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5 아홉번째 시간(12.2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2-21 10:46
조회
205
푸코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도입부에서 ‘진리의 의지’의 역사를 쓰겠다고 자신의 목표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때 푸코가 말하는 역사란 진리의 의지가 탄생하고 성장하고 발전해온 과정을 밝히는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푸코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의지의 신성한 기원이 아닙니다. 푸코는 진리(혹은 진리의 의지)가 어느 시점에, 어떠한 필요에 응하여,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탄생을 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어떠한 과정을 따라 발전해왔는지를 알고자 하지도 않죠. 어떠한 단절과 불연속 속에서, 어떠한 힘들과 더불어 진리의 의지가 발생했는지를 밝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의 효과는 실체론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습관이 되어 익숙해진 것들, 가령 객관성, 진정성, 진실, 진리, 투명성 등등을 우리는 그 자체로 본질을 내장하고 존재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라고 여깁니다.

이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힘들입니다. 마치 동정의 도덕, 이타주의적 도덕을 절대화하는 사람이 거기에 깃든 생성에 대한 부정(=원한)을 간파해낼 수 없듯이. 또 제도교육이 제시하는 이상(평등과 진보)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상식적인 근대인이 평균적인 소비자를 생산해내는 ‘학교화’를 낯설게 볼 수 없듯이. 결국 푸코의 작업은 (일리치가 말하는) ‘감상성의 결핍’이라는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믿음, 감상주의, 상식에 질문을 던지는 만큼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은, 무언가를 믿고 있는 자에게는 그 이상에 늘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테지만 자기 믿음과 싸우는 자에게는 늘 새로운 마주침과 질문들과 고민거리들로 충만한 것일 테니까요.

“α. 그러나 서구의 거대한 과학적 물음들이 형성된다.
―어떤 조건 속에서 λόγος는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로 언어활동은 존재에 참여할까?
β. 진리는 효과이길 그치고 조건이 된다.
기원전 6세기의 사유에서, 참은 이런 배치의 일반적인 효과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참은 조건이 된다. 진리를 보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훌륭한 법을 갖고, 교육은 본성에 합류하며, 성문화된 법은 λόγος에 부합하고 λόγος는 본성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의미론적 장의 주파는 진리와 존재로부터 가능하다.
γ. 의미론적 장은 제도로서, 사회적 절단으로서 분리된다: 철학, 과학, 진리 담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권력을 창설하며,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장은 권력으로부터 조직됐다.”
(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난장, 217쪽)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시인들에게 있어서조차도 여전히 ― 단어의 강한, 공인된 의미에서의 ― 진실한 담론, 우리가 존중심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진실한 담론, 우리를 지배하므로 우리가 복종해야만 하는 진실한 담론이란 공식적인 의례(rituel)에 의거해 정당한 권리를 갖는 사람에 의해 발화된 담론이었다. 진실한 담론은 정의(justice)를 말하는 담론, 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배분해 주는 담론이었다. (…)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후, 최고의 진실은 이미 더 이상 이전에 담론이 그런 것, 또는 담론이 수행한 것 안에 거주하지 않았다. 이제 담론은 자신이 말하는 것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진실이 언표 행위라는 의례화되고 효율적이며 정확한 행위로부터 언표 자체 곧 그 의미, 형식, 대상, 자신의 지시체와 맺는 관계로 옮겨 가는 날이 왔던 것이다.”(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세창출판사, 27쪽)

‘진리는 효과이길 그치고 조건이 된다.’ 이 한 마디가 많은 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진실한 담론이 언표 행위가 아니라 언표 자체의 의미, 형식, 대상, 자신의 지시체와 맺는 관계로 옮겨 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진리는 ‘고귀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이 되었습니다. 진실의 힘은 그것을 소유하는 자와 그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서 발화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나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제 3자에 의해 목격된 것, 특정 주체나 집단이 아니라 사회체 전체에 의해 발화되는 것이 이제는 진리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현숙샘께서 토론 중에 《안전, 영토, 인구》를 언급하시며 푸코가 거기에서 ‘국가 바깥으로 나가기’를 시도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는 ‘진리의 의지 바깥으로 나가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감상주의와 싸우기 위해 푸코가 취하는 전략은 특정한 영역이나 분과학문 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푸코는 철학, 사법재판, 화폐와 경제, 법 등 다양한 사회 영역들과 담론 장들을 주파하면서 진리의 의지의 복수적(複數的) 기원을 밝힙니다. 이러한 탐구들이 매우 흥미진진했죠. 저는 그 중에서도 이번 주에 읽은 솔론의 개혁 부분이 재밌었습니다. 솔론은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권력을 배분함으로써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분할을 수립합니다. 그리하여 정치를 공적이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민주적인) 영역으로 성립시키는 한편 경제를 사적이고 우연적인 영역으로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조금 무리한 비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분할은 작동중인 것 같습니다. 가령 저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는데,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시장경제’라고 말할 때 그 ‘시장’이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분명 전통시장은 아닐테고... 주식 시장(거래소)을 말하는 걸까요? ‘시장’이나 ‘경제’ 같은 말들은, 마치 다른 모든 사회적 영역들이나 주체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교환이 이루어지고 경제적 논리에 따라 돈만이 오고가는 장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제적 자명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죠. 그래서 우리는 개인들이 빚에 시달리는 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그저 우연이거나 개인이 어떤 질문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입니다.

푸코의 이야기로부터 좀 벗어난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특정한 언표 주체나 언표 행위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진리의 힘을 발휘하는 언표, 그러한 담론과 담론들의 계열 또한 ‘권력으로부터 조직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배제를 낳는 놀라운 기계장치로서의 진실의 의지”(푸코, 《담론의 질서》, 세창출판사, 32쪽)를 알아보는 것. 진실의 의지는 합리적 앎의 영역을 구성함으로써 울퉁불퉁한 잡음들을 배제하고,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의 영역을 구성하면서 그것이 권력과 맺는 관계를 은폐합니다. 물론, 시대마다 각자가 놓인 조건마다 ‘진실의 의지’가 작동시키는 배제의 기계장치는 상이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습관화된 ‘믿음’으로부터 계속해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는 것이겠죠.

 

공지가 많이 늦었습니다. 내일은 12강과 〈오이디푸스의 지식〉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줌으로 채운샘의 강의가 진행됩니다. 이번 학기 (에세이 발표를 제외한) 마지막 시간이니 다들 필참해주시고, 채운샘의 마지막 강의이니 이번에 푸코를 읽으며 풀리지 않았던 지점들을 꼭 준비해 와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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