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네번째 시간(11.17)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15 17:15
조회
130
우리는 진공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는 우리를 생각하도록 하고 말하도록 하는 외부적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경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기보다는 더 자주 어떤 힘들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사이에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잡념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들, 우리의 의식적 의도를 배반하는 우리의 욕망과 충동들. 이 모든 것들은 이성과 의식을 훼방하는 악마들인 걸까요? 아니, 오히려 경험들은 이성과 의식이 인식과 행위의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원인이라는 상식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과 요소들 중에서 의식은 가장 늦게 오는 것이며 가장 수동적인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떠오르네요. 니체의 후계자(?)로서 푸코의 출발점도 여기입니다. 이성과 의식이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면, 인간이 본성적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동물이 아니라면, 인식한다는 건 무엇일까? 푸코는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 스탈린주의 등을 목도하며 마치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듯이 스스로의 예속을 위해 싸우는 동시대인들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요?

“언표들, 담론들은 그 자체로서는 연구될 수 없고, 늘 외부성, 다시 말해 실천과 더불어 연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표는 어떤 의식 주체가 생산한 성찰의 언어적 표현이 아니다. 언표는 실존하는 것이며, 사건이다. 이상의 것이 푸코 저작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요컨대 언표가 실존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은 도대체 무엇일까? 언표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이 복잡한 관계망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디디에 오타비아니·이자벨 브와노, 《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열린책들, 28~29쪽)

《담론의 질서》 본문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담론의 무겁고 위험한 물질성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한술 더 떠서 《미셸 푸코의 휴머니즘》을 쓴 디디에 오타비아니는 언표가 실존한다고 말합니다. 언표가 사건이라고도 말하죠. 담론은 물질적이며 언표는 실존한다. 그리고 언표와 담론의 존재방식은 사건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저는 이것이, 언어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작동한다’는 뜻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진공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령 ‘광기’라는 똑같은 단어는 어떠한 조건 속에, 어떠한 지식들과의 관계 속에 놓이고 어떠한 정치적 조건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광기라는 단어는 지시작용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거나 비정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명 특정한 행위나 태도나 성향 등등을 보이는 개인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기와 정상성과 질서와 바이러스에 관해 말하는 복잡한 계열의 담론들의 작용 이전에 광기 그 자체는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 어떤 특정한 병적인 성향이 있고 그것을 유발하는 병리학적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학적 체계 속에서 해석될 때와 정신의학적 체계 속에서 해석될 때 우리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언어는 세계를 지시하거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담론들의 복잡한 작용 속에서 세계는 출현합니다. 언표는 해석하고 평가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출현시키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해석은 우리의 주관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적 규칙성 속에서 작동됩니다. 푸코가 《담론의 질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규칙성들이죠.

“사람들이 말한다는 사실, 그들의 담론이 무한히 증식 된다는 사실 안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하여,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세창출판사, 18쪽)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걸까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어떤 그물에 붙들려 있다고,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것을 펼치는 걸까요? 그보다는 제 생각에 푸코는 사유를 한다는 것 자체의 위험성과 혁명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은 정치적인 이념들에서만 작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의심해본적도 없는 구분들, 범주들, 과학들 사이에도 권력과 저항은 매번 작동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전제를 의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질문들을 구성할 때, ‘담론이 무한히 증식된다는 사실 안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것’이 작동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진실을 구성하고, 또 그로부터 기존의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삶의 방식들을 구성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겠죠.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 특강이 있습니다. 《담론의 질서》를 끝까지 읽고, 각자 질문을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전체 1

  • 2020-11-17 16:34
    광기와 정상성과 질서와 바이러스에 관해 말하는 복잡한 계열의 담론들의 작용 이전에 '광기'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광기 뿐 아니라 '나이'도 '성'도 그 어떤 정체성도 어떠 어떠한 담론체계들의 이웃관계 안에서 그 효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정체성을 실체화하지 않고 거기에 매이지 않을 틈을 확보하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언표가 사건이고 담론이 물질성을 갖는다는 아리송한 말을 곱씹어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