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두 번째 시간(11.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01 13:24
조회
159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시간에는 《깨달음의 혁명》을 읽고 세미나를 했는데요, 저는 에리히 프롬의 서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프롬은 일리치와 자기 자신이 공유하고 있는 근본적 태도이자 접근 방식인 인본적 급진주의(humanist radicalism)에 대해 설명합니다.

“근본적 의심이란 또한 과정이다. 우상에 붙들린 사고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다.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가능성과 대안에 대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진공 상태에서 생기지 않는다.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서 시작한다. 그 뿌리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뿌리가 인간이다’라는 말은 실증적인 것도, 사실을 기술하는 뜻에서 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는 사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힘들을 발현할 가능태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과 더 조화를 이루며, 더 사랑하고, 더 자각하는 힘 말이다.”(에리히 프롬, 《깨달음의 혁명》 머리말 中)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공통체》에서 근본주의(radicalism)와 경제주의에서 ‘몸’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가령 이슬람 근본주의는 개인들의 신체에 극진한 관심을 보입니다.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 그렇죠. 무엇을 먹거나 먹지마라, 몸가짐을 어떠어떠하게 하라,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한다, 하는 등등 신체를 세밀하게 규율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체’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부여된 표식들과 관념들을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근본주의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주의적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은 신체와 욕망을 중시하고 초월적 가치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효율성과 이윤, 풍요에 대한 이상을 욕망과 신체에 덧씌웁니다. 때문에 근본주의에는 자살적 테러리즘이 경제주의에는 사람들을 자살로 이끄는 우울증과 무력감이 징후적입니다.

프롬과 일리치의 급진주의는 다릅니다. 이들은 종교적 우상이건 경제적 우상이건 간에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모든 우상과 싸웁니다. 그러한 우상파괴의 수단이 바로 회의주의입니다. 그것이 이번 텍스트에서 잘 드러났죠. 일리치는 돈, 총, 교사가 합심하여 서구적 삶의 양식을 강제하는 폭력으로서 ‘저개발’ 국가들에 부과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방식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부자가 되는 꿈’이라는 이상을 강매한다는 점에서 자본과 제도화된 종교는 완벽하게 공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제되고 있는 것은 이상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자립적인 삶의 역량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전통과 욕망과 지역적 특성에 맞게 고유한 삶의 양식과 관계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은 파탄이 나고 맙니다. 우리가 편리함과 효율성과 자유로움의 이상을 판매하는 자본, 제도, 전문가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이해와 통제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고 일상을 조직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뿌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때의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의 잠재력을 실현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인간이라는 말은 좀 낡았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이라는 말에는 근대적 전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기 때문이죠. 저는 네그리와 하트의 사유를 빌려서 프롬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을 (관념, 이상, 우상과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신체’라는 말로 지칭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리치는 신체를 옹호하는 사상가인 것 같습니다. 정신과 대립되는, 그리하여 관념적 규정에 굴복하고 마는 ‘육체’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을 자기화하며 부단히 변이하는 중에 있는 과정으로서의 신체. 신체에 입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중독시키고 평준화하고 의존성으로 내모는 관념들과 이미지들, 우상들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관계성들 속에서 스스로의 남다름과 고귀함, 자립성을 계속해서 새롭게 실현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일리치가 교회 바깥으로 나와 낯선 욕망들, 관점들과 접속하며 주어진 정체성들(종교인, 유럽인, 남성, 학자 등등)로부터 부단히 도주하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요.

다음주에는 《깨달음의 혁명》을 끝까지 읽고 지난번과 같이 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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