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4주차 공지 '윤리적 수단으로서의 철학'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11-06 17:13
조회
174
5주차까지 저희는 자체적으로 공부하고 에세이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과 토론하면 너무 엇나가지는 않겠더라고요. 니체도, 스피노자도, 에세이도 조금씩 정리·발전할 수 있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성교정론》 50절까지, 《선악의 저편》 5장 〈도덕의 자연발생사〉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4장 잠언과 간주곡〉은 각자 읽어 주시고요~ ㅋㅋ). 그리고 에세이는 조금씩 진도가 다 달라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진행해오시면 됩니다. 문제의식을 좀 더 분명하게 설정하셔야 할 선생님들은 서론+개요를 잡아주시고, 본론을 진행하실 선생님들은 거칠게나마 쓰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5주까지는 어떻게든 초고를 낸다는 목적으로 진행해보죠! 간식은 정수쌤께 부탁드릴게요~

 

철학하는 삶은 추구할 만한가?”

간단하게 저에게 인상적인 내용들을 위주로 《지성교정론》과 《선악의 저편》 토론을 정리할게요. 우선 《지성교정론》은 확실히 《에티카》보다는 읽기가 편했습니다. ‘신’, ‘변용’ 같이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개념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아직 인식이 《에티카》에서 다뤄졌던 것만큼 윤리적으로 제기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담담한 말투에서 어떤 절박함 혹은 진지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책 자체는 사후에 친구들에 의해 출판된 미완의 원고이지만, 여러 스피노자주의자들에 따르면, 아마도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한 직후에 저술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제 생각에는 스피노자 본인에게 ‘철학하는 삶’을 고민하는 기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지성교정론》은 스피노자 스스로 자신의 비전을 점검하는 작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 구절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통상의 삶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모든 일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이후, 그리고 나를 우려하게 하고 내가 우려하곤 했던 모든 것들이, 그것들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한에서가 아니고서는 그 자체로는 하등 좋거나 나쁠 것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참된 선(善)이면서 전파될 수 있는 것, 그리고 오직 그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것이 물러나고 마음이 감응될 어떤 것이 있는지, 나아가 일단 발견하고 획득하고 나면 연속적이면서 최고인 기쁨을 영원히 맛보게 해줄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말이다.”

 

스피노자는 세속에서 선(善)으로 간주된 것들에서 부질없음을 느낀 이후 “참된 선”, “연속적이면서 최고인 기쁨”을 찾겠다고 말했죠. 인식(철학)은 그러기 위한 과정이죠. 그런데 저희가 읽은 부분에서도 나오지만, 스피노자는 인식(철학)함 자체가 지복(至福)이라고 말하죠. 스피노자에 따르면, 흔히들 ‘선’-목적으로 간주하고 추구했던 부, 명예, 정욕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우리를 슬픔으로 변용시키기도 하는 ‘불확실한 선’입니다. 이와 달리, 인식으로부터 느껴지는 역량의 증대는, 그러니까 이성의 명령 하에 따라 삶의 질서를 새롭게 짜는 작업들은 우리의 본성에 해가 되지 않는 ‘확실한 선’입니다. 이 작업에서는 불확실한 선이었던 부, 명예, 정욕도 인식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확실한 선’이 됩니다.

《에티카》 4부 서문에서도 스피노자는 각자의 본성에 유익하거나 해로운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말했는데요.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각자가 각자의 삶의 질서와 짜임에 적합하게 선악을 파악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네요.

 

니체적 독해, “읽기는 힘-의지를 반영한다

이번에 《선악의 저편》을 읽으면서 이전과 달리, 니체의 문제의식이 읽힌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저 파편적으로 읽히기만 했던 아포리즘들이 어떤 문제를 그려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3장 〈종교적인 것〉을 읽으면서는 종교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일관된 주장이 읽히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는 자기 극복의 유효한 수단인 것처럼 말하다가도, 어디서는 모든 강자적 힘의지를 압살하는 천민의 힘의지인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토론에서는 니체는 각자의 힘의지에 따라 다르게 접속되는 종교를 그리고, 그러한 서술방식 덕분에 각자의 힘의지에 따라 다르게 읽게 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니체는 종교의 실체라 할 만한 것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강자는 강자적 힘의지에 따라 자기 극복을 시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약자는 약자적 힘의지에 따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종교에 접속합니다. 니체는 각자의 힘의지에 따라 접속되는 종교를 서술했고, 이 모든 것이 곧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니체의 글을 읽는 저희 각자도 저희에게 작동하는 힘의지에 따라 종교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 관점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니체의 글쓰기는 관점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각자는 자기 힘의지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그 결과 각자만의 고유한 위계와 거리감을 형성합니다. 기독교적 해석을 ‘고유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니체는 그것 역시 해석의 한 종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강자와 약자의 해석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전에 최대한 문제적인 해석-힘의지들을 보여줍니다. 윤리적 문제는 ‘더 좋은’ 혹은 ‘선한’ 해석 방식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한 해석을 발명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통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러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거리감을 주파할 수 있는 능력이 요청되겠죠. 어딘가에서 읽었던 “천 개의 눈”이란 표현이 이런 맥락에서 요청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우! 이제야 니체가 재밌게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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