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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NY 4학기 4주차(11.13) 공지 / 예술에 대한 최종적 감사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1-09 19:04
조회
169
 

니체의 책들을 읽다보면 꼭 다뤄지고 있는 파트이지만 매번 어려운 파트는 예술과 관련된 부분입이다. 원래 예술에는 문외한인 데다가 19세기 사람인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상가들은 더욱더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음표를 찍어가며 끙끙 읽다보면, 문득 아, 이것이 예술에 대한 니체의 관점인가 하는 어렴풋한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즐거운 학문>에는 “예술에 대한 최종적인 감사”라는 절이 그 지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이런 종류의 교육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과학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비진리와 허구에 대한 통찰, 인식하고 느끼는 현존재의 조건인 광기와 오류에 대한 통찰을 전혀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직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마도 구토와 자살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직성에 반대되는 힘이 있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결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데, 이것이 가상에 대해 우호적인 예술이다.”(107절)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우리를 우리의 무거움과 진지함에서 빗겨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저편>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왜 인간은 비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처럼, 우리 안에는 참인 것, 이전과 동일한 것, 다음에도 지속될 것, 우릴 기만하지 않는 확실한 것을 찾으려하는 강한 의지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한 것을, 가상보다는 현실을, 생성보다는 존재를, 오류보다는 진리를 갈망하는 경향. 진리에의 의지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연의 본성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유기체의 진화에서 채택된 ‘태고의 충동과 근원적 오류’(110절)이지요.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겁고 진지한 인간이며, 인간이라기보다는 중량”(107절)이라고요. 이처럼 변하지 않는 법칙성 혹은 정직성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변형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과학으로 승화되었지요. 우리는 무엇이 오류고 비진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실험과 검증을 동반한 어떤 앎들이 ‘보편적 사실’이라는 지위를 얻음과 동시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형성되어 있던 고유한 앎들이 미신이나 야만이라는 자리로 밀려났지요. 과학의 반열에 오른 학문과 도덕이 생겨남과 동시에 비진리와 허구, 광기와 허구, 범죄와 폭력과 비이성으로 통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에게는 인간의 행동의 동기나 가치를 경제적 합리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니체를 읽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무용한 일을 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못합니다.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라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요. 어떤 일들은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현실적이지 않은’ 일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딱딱한 상식, 자명한 합리성, 보편적인 도덕이 제시하는 정직성과 무거움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존에 어떤 진리-철방에 갇혀 살고 있었는지, 아니 갇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요.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로 또 아래로 바라다보고, 예술적 관점에서 거리를 두고 우리 자신에 대해 울고 또 웃음으로써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107절) 예술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부모가, 친구가 옳다고 하는 논리에 질문을 던지고 거리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예쁘고 슬프고 멋지다고 감탄하며 박수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는 시종일관 도취와 마취를 일으키는 소비적 예술을 비판했죠. 이런 말들을 조합하다보면, 니체에게 예술은 결국 우리 자신, 우리의 습과 우리의 가치를 떠나게 하고 시험대에 올리는 일에 그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맞서기 위한 것이다.”

비극은 그러한 예술의 전형입니다. 이번 주에 읽고 토론한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였습니다. 저희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방인과 정체성의 문제, 신성함과 저주스러움의 문제, 실레노스의 지혜와 강함의 염세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 깊이 있게는 이야기하지 못해도 논의거리가 많았지요. 제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오이디푸스의 전환이었습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당한 것이 ‘선물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선물이란 표현이 무척 낯설었는데요. 그는 그가 겪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식입니다. 자신을 몰아가는 말 못할 운명 앞에서, 자신이 맞는 이 재앙을 신들이 즐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초점이 자기 자신, 이걸 겪는 나, 이 불행 앞의 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신, 그리고 그들의 즐거움에 있습니다. 그들의 이성적 판단과 의도가 아니라 즐거움과 유희라는 것이 핵심인데요. 자신이 잘못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운명에 휩쓸렸다는 것이 포인트인 듯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그 사건들을 자신의 죄로 환원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떠돌다가 노년이 된 오이디푸스, 그의 말년은 어떠했을까요? 아테나이에 도착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테나이여,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그대여, 오이디푸스의 이 가련한 환영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의 오이디푸스는 예전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랍니다.”(159쪽) “그대들은 보기 흉한 얼굴을 보고 나를 멸시하지 마시오. 나는 신성하고, 경건하고, 이곳 시민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자로 왔기 때문이오.”(167쪽) “내가 이리로 온 것은 이 비참한 육신을 그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함이오. 볼품없어 보여도 거기서 생기는 이익은 아름다운 모습보다 더 클 것이오.”(179쪽) 저주와 파멸을 불러오는 자에서 축복과 이익을 가져오는 자로의 변환. 저희는 이 대목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형언 불가능한 고통을 겪고 그 몰락과 풍파에 죽어버리지 않고 살아온 자에게 는 어떤 고유한 감동이나 체화된 지혜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운명의 유희 앞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잘 받아내고 체화해온 자들에게는 말이지요. 난희샘은 <된동 어미 화전가>라는 재미난 이야기도 해주셨는데요. 그런 존재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는, 삶에 대한 선물 같은 신성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속 좁은 고민에서 잠시 빠져나와 어떤 것이 삶의 얼굴일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가 복을 주는 자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니체는 비극의 그런 힘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즐거운 학문> ~251쪽(~275절)까지 읽고 간단히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아이아스>를 읽고 간단히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4학기 에세이 서론을 써옵니다.
전체 1

  • 2021-11-10 21:36
    민호샘이 공지에서 풀어준 오이디푸스의 전환, 비극 이야기를 저는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와 긍정으로 에세이에 쓰고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읽고 ‘선물’로 덥석 받음! 공지든 후기든 글쓰기는 자기 공부이지만 각자 읽고 생각하면서 어떤 계기들로 이어질 수 있어서 그 몫을 각자의 선물로 만들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죠. 주고받음도 그 방향이 정해지지 않는 것 같네요.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것도 그렇구요. 스스로 변환을 위해 열심히 부단히 살아가는 것 외에 왕도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 고민의 속 좁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서 떠나기 위해서! 또 민호샘의 속 좁음을 보고, 거기서 떠나가는 민호샘을 보기 위해! 우리는 누구에게나 무엇에나 심판자의 위치에 설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기로... (누군가 전해준 그대의 판도라 상자를 얼른 개봉하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