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일곱번째 시간(12.08)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2-06 23:23
조회
161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서 담론의 생산을 통제 · 선별 · 조직 · 재분배하는 일련의 절차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담론은 언제나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담론이 희박하다는 것은 첫째로 우리가 모든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것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는 반면 다른 것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것들이 말해선 안 되는 것으로 터부시된다거나, 누군가가 어떤 앎에 접근할 수 없도록 배제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에 대해서 영양학적인 앎을 구성하고 그것을 과학으로 승인한다는 것은, 음식에 대한 전통의학적인 앎들은 배제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우리는 음식을 영양소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 ……. 이런 식의 분류는 음식을 기운에 따라서, 또 인간의 체질과의 관계에서, 절기에 따라서 나누는 식의 분류를 배제합니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유기물들이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그에 대해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더 많은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지식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대상들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계열화하고 그 대상과 주체가 관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담론의 질서들이 있는 것이죠.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게 하는 절차들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니체가 ‘인식 자체는 없다’고 말할 때, 이는 즉자의 인식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폭력 속에 인식 활동이 전개하면서 실행해야 할 불변의, 본질적이고 사전적인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인식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주체-객체 관계(그리고 그 관계의 모든 파생물, 이를테면 선험, 객관성, 순수 인식, 구성하는 주체)가 사실상 인식의 토대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난장, 292쪽)

이번 시간 토론 중에 인식이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푸코는 니체를 인용하며 인식이 발명되었다거나 인식이 없다거나 인식의 배후에는 인식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때 인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식은 지각과, 또 우리가 생각이나 숙고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걸까요? 제 생각에 우리가 니체나 푸코를 공부할 때 이런 구분들은 불필요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특징은 인식 바깥에서 인식의 메커니즘에 대해 논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올바른 인식이란 무엇인지를 밝히거나 철학적인 사유와 대중적인 사유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따지거나 인식 내부에서 인식의 프로세스나 메커니즘을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푸코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인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담론의 질서》에서 언표나 담론에 관해 말한 것과 같은 궤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인식은 희박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인식 그 자체란 없습니다. 인식 활동이 실행해야 할 불변의, 본질적이고 사전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참된 인식이란 대상과 관념의 합치이며 인식에 부여된 궁극적 목적은 그러한 합치라는 생각, 인식은 이성의 빛으로 세계를 밝고 투명하게 비춘다는 생각, 인식이 행위에 앞서며 우리가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 혹은 전문적이고 박식한 앎으로 무장하면 어떤 문제나 사건으로부터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과 행위를 위한 참된 지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이 모든 상식적인 생각들은 주체-대상의 관계를 전제합니다.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식에 앞서 우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소멸하며 서로 뒤섞이는 세계와 그 국면들 너머에 변치 않고 지속되는 본질을 지닌 대상이 있으며, 우리가 이성을 발휘하여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으면 그 참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또 인식의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에 의해서 매순간 영향을 받으며 외부와 분리될 수 없이 얽혀 있으며 이러저러한 욕망들에 휘둘리는 우리의 신체 바깥에 마치 세계를 제 3자처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저 이해하고자 할 뿐인 정신(이성)이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당연히, 푸코와 니체는 이러한 전제를 부정합니다. 푸코가 구조주의자로 간주되곤 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구조주의자들이 ‘주체 없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푸코 역사 ‘주체 없는 사유’라는 점에서만큼은 구조주의자들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푸코에게는 주체가 없다기보다는, 주체가 미리 주어져 있지 않죠. 그에게 주체란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입니다. 특정한 시대적, 정치적, 물질적, 담론적 조건 속에서 주체는 주체로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주체가 아니라, 계속되는 주체화의 과정만이 있습니다. 이는 인식에 있어서 주체의 초월적인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바깥에서, 신체를 초월해서 세계의 본질을 조망하는 신적인 주체는 없습니다. 주체가 없다는 것은 대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체의 인식에 앞서서, 그러나 주체에 의해 해독되기를 기다리며 본질을 감추고 있는 고정불변하는 대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이 세계 ‘안에서’, 우리를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는 우리 자신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합니다. 아니, 우리가 인식을 한다기보다는 그러한 ‘관계들의 망’ 속에서 인식은 발생하고, 또 그러한 인식과 더불어 관계들의 망은 변화합니다. 주체도, 객체도, 인식도 없습니다. 부분과 더불어 전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들의 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식은 무엇일까요? 니체에 따르면 인식은 그 자체로 오류이고 가상입니다. 그러나 이때 오류나 가상이라는 말은 진리나 실재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니체에게 인식은 그 자체의 형식과 한계 때문에 오류인 것이 아니라(이때 오류는 참된 것의 결여입니다) 인식이 언제나 ‘인식’이 아닌 것들, 인식에게 낯선 것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니체는 ‘논리적인 것’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으며, 그러한 믿음의 밑바닥에는 “느끼는 주체와 관계된 즐거움 또는 고통의 감각”(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18절)이 깔려 있다고 말합니다. ‘논리’의 바탕에 있는 것은 충동, 본능, 감각이지 합리적 이성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죠. 인식은 그것이 그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체, 본능, 충동, 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오류입니다. 이처럼 인식이 오류라고 말할 때 니체는 (칸트나 쇼펜하우어와 달리) 인식 ‘너머’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인식이 오류라고 말할 때 니체와 푸코가 부정하는 것은 인식 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순수성, 자명성, 독자성입니다. “인식을 방해하는 동시에 인식을 구성하는 것, 그것은 인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286쪽) 인식은 ‘인식’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푸코가 말하듯, 니체는 “인식의 형식과 인식의 법에서 인식에 대한 욕망을 해방”(49쪽)하고자 합니다. 니체는 진리와 인식의 함축관계를 해체함으로써 인식 저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식의 저편으로 간다는 것은 인식을 폐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진리와의 함축관계로부터 벗어나서 볼 때 “인식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49쪽)을 뜻합니다. 우리는 더 잘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방식이란, 단지 상대적으로 다른 관점을 취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조건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의 자리에 올리는 앎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참 거짓을 출현시키는 조건 자체를 질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질문의 틀 자체를 부수고 재구성하는 과정. 이 과정을 계속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되고 관리될 수 없는 혁명적인 실존의 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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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1 08:36
    인식한다는것은 살아간다는 일이다. 우리가 더 잘 인식한다는게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일, 이는 인식한다는 조건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야 전혀 다른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잘 읽었습니다~그럼 인식과 관념은 어떻게 다를까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