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니체와문학4학기4주차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1-11-15 22:26
조회
224
이번 학기 제게는 그리스 비극을 읽은 경험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제 독서 여정을 돌아볼 때 아마 혼자였다면 절대 그리스 비극으로 눈을 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그리스 비극은 옛사람들의 어투에 ‘옳고 지당하신’ 말씀들로 도배된 좀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거든요. 푸코 세미나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현자들의 책을 읽었을 때도 놀랐습니다. 아마 푸코를 어렵사리 공부하면서 얻은 도구가 아니었다면 현자들의 텍스트도 ‘좋은 말씀의 대잔치’로, 그리고 그 좋은 한 말씀들은 ‘자기계발’의 주체를 힐링해주는 문구들로 소비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리스 비극에 대해, 예전의 저와 같은 상식에 머물러 있을까 염려하신 쌤께서는 비극을 슬픈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말씀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제게는 비극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들이 그 유한한 삶을 미학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현장을 생중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 귀에 쏙 들어온 말씀은 ‘유한성’에 대한 정의였는데요. 다들 어떠셨나요? 저는 쌤께서 “유한성이라면 무한성과 비교해 작고 한계가 있다는 것 쯤으로 오해한다.” 하실 때, 제 생각을 읽고 계시나 싶어 살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무한과 유한을 크기와 길이로 이미지화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무한성, 할 때 그 무한을 다른 말로 하면 영원성일 겁니다. 그리스인들의 ‘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겠네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 할 때 그 ‘신’도 다의적이겠지요. 무한성으로서의 신의 죽음과 기독교적 신의 죽음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꼼꼼히 정리해봐야겠습니다. 누가 제게 좀 일러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튼 저는 무한을 실감하는 것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인 것 같아요. 그 무한이 저리게 와닿는 순간은, 쌤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내 삶의 조건을 벗어날 수 없음” 즉 유한성을 자각할 때겠지요.

비극의 인물들은 각각이 그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읽은 <아이아스>가 특히 흥미로웠는데요. 앞의 세 작품보다 훨씬 근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는데, 토론을 하던 중에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아이아스의 이복동생 테우크로스와 아이아스의 죽음을 폄하하려는 메넬라오스의 불꽃 튀는 논쟁이 정말 박진감있었는데, 그게 비극의 대화에 사용되는 ‘안틸라베, 분행대화’라는 장치였다는 것을 민호샘이 알려준 덕분에 알게 됐어요. 그리고 쌤께서 비극의 주인공 중에 유일한 자살자가 바로 아이아스였다고 하셨던 부분에서도요. 자살을 했다는 것이 근대적이라기보다는,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보다 훨씬 복잡한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아이아스는 문제적 인물이었다는데요. 그 시대 무사들의 명예는 전투하다가 죽는 것이었음에도 속속들이 무사의 피였던 아이아스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죠. 이 죽음이 그 시대로서는 문제적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는 자살이 뭐? 자기가 어떻게 죽던지 그건 내 소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불문율은 신이 준 자기 몫의 삶을, 즉 전사는 전사의 삶을 당당히 살아내는 것이 명예였다는 겁니다.

“관습과 윤리가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은 확고한 필연성을 지닌 영원한 법칙과 결합되어 있다는 믿음을 유지”(즐거운 학문46절)시켜주었던 당시, 아이아스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어떤 징후를 읽어내야하는 걸까요?

“나는 배울래/이제 와서 나는, 적을 미워하되/나중에는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미워하고,/친구에 관해 말하자면 언제까지나 친구로 남지 않을 것처럼/베풀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깨닫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의 대사는 삶으로 탁월함을 입증하는 세계에서는 친구도 적이 될 수 있고 적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그리스인들의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쌤은 아이아스의 이 대사를 비극 연구자들에게선 ‘위장발언’이라고 불린다고 하셨죠. 왜 위장 발언일까요? 저도 읽어가면서 아이아스의 최후가 어떨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에게는 적어도 속마음과 행동의 괴리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아스가 자신의 적이었던 헥토르의 칼로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결말이 ‘인과응보’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자기에게 당연히 돌아올 거라 믿었던 무구가 자기보다 전투력이 약한 오뒷세우스에게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인물, 그 분을 참지 못해 광기에 사로잡혀 실수를 범했던 인물,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치는 인물. 아이아스는 전사로서의 탁월함을 삶으로 입증하면서 살아낸 인물이지만 그의 탁월함은 변화하는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습니다. 쌤은 그의 자살을 신에 대한 도전, 반항이라고 하셨죠. 아이아스는 전사의 시대가 가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의 시대가 오는 교차점에 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오딧세우스가 그의 매장을 반대하는 아가멤논에게 “적이었지만 고매했고, 그의 탁월함이 그에 대한 적대감보다 우세하다”고 하면서 설득하죠. 어떤 시대는 전사의 힘이 시대를 대표하는 힘이겠지만 국면이 바뀌면 언어를 다루는 힘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비극의 영웅들, 그들이 말하는 탁월함은 한 점 오점을 남기지 않는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일어난 일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음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한 걸음을 어떻게 걷는가, 그 힘의 적극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오디세우스의 설득력은 자칫 반응적으로 보일 수 있는 아이아스의 죽음을 삶의 긍정으로 승화시킵니다. 이 비극을 우리 시대로 끌고 와 봤을 때 우리는 과연 오딧세우스처럼 아이아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을까. 밝음과 어두움을 극명하게 분리해 사고하는 우리에게 아이아스는 그저, 광기 어린 한 사람의 허무한 자살로 막을 내린 인물, 그렇게 잠깐 소비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죽음이 명예로운가? 를 둘러싼 치열한 질문을 생산해는 사회, 이 사회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질문도 건강하게 펼쳐지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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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6 15:34
    강의를 들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입장과 해석의지들을 소개하면서 소포클레스가 아이아스라는 인물의 쇼킹한 행위를 그려내는 방식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이 작품이 당시 시간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을지 생각해봅니다. 시간에 대한 도전인가? 신들이 부여한 운명에 대한 저항인가? 이것이 명예로운 것인가? 오디세우스의 설득은 타당한가? 등등. 이리저리 뻗어가며 생각을 확장시킨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