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5주차 후기 <반딧불의 잔존>

작성자
조정희
작성일
2019-09-09 16:52
조회
182
 

이번주 숙제는 이미지와 정치에 대해 <반딧불의 잔존> 저자 위베르만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정리해오는 것이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위베르만이 이미지를 뭐라고 설명하고 있는지까지 이해하기에도 벅찼습니다. 그래서 숙제에서 정치로 연결을 시키지 못했고, 토론 시간에도 계속해서 이미지와 정치를 연결해보고자 시도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으로서의 정치가 계속 떠오르고, 위베르만이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따라가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저희 토론 내용을 듣고 채운샘이 위베르만의 정치부터 정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치하는 방식이 있는데, 여기서 상상은 이미지화한다는 뜻이고, 이는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관념입니다. 즉 상상은 세계에 대해 우리가 지각하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정치와 일상을 분리하여 정치의 영역을 따로 설정하지만 이 정치는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으며 개념 자체가 매우 협소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예술을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치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정치성이라는 것은 관계맺음의 윤리입니다. 모든 관계는 힘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때 각 관계마다 행동이 달라집니다. 결국 상상한다는 것인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되고, 내가 그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이 됩니다.

위베르만에게 정치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저항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유하면 인격화된 것을 떠올리고 경험한 세계에 국한해서 떠올리지만 파솔리니와 바흐찐은 다릅니다. 미하일 바흐찐은 민중을 탈중심적이고 더러움, 질펀함 등인 카니발 적인 것으로 얘기합니다. 파솔리니의 영화가 이와 비슷합니다. 파솔리니가 자신의 영화에 조토의 이야기를 삽입합니다. 조토가 성당에 성경 내용의 벽화를 그릴 때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를 파솔리니가 상상합니다. 그 내용은 조토가 시장의 왁자지껄함 속에 들어가서 민중들의 얼굴을 보고 그 중 매력적인 여자를 관찰하고 성당으로 돌아와서 마리아의 얼굴로 그린다던가 등으로 벽화에 민중을 채워넣어 성과 속을 일치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파솔리니는 이미지들에 잠식당한 민중들의 새로운 역량을 예술로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민중을 그린다고 민중적인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른 힘을 그릴 것인가였습니다. 그 방식은 간접화법인데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을 끈질기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파솔리니에게 저항의 이미지는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없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빛들입니다. 즉 어둠 속에서 어떻게 미미한 빛을 볼 것인가의 문제를 말합니다. 파솔리니는 민중의 역량을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끊임없이 잔존하며 살아가는 힘들로 봅니다. 사람들은 저항을 떠올리라고 하면 외부의 억압을 먼저 상정하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저항은 실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맞서는 것입니다. 집단화되고 중심화되지 않는 이미지인 반딧불을 다시 보면, 반딧불은 종종 안보이지만 어두울수록 밝게 보이고, 어디선가 미미하게 빛나고 있으며 어두울수록 더 힘이 있는 빛입니다. 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모든것에 맞서는 가장 능동적인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잔존의 이미지에 대해 더 얘기하면, 패배를 시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패배한 이후에 아무것도 안 하는게 아니라 그 이후에 뭔가를 하는 것. 이런 것이 잔존의 이미지입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여전히 어둠의 시대에 미미하게 빛을 발하는 이미지이고, 이를 보고자 하는 것이 위베르만의 정치입니다. 그래서 위베르만의 정치는 저항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정치성이란 정치적인 것을 구현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잔존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반딧불을 보지 못하게 하는 서치라이트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로 집중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는 서치라이트 이외에 나머지는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둠속의 반딧불을 보기 위해서는 서치라이트를 등져야만 합니다. 서치라이트는 어둠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 빛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해와 달을 보면 밝음과 동시에 어두움을 갖고 있습니다. 예술도 이처럼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되자가 아니라 한번쯤은 서치라이트를 등지고 서치라이트가 보지 않게 하려는 미미한 빛들에 귀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그것들과 결합하는 것이 예술 아닌가라고 위베르만이 말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추석 주 이후 수업에는 <반딧불의 잔존> 뒷부분을 모두 읽고 책의 맥락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를 하나씩 찾아오기로 하였습니다. 이미지는 영화 스틸컷이나 그림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미지란 무엇인지 정리하며 위베르만의 예를 잘 이해해 오기가 숙제입니다.

 
전체 1

  • 2019-09-17 10:31
    정치성이란 관계맺음의 윤리로군요. 정치가 광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을 진짜 경계해야 하는데, 이번 후기를 읽으니 또 새롭습니다.
    위베르만의 반딧불은 결국 '민중'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나요?
    함께 세미나를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후기를 읽으며 공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