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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NY 4학기 3주차(11.6) 공지 / 소비의 무능과 미풍양속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1-02 12:16
조회
218
 

 

가을이 깊어져가고 있네요. 뭔가 등산이 절실해지는 계절입니다. 4학기 두 번째 시간을 스케치해보겠습니다.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근면한 시대인 우리 시대는 그 많은 근면과 돈에서 점점 더 많은 돈과 근면을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돈을 쓰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천재성을 요구하는 일이 되었다.”(21절)

이런 조사가 있다고 합니다. 주식이나 코인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그 수익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제일 많이 나오는 대답은, ‘재투자’였다고요. 비록 니체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감성은 다릅니다. 노동의 강도나 노동에 대한 생각, 근면함과 돈에 대한 절실함도 다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특징만은 아주 강력하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도통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는 것. 이 말은 돈 쓸 곳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살 것은 너무나 많고 돈 들어갈 곳은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소비는 언제나 더 많이 벌어야 할 필요성을 불러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근면이 요청되지요. 우리시대의 근면은, 언제 넣고 언제 빼야하는지 어떤 분야가 오를지에 대한 각종 찌라시와 각종 재테크 전략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벌어들인 돈을 잘 쓰는 데 있어서의 기예가 부족합니다. 그 축적된 힘을 어떻게 품위 있게 사용하고 순환시킬 것인가, 어떻게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도록 할 것인가? 니체는 말합니다. “맹목적인 근면이 비록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섬세함을 신체 기관에서 빼앗아”(21절) 가버렸다고요.

이와 관련해서, 저희는 공부공동체에서 돈이 순환되는 방식, 자기 욕망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섣불리 선택한 ‘자발적 가난’의 위험성, 자신의 손과 발과 매력으로 관계를 확장시키고 그런 신체의 힘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아메리카의 인간들 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 사람과 사람의 만남, 즉 관계가 돈보다 먼저이고 근원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다양하고 다질적인 사람과 모여 앉아 더 다양하고 다질적인 능력을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에 덜 묶이고 돈을 더 품위 있게 흐르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 우리에게는 돈이 들어오는 경로나 나가는 경로가 일률적인 것 같습니다. 버는 목적도 쓰는 목적도 ‘내 쾌락’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쾌락’으로 한정되구요. 그럴 때 우리는 돈을 더 실체화하고 돈에 더 비굴해지고 경직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돈에서 소비 혹은 축적이나 투자의 용도만을 떠올리는 감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다른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으레 그렇게들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많이 버는 게 좋은 거고 쉽고 안정적으로 버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생각일 뿐이지만 그 무게가 어마어마합니다. ‘정말 그래?’라는 질문 몇 번으로는 쉽사리 꺾이지 않지요. 그래서 돈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사는 방식에 대해서도, 자녀의 문제에 대해서도, 혹은 그것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게 될 비전에 대해서도, 웬만한 상식과 감수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경로를 향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려운 걸까요? 자기가 겪게 될 귀찮음과 피로감, 가족이나 자신이 관련된 사람의 우려일까요? 그것도 맞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인정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다는, 외톨이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고립이 두려운 것이지요.

“가장 양심적인 사람조차도 “이런저런 일은 네가 속한 사회의 미풍양속에 어긋난다”라는 느낌 앞에서는 양심이 약해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주변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을 보내고, 입을 일그러뜨리면 가장 강한 사람도 두려워한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고립이다! 고립이라는 논거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최상의 논거도 때려눕힌다! 우리들 안에 있는 무리의 본능은 그렇게 이야기한다.”(50절)

양심, 즉 자신이 배우고 자신이 옳다고 이해한 바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고립감입니다. 사람인 이상 어쨌든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정서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하니까요.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영향 받지 않으며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무리의 본능을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무리의 본능에서의 다른 활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다른 관계, 다른 미풍양속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기존에 발붙이고 살아가던 곳의 리듬을 그저 거부하고, 제자리에서 의지적으로 극복하려하는 시도만으로는 화만 쌓일 뿐입니다. 자리를 바꿔야죠. 니체가 보여준 것처럼요. 하지만 이런 떠남에서도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다 싫어’하는 거절이나 부정이 앞서서는 또 다른 이상향이나 허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보다는 지금 억제되고 있는 자신의 충동과 양심과 건강상태가 더 능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미풍양속을 더듬더듬 만나겠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닦는 일에 있어서 절대로 정신이나 영혼에서 출발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스승이든, 친구든, 적이든, 텍스트든, 자기 자신을 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존재들, 특수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자장에서 말하고 듣고 먹고 손발을 움직이는 방식에 감염되기. 니체는 “이러한 변형의 기술이 바로 철학이다”(서문)라고 말했습니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시작한 채운샘의 풍성한 강의는 인영샘께서 후기에서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규범과 동시에 생겨나는 예외들, 안쪽과 동시에 생성되는 바깥쪽, 안정에의 욕구와 동시에 존재하는 변화와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말씀해주시는 대목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언제나 같이 도래해 있다는 것.” 불경에서는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 번뇌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이 확 이해가 되었습니다. 대체 행복을 꿈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행복의 바로 옆 혹은 뒷면에 불행의 영역을 잔뜩 만들어놓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인정받고자 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함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겠다는 말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앞에 것을 갖고자 하지만 뒤에 것을 감당하기는 싫어한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칭찬을 원하면 비난도 당연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행복을 즐긴다면 그 반대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좋은 사람들이라고 느끼고 만족하는 순간, 그 그룹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외부적 요소 혹은 그런 결말들이 함께 규정된다는 것을 거듭 상기해야 합니다.

“만약에 쾌와 불쾌가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어서 그 하나를 가능한 한 많이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그만큼 많이 받아야 한다면, “하늘에까지 이르는 환호”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애”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12절)

기쁨과 슬픔, 안쪽과 바깥쪽, 인간과 비인간. 어느 한쪽이 만들어지는 순간 다른 한쪽도 만들어집니다. 이런 ‘동시적 도래’가 삶이라고 채운샘은 이야기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이 아니라 관념을 원한다는 것에 있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원할 줄 모르는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때고 너희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그러나 너희는 그에 앞서 원할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한쪽을 원한다면 다른 한쪽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당한다는 것은 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원하는 것 반대에 있는 것조차도 원하기. 원하는 일에 있어서의 최고급 기술을 니체는 우리에게 슬쩍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지

-<즐거운 학문> 118절(~194쪽)까지 읽고 간단히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고 간단히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4학기 에세이 : 니체의 텍스트들 중에서 에세이 작성에 필요한 재료를 모읍니다. 각자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되 토론 때 공유할 거리는 간략하게 준비해오기. 주제와 계획을 명확히 잡아오세요! 조별로 빠방하게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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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3 21:39
    '니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닦는 일에 있어서 정신이나 영혼에서 출발하지 말라고' 했군요.
    신체에서 출발할 때 그 신체성은 무엇인지 정신과 영혼과는 어떻게 대별되는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