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다섯번째 시간(11.2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23 12:00
조회
144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찬양되어야 하고 비난 받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는 학자들의 판단은 올바르다. 그러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지금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학자들의 판단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니체, 《아침놀》, 책세상, 21쪽)

우리는 말해진 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 ‘담론의 질서’라는 묘한 개념을 통해 푸코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표와 담론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초월적 시선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우리는 분명 ‘자유롭게’ 온갖 것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분명 모든 것에 관해 모든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말한다는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는 이해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죠.

예를 들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앎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세계를 근대적 시선으로 볼 때 내부와 외부, 개체와 전체, 인간과 비인간 등등의 경계를 넘어가는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은 배제됩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미신적 환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지만, 그러한 인식의 발전은 오직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자연을 대상화하는 특정한 시선을 전제할 때에만 발전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언젠가 미래 세대는 지금 우리 시대를 세계와 삶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를 했던 오류의 시대라고 규정하게 될지도 모르죠. 물론 그것도 그들의 조건에 입각한 인식이겠지만요.

물론, 우리의 담론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푸코는 담론이 희박하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희박함은 충만함을 전제하지 않는 희박함입니다. 그러니까 담론은 애초에 해독해야 할 세계에 투명하게 절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표는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문제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를 출현시키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말하기의 조건’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시대에 어떠한 앎이 진리로 출현하게 되는 조건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로부터 시대적인 자명성을 전복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담론적 배치에 균열을 내고, 시대적 전제로부터 달아나는 질문들을 구성하는 것. 비판과 계보학. 이러한 과정은 우리를 참된 세계에 도달하게 해주지는 않겠지만, 주어진 조건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일리치는 푸코가 말한 비판과 계보학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필요의 동물, 다시 말해 제도나 시장에 의해 정의된 필요들을 충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경제학적 전제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 저개발 국가를 발전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말하는 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진보의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현대화된 가난’, ‘역생산성’, ‘궁핍을 가져오는 부’ 같은 개념들을 만들어냈죠. 중요한 것은 단 한 번도 일리치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가치의 구도 안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는 늘 기존의 담론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리치는 우리가 오직 자신의 질문의 깊이만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깨달음의 혁명》은, 말하자면 일리치의 비결(?)을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어떻게 그는 사유할 수 없는 것들을 사유하고 질문할 수 없는 것들을 질문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타자들에게 귀 기울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깨달음의 혁명》에서 일리치가 줄곧 ‘타자에게 귀 기울여라’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뉴욕에 이민온 푸에르토리코인들에 대해 매우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챕터에서도, 또 언어의 핵심에는 침묵이 있다고 말하는 챕터에서도 그런 부분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타자에게 귀 기울인다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구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타자를 구원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을 직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그리고 그들을 우리의 가치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버리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하도록, 시대적 담론의 배치 속에서 배제되고 흩어져버리는 목소리들이 증폭되도록 하는 것이 타자에 귀 기울이는 일일 것입니다. 일리치는 바티칸의 엘리트 사제가 될 기회를 버리고 뉴욕 할렘으로, 또 라틴 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개발’이라는 말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들의 좌절과 기쁨을, 이념적으로도 경제적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거부와 저항의 몸짓들을 목도했을 것입니다. 일리치는 그 주변화된 웅성거림들로부터 배웠고, 그들을 위해 말하거나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와 겹쳐지도록 했습니다.

공지가 너무 늦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3강까지 읽고 각자 질문거리와 함께 이야기할 거리들을 만들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난희샘과 훈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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