 왜 예술에서 그리고 예술 바깥에서 나타나는지, 예술적 조작은 생각에 잠김의 이 형식들—그것을 통해 예술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85)

전체 1

  • 2019-08-27 11:35
    허구로서 역시 허구일 수 있는 기존의 분할선을 문제삼기.
    '생각에 잠김'이라는 이 상식적인 생각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자의 생각과, 그 이미지를 식별하려고 애쓰는 자의 생각에 저항하는 어떤 것과 연결된다니, 놀랍습니다.
    '분할'이라는 말을 두고 '생각에 잠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