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2.12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2-06 20:19
조회
161
200212 니나노 공지

 

<가쇼의 문화>는 ‘가쇼(1916~1950)’라는 라쿠고가에 대한 비평입니다. 안고는 이전에 <청춘론>에서 미아모토 무사시에 대해 비평했던 것처럼 가쇼를 평합니다. <가쇼의 문화>가 발표된 것은 가쇼가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였는데요, 요절인만큼 가쇼를 아까워 하는 평도 많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지 죽었다는 것만으로 칭송받는 꼴은 안고가 보아넘길 수 없는 일이었죠(?!). 안고는 가쇼를 재평가하는 글을 쓰는데 그 톤이 바로 죽은 고인에 대한 평 치고는 무척 날카롭습니다. 안고는, 가쇼가 새로운 라쿠고 형식을 보인 것은 인정하지만 사실 그만한 천재는 널렸다고 하지요.

라쿠고는 ‘만담’이라기에는 형식이 갖춰져 있고 그렇다고 정극이라기에는 너무 가벼운 예술입니다. 보통 한 명이 나와서 오프닝 멘트와 본론, 그리고 클로징 멘트로 이루어진 공연을 하지요. 형식이나 몸짓은 어느 정도 약속되어 있고, 만담처럼 너무 비꼬거나 밑도끝도 없이 웃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조금 웃긴 뉴스 같은 형식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러한 라쿠고도 사실 민중 예술이었습니다. 형식이 갖춰지고 거기에 미학적 해석을 담은 것은 후대의 일이지요. 안고는 이러한 라쿠고의 태생은 깡그리 잊고 쓰(通)라든가 스이(粹) 같은 것을 찾고 있는 세태를 비판합니다. 형식에 갖춘 라쿠고는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라쿠고, 만담 같은 것에서 형식을 찾고, 저건 정도이고, 이건 사도(邪道)라고 구분지어봤자, 어차피 처음은 모두 사도였다는 것. 이것을 안고는 기억하라고 합니다.

 
라쿠고 배우가 가쇼를 가리켜 만담가라고 하며 사도(邪道)인 라쿠고를 구사한다고 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천만부당한 일이다. 라쿠고에 사도 따위가 있기나 한가? 라쿠고 그 자체가 사도다.

(...)

메이지, 다이쇼, 쇼와라는 터무니없이 비약적인 시대를 지나며 옛 틀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하면서 대중 속에 살아 남으려 억지에 억지를 쓰면서도, 쓰(通, 통하는 멋 –역자)와 스이(粋, 순수한 멋 -역자)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대중 속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각인인 셈이다. 대중 속에 살아 있는 예술은 항상 시대적이며 세속적이고 저속하여, 스이와 쓰와 같은 시대로부터 뒤떨어진 반푼이들에게는 당연히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쇼는 라쿠고를 소위 예술적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사도를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쇼는, 배우로 치면 너무 잘생기고 개성 넘치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랄까요. 안고는 가쇼가 그 외모 덕분에 뜨기도 했고 또 라쿠고의 새 지평을 열기도 했지만 그 외모 이상을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가쇼는 일류의 자리를 바랄만한 재능은 없엇기에 아까운 나이에 갔지만 적당하게 죽을 때 죽었다는 무서운 말도 하지요. 지금 이런 평을 한다면 인터넷이 정말 떠들썩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오싹하기도 하고요. 안고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한곳에 고착되는 순간 썩어버린다는 것을, 언제나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킨고로의 대머리는 사랑스럽고 영화에서도 적당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며 삼류 배우다운 웃긴 역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쇼의 얼굴은 영화에 적당하지 않다. 웃음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요괴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그의 얼굴을 영화에 살리려면 일류의 천재적 기질이 필요하다. 가쇼는 그러한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영화에서 살리는 천재성이 있다며 그건 이미 일류 중의 일류의 예술가라는 뜻인데, 가쇼에게 이를 바랄 수는 없다. 아깝긴 하지만 그는 적당한 때에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가쇼의 문화>는 조금 더 읽을 내용이 남았습니다. 가쇼에 대한 이 냉정한 비평의 톤이 라쿠고를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는 ‘꼰대’들에게 적용될 예정인데요 그 서늘함을 다음주에 느껴보도록 하지요^^

<가쇼의 문화> 다음은 <익살에 기대어>를 읽을 예정입니다.

 

12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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