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여섯 번째 시간(12.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29 16:33
조회
142
이번 주에는 푸코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1~3강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강의는 1970~1971년에 푸코가 콜레주드프랑스에 취임한 후 처음으로 했던 강의입니다. 여기서 푸코는 자신의 비판적/계보학적 방법론을 상세하게 풀어서 보여줍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를 역순에 가깝게 읽어왔습니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안전, 영토, 인구》를 읽고 그 다음 《주체의 해석학》과 《담론과 진실》을 읽은 뒤 초기의 《담론의 질서》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로 돌아왔죠. 순서대로 읽어도 좋았겠지만, 후기 강의록들을 먼저 읽고 돌아오는 것도 재밌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푸코의 인식론 내지는 해석의 방법론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강의들을 복기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가령 새삼 저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푸코가 단지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옮아가는 역사적 과정을 기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일종의 진실진술체제로 작동하게 되고 경제학이 인간의 활동을 인식하는 과학적 틀로 작동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그때 푸코가 왜 갑자기 신자유주의를 분석해야 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푸코가 과거로부터 점점 현대로 오고 있는 것인가? 자기 시대와 사회의 현재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무언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하는 의문들이 들었지만 내용을 따라가기 급급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푸코는 ‘신자유주의’라는 어떤 학문적 흐름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인식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제학은 단순히 ‘경제’라는 실체를 다루는 학문도 아니고, 통치에 제약을 걸기 위한 장치도 아니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평가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가능성의 격자를 형성한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었던 것 같고요.

푸코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란 대처나 레이건 같은 정치인들이 채택한 경제정책 자체도 아니고, 특정한 시스템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도 아닙니다. 물론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도 아니죠. 푸코적으로 볼 때 신자유주의는 담론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과 더불어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평가하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가성비와 효율의 관점에서 자신의 활동들을 평가하고, 자신의 삶을 투자와 경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도주로를 마련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리 게임 안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경제 체제로 실체화한 뒤 그에 대적하는 (복지국가 같은) 새로운 시스템을 설립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떠한 전제들 속에서 통치가능하게 되고 있으며 우리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거기에 동원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다르게 주체화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지가 여느 다른 배제 체계만큼 깊숙이 역사적인 것은 아닌지, 진리의 의지가 다른 체계처럼 근본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닌지, 진리의 의지가 다른 체계처럼 근본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닌지, 진리의 의지가 다른 체계처럼 모든 제도망에 의거하고 다른 체계처럼 모든 제도망에 의해 끊임없이 재개되는 것은 아닌지, 진리의 의지가 다른 담론들은 물론이고 다른 일련의 실천들에 행사되는 구속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지. 요컨대 어떤 현실 투쟁과 어떤 지배 관계가 진리의 의지에 걸려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19쪽)

푸코는 인식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 것이겠지만) 윤리적 태도의 차원에서도 지극히 니체주의자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렇게 느낀 것은,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푸코가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아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로 제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삶이다, 그것은 비정상이다, 인간은 어떠어떠한 도덕에 따라 살아야 한다, 등등. 이런 ‘진실’들은 대개 폭력적으로 주어집니다. 실제로 물리적 폭력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진실들이 우리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진실들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도록 해주지 않을 때, 계속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도록 하고 욕망들을 죄악시하게 만들거나 원치 않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부과된 진실들의 ‘진실성’을 의문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괴물을 닮게 됩니다. 마치 전근대적 관습들과 사고방식들을 미신적인 것으로 비하하고 근대적, 과학적, 공리주의적 관점들을 도그마화하는 상식적인 지식인들처럼, 독재와 맞서 싸운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의 진보를 실체화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자의적이고 억압적인 앎에 과학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앎을 대립시킴으로써 자기 영토에 갇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더욱 진보적인 진실로 자기 영토를 형성하고 나면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괴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진실 일반의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부정한 진실이 그 조건 속에서 진실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믿는 진실 또한 그들이 놓인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진실일 따름입니다.

니체와 푸코가 택하는 방식은 ‘진리’의 자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푸코는 진리의 의지가 역사적이며, 근본적으로 자의적이고, 특정한 제도망에 의거하며 그것과 더불어 재생산되고, 진리의 의지가 구속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진실에 대해서 그것의 진실성을 의문에 부치는 방식의 비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왕의 자리를 꿰차고 있던 사기꾼을 몰아내고 진정한 왕을 옹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왕이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왕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그 왕을 왕으로 만들어주었던 앎과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리의 역사성을 묻는 것이죠. 이것은 진리를 비판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과감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비판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부과된 진실들의 허를 찌를 수 있습니다. 가령 일리치가 이념과 정치적 색깔을 막론하고 산업화 이후의 모든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풍요의 관념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그 풍요란 도대체 어떤 풍요이며 누구의 풍요 인지를 물을 때 그러한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기존의 진실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제기할 수 없었던 질문을 제기하고, 이전에는 알아보지 못했거나 평가절하했던 역량들을 고취시킬 수 있게 됩니다.

진리의 자리를 두고 미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 자체를 없애고 문제가 제기되는 영역 자체를 옮겨버리는 것. 이것이 괴물이 되지 않으면서 괴물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싸우는 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니체와 푸코의 철학이 다른 철학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존의 철학들과는 조금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인식을 참된 것을 향한 여정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식 ‘활동’이 지닌 위험성을 활성화합니다. 질문하고, 비판하고, 이탈하고, 우연한 마주침들을 긍정하며 주체를 예상치 못한 곳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위험한 힘을.

다음주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4, 5강과 '니체에 관한 강의'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미현샘과 지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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