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4학기 1주차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1-10-27 08:51
조회
200
절탁S 4학기 1주차 후기

 
  1. 니체의 질문 방식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래도 지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 아닐까? 다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 따라 성인이 된다거나 군자가 된다거나, 자유인, 부처 등 되고자 하는 삶의 모형이 있고 그걸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지요. <선악의 저편> 첫머리는 진리를 향하는 의지, 진리의 가치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진리를 향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은 원하지 않는가?”라고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니체를 잘 알지 못하는 저는 책이 까맣도록 줄과 동그라미를 그리며 읽었는데 잘 정리가 될지 모르겠어요. 그럼, 니체는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일까요? 비진리와 불확실성을 진리의 대용으로 가져오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니체는 진리에 부여되는 ‘가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무엇이기에, 다른 어떤 것과 섞여도 안되는 순수하고 지고한 하나, 그래서 진리에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기원을 부여합니다. 이게 철학의 전제였는데, 니체는 이걸 개구리의 관점을 가진 독단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독단이 아니면 무엇으로 철학이 구성되는 것일까? 니체는 ‘아마도’라는 애매한 말을 던지네요. 진리가 있다가 아니라 어쩌면 이런게 아닐까, 아마도 무엇이겠지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구성되는 철학이 아니라 그 확실성 외부의 가상, 불확실을 통해 인식이 구성된다는 것이죠. 이 가상, 가정과 불확실 같은 비진리가 인식을 구성하는 재료이고 이것은  ‘습관화된 가치 감정에 저항’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 설 수 있다고 말이죠. 진리와 가치를 동일시하는 인식에 대한 질문이 너무나 새로운 곳에 이르게 했습니다. 공부를 하며 ‘질문’을 만들라고 늘 샘이 강조하시는데, 질문이 길을 안내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어요.

2. 아주 많은 영혼의 집합체

우리의 니체 읽기는 스피노자와 함께하기에 재미가 배가됩니다. 스피노자도 인식의 구성을 말하며, 초월항을 두지 않습니다. 니체가 습관화된 가치 감정에 저항함으로써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고 있는데, 윤리학에서 사유가 구성되는 것은 마주침을 통해서입니다. 올바름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는 철학이 아니라 마주치며 구성되는 신체 변용과 정서가 인식의 구성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니체는 아주 많은 영혼의 집합체라고 말하고 있네요. 의지라는 게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 신체, 관념이 복합되어 있고, 또 감정과 사고의 복합체로써 정서가 인식을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정서가 니체에게도 지배적 힘이었네요. 스피노자도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몽유병자가 자신의 의지로 한밤중에 일어나 걸어다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의지에는 욕망과 신체가 늘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여기서 얘기를 더 진행해 우리가 행위를 할 때 ‘주어진 안에서 명령하는 자이자 복종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스피노자의 중요한 개념인 능, 수동과도 연동되는데요, 강의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겪을 것인가?와 함께 설명을 해주셨어요. 부적합한 관념 통해 겪기만 한다면 우리는 늘 복종만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죠. 어떻게 명령하는 자가 되어 능동적으로 겪을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습니다. 윤리학도 예속을 벗어나 어떻게 자유롭게 살까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데, 스피노자에게도 능동적으로 겪는다는 것은 자유를 구성하는 전제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능, 수동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상황과 사건은 늘 있게 마련이고, 그 안에서 능동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기에 명령과 복종이 능동과 수동이 늘 한 지평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실행한다는 것이 바로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두 철학자가 공히 질투, 증오, 소유욕, 지배욕이라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삶을 조건 짓는 정서라고 보고 이런 데서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긍정할 때만 도덕을 넘어갈 수 있다고  일러줍니다.

3. 코나투스와 과잉

이러한 긍정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개념을 코나투스로 설명합니다. 코나투스는 자신을 지속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변화밖에 없다라고 스피노자가 말할 때 우리는 늘 마주침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주침 안에서 자신을 지속하려고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죠. 삶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합니다. 질투 증오 지배욕, 소유욕 이 조건을 넘어 그래도 자신을 지속하기 위해 타인과의 공통감각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니체는 이걸 과잉, 발산이라고 말하는 것이구요. 우리가 타자에 더 이상 손을 내밀 수 없을 때가 죽음인거죠. 제가 나이듦을 사유하는 세미나를 함께하고 있는데, 노년도 나이라는 생물학적 근거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 그걸 노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유지 보존하는 것, 그것이 생이 아닙니다. 존재가 존재를 넘어가고자 욕망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 그게 삶에의 욕구라고 선을 긋네요. 근데 나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도 타자가 필요하죠.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구요. 이에 비해 형이상학은 이데아를 향합니다. 늘 초월항을 상정하고 그에 못 미치는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 그걸 주체라고 보는 것이죠. 이상주의가 허무주의와 한 쌍이라는 니체의 비판을 샘도 강조하셨는데, 결핍으로서의 존재를 가져오는 것, 늘 허무주의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연결하고픈 욕망을 내재하고 있고,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주체라고 한 설명이 오래 남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자 하고, 해야만 하는 이유 그래야 자신이 지속되기 때문이죠.

4. 철학함

니체는 철학함 자체가 힘의지라고 합니다. 그가 어떤 철학을 하는가가 그 사람을 알게해준다고도 말하죠. 결국 철학은 삶의 양식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처럼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는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자처럼 진리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초월항에 두는 것 모두 철학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인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행위가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구요. 그렇기에 인식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선악의 저편>은 1886년에 씌여졌는데, 그 이후부터 니체는 도덕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도덕이 구성되는가 매커니즘을 아는 것, 더불어 신, 정신, 신체 정서가 그 메커니즘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패턴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죠. 그걸 인식하는 게 곧 행위로 드러날 것이니까 말이죠. 예속을 벗어날수도 있구요. 행위와 주체를 분리시키고, 행위를 주체에 귀속시키는 논리가 아니라, 행위와 주체가 동일함을 주요 논지로 한다는 면에서 스피노자든 니체든 의지는 늘 작용이고 활동으로 말해집니다.

이런 니체를 들뢰즈는 ‘시종 함께 살아갈 것을 고민한 철학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야 하는데,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어떻게 함께 겪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말이죠. 스피노자도 정서가 출렁이는 상상에서 출발하여 서로가 합치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래서 상상이라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만이 있다고 말하죠. 좋은 것으로 딱 떨어지는 세계란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니체의 철학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샘도 형식이나 스타일이 모두 다른데 철학이 무엇인지에서 두 철학자가 동일하다고 하셨죠. 철학함이라는 말 앞에 저는 멈춰설 수밖에 없네요. 지난 시간 에세이 개요를 준비하며 저의 기만적인 태도와 욕망들을 주시하라는 요구에 매우 정념이 일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한 소재라는 내적 변명도 해보았구요. 그러나 난 무엇을 명령하고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가? 깨갱. 더 이상 말을 잃었습니다. 후기가 늦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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