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세 번째 시간(11.1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06 12:09
조회
175
“소수의 사람만 높은 생산성을 올리도록 대다수를 훈련된 소비자로 교육하는 사회에서, 학교는 그 사회의 핵심 제도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학교교육은 가장 좋은 환경에서조차 사회를 두 집단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 사회 한 편에는 높은 생산성을 내며 해마다 국민 평균치보다 훨씬 큰 폭으로 개인소득의 증가를 기대하는 집단이 있다. 다른 편에는 소득이 증가하기는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작은 폭으로 오르는 압도적 대다수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증가율 차이는 점점 벌어져서 두 집단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이반 일리치, 《깨달음의 혁명》, 사월의 책, 172쪽)

“우리는 무엇보다도 학교가 무엇을 가르친다고 해도 강제적인 학교교육이 필연적으로 소비자사회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소비자사회를 극복할 수 없다.”(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생각의 나무, 87쪽)

우리는 학교제도가 그다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소득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너 높은 질의 교육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은 사실 허울뿐입니다. 대학에 가지 않은 제 선택은 10여 년 전만 해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살 만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자랑할 만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명문대에 못 갈 바에야 돈을 아끼는 게 낫다는 거죠.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학교라는 제도에 부여되어 있는 뿌리 깊은 환상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교육은 혜택이라는 것,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학교 교육은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를 제시한다는 것. 이로부터 우리는 학교제도를 보완해서 출세의 기회를 더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혹은 교육이 기회의 분배의 기준이 되고 학벌이 사회적 지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일리치는 우리의 전제를 뒤집어버립니다. 일리치는 교육이 제공한다고 말하는 혜택, 기회와 신분상승 자체를 의심합니다. 학교 교육이 전제하는 것은 삶은 개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는 조부모 세대에서 대학 졸업장을 지니고 있으며 자유자재로 온갖 전자기기와 복잡한 데이터들을 처리하는 그 후손들까지. 분명 교육은 삶을 발전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리치가 보기에 이러한 적응과 신분상승과 발전이란 ‘존립’(subsistence)의 상실에 다름 아닙니다. 교육의 혜택에 의해 우리의 경제능력은 조금 더 늘어날지 모르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는 늘어난 경제능력을 압도할 정도로 많은 쇼핑리스트를 부과 받았습니다. 가령 지난 토론에서 이야기 나온 것처럼,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일 자체가 막대한 양의 다양한 상품들의 소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경제능력은 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제 결혼을 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교육은 우리에게 소비사회의 평준화된 필요를 교육시키고, 평준화된 삶의 모델을 내면화하도록 합니다. 일리치는 학교교육이 사회를 두 집단으로 갈라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리치의 이 말은 단순히 부의 양극화를 지적하기 위한 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커졌다는 것이기 이전에, 부자 빈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한 필요를 주입받았으며 동일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고, 동일하게 시장에 플러그처럼 꽂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학교교육에 의해 두 집단으로 갈라진다면 그것은 학교교육이 모든 이들에게 ‘발전’에 관한 동일한 환상을 주입한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동일한 욕망을 지닌 양극단의 두 계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일하게 학교교육이 제공하는 혜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고위 공직자의 자녀들에게, 특히 그들의 학벌에 관하여 제기되는 지나친 검증공세와 공정성에 관한 문제제기가 의문스러워졌습니다. 소비사회의 중심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 절망한 사람들은 누군가 책임을 물을 상대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불공정하게 혜택을 입은 공직자 자녀들일까요? 기회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는 학교 시스템일까요? 어쩌면 그 ‘혜택’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배제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일리치는 ‘저개발’이란 근본적으로는 일종의 심리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빈자들이 스스로 풍요나 발전에 대한 강요된 환상들을 파괴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전환하지 않는 이상 ‘저개발’이나 ‘빈곤’, ‘배제’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담론의 질서》(세창 출판사)를 ‘주체의 희소화’까지(~60쪽) 읽고 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현숙샘과 미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2

  • 2020-11-07 14:00
    미영샘 아니고 후남샘입니다^^

  • 2020-11-08 15:21
    배움의 필요와 기획과 주최가 사회 혹은 체제에 달려 있는 한 그 배움을 받는 자는 그 사회 혹은 체제에 적합한 자로 생산되는 것 같습니다. 학교는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은 학교와 그 학교를 만든 코드들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 그렇게 발전과 소비와 노동의 가치를 주입받을 때 이상하게도 '존립'에서는 멀어진다는 사실이 인상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