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4주차 후기 <예술과 다중>

작성자
다솜
작성일
2019-09-04 11:01
조회
153
 

 

예술과 다중이라는 제목에서 도대체 ‘다중’이란 게 무엇인지, 책을 처음 만났을 때도 들었던 궁금증이었고 토론 시간에도 토론 나눴었던 부분이었는데요. 수동적인 성격의 대중과는 달리 해방의 주체이면서 다양성을 띈 주체들이 ‘다중’아닐까,라고 이야기 나눴었습니다.

네그리가 왜 다중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왔느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어난 노동의 변화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요. 1960년대를 기점으로 노동은 지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정동적인 노동으로서, 즉 여러 가지 언어활동이나 관계를 생산하는 노동(38p)”으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후기 자본주의는 인간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계속 해서 뭔가가 부족하다고 여기게끔, 그래서 인간 스스로 노동의 속박을 욕망하게끔 만듦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적어도 과거엔, 몸은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의식으로는 그 착취에 저항하려 했었는데, 이제 의식마저도 포섭되어 스스로 억압을 욕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을 가능케 한 것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비물질적 노동’입니다. 이는 지식, 언어, 정서의 착취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자본주의가 실질적 포섭을 하도록 지식, 언어, 정서의 측면에서 인간들이 알게 모르게 기여한 모든 활동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이 들어준 예시로는, 개인 인터넷 방문 기록을 구글이 수집해서 그에 맞는 광고를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대항하는 주체로서 네그리는 ‘다중(multitude)’을 이야기한 것인데요, 다른 말로 하자면 역동적인(관계성 속에서 얼마든지 변이 가능하고), 그렇기에 전체를 다른 양상으로 만들어내는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의 재생산 가능성은 통속적인 것 따위가 아니라 시장의 실존적 무가치의 압축된 총체와 단절하는 윤리적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예술은, 가격으로 환원된 단일성에 여러 특이성으로 이루어진 다중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반시장인 것입니다. 시장의 정치 경제학에 대한 혁명적 비판은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진 다중이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을 구축합니다” (86p)

시장의 메커니즘에 의해 모든 것들이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가치로 전락해버린, 후기 자본주의의 무의미함·허무함 앞에서 가장 요청되는 것은, ‘숭고의 감각’이라고 네그리는 말합니다. 우리의 존재형식이 공허로 흘러간다고 인정해버린다면, 그런 건 시장의 영원성을 인정해버리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공허의 저편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허의 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감각이 바로 ‘숭고’인데, 그것은 상상력(=잠재력)임과 동시에 실천을 수반하는 힘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으로 새로운 감수성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존재를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윤리로의 이행은 가능해지고, 포스트모던으로부터의 탈출이 이뤄질 수 있다고 네그리는 말합니다.

소련에서 레닌의 혁명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했던 고민도 네그리의 그것과 비슷한데요. 당시 예술가들은 러시아 민중들의 (종교 예술에 여전히 심취했던) 낡은 감각을 어떻게 혁명시킬까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든 작품들이 이런 것과 같은 것들인데요. 각도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이게끔 만듦으로써 관객이 공간을 능동적이고 새롭게 인식하게끔 한, 당시 러시아 미술관의 배치입니다. 이런 작업을 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생성해내려 했던 새로운 감각의 집단은, 네그리가 생성하고자 했던 집단과 (각각 시대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 예술의 맹점은, 막상 대중들이 너무 어려워해서 호응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의도대로라면 실효성이 관건인데, 그 측면에서 성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네그리(+아방가르드 예술가)의 관점은, 사실 랑시에르가 지적했던 ‘분할선을 재생산해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채운쌤이 얘기해주셨는데요. ‘대중·관객을 능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 자체가 지식인과 대중·관객 사이의 지적 능력의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관점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네그리를 읽으면서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ㅋㅋ) 랑시에르라면 아마 대중들은 이미 multitude라고 말했으려나요...? 지식인과 대중,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지적능력의 불평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랑시에르의 관점과 상반되지만, (코스타의 영화가 그러했듯) 사회의 치안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 정치적 예술이라고 보았던 랑시에르의 입장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감수성을 구축하려했던 네그리의 입장은 어느 정도 닮아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거의 감수성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요.

예술 인류학 세미나를 이번에 하면서 드는 생각은, 첫째는 ‘예술이 정말 어려운 거 였구나’이고, 둘째는 ‘예술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 할 수 있구나’ 인데요. 그래서 느낀 것이 그동안 제가 예술을 바라봄에 있어 ‘단순한 감각적 쾌락’이라는 측면으로 많이 접근했었던 것 같아요. 상품 소비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렇게 예술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틀들이 많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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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5 14:56
    인민이나 대중처럼 무차별적 다수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을 생성해내는 역동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다중'이란 개념이 재밌었는데요.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다중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