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2.19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2-14 22:54
조회
134
200219 니나노 공지

 

<익살에 기대어(茶番に寄せて)>는 제목부터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는 글입니다. 차반(茶番)은 ‘茶番狂言’의 준말입니다.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익살극’ 정도의 의미로, 막간을 이용해 꽁트를 펼치는 극의 한 요소이지요. 이 글에서 안고는 익살극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개콘에 대한 에세이 정도 될까요? 저번에 번역했던 ‘가쇼 문화’에서 라쿠고를 다룬 것도 그렇고 안고는 웃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안고는 익살극을 ‘그냥 웃고 마는 거지...’하고 흘려보내지 않고 안고 답게(?) 분석합니다. 그에 따라 웃음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는 야유하는 풍자입니다. ‘모범생인줄 알았는데 불량배였다 / 경찰인줄 알았는데 도둑이었다’ 식의 반전에 기대어 웃음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가끔 조폭영화 보면 모범적인 경찰청장이 사실 조폭 두목이나 그 뒷배고...뭐 그런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안고는 이런 익살극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은 불합리와 모순을 단지 상식의 차원에서 봉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고는 불합리와 모순을 끝까지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시도 끝에 나오는 웃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익살이라고 합니다.
<청춘론>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안고는 ‘진검승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에 맞섰던 무사시노의 검은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자신은 얼마나 약한지 철저히 알았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객기를 부렸다면 무사시노는 살아남기 어려웠겠죠. 익살 역시 대장을 간단하게 부정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영역으로 환원해 버리면 당장은 웃기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 거짓을 통한 웃음이기에 진실이 드러나면 바로 허탈함으로 번질 공산이 큽니다. 왜냐하면 불합리를 합리적인 양 가장해 웃어봐야 현실의 불합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이 안고가 생각하는 ‘풍자와 야유’의 약점 아니었을까요. 반면 ‘제대로 된’ 웃음은 대상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합니다. 불합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느낌을 바꾸는 익살극이야말로 진정한 웃음을 선사한다고 말입니다.

 
 道化の国では、警視総監が泥棒の親分だったり、精神病院の院長先生が気違いだったりする。そのとき、警視総監や精神病院長の揶揄にとどまるものを諷刺という。即ち諷刺は対象への否定から出発する。これは道化の邪道である。むしろ贋物なのである。
正しい道化は人間の存在自体が孕んでいる不合理や矛盾の肯定からはじまる。警視総監が泥棒であっても、それを否定し揶揄するのではなく、そのような不合理自体を、合理化しきれないゆえに、肯定し、丸呑みにし、笑いという豪華な魔術によって、有耶無耶のうちにそっくり昇天させようというのである。合理の世界が散々もてあました不合理を、もはや精根つきはてたので、突然不合理のまま丸呑みにして、笑いとばして了おうというわけである。
だから道化の本来は合理精神の休息だ。そこまでは合理の法でどうにか捌きがついてきた。ここから先は、もう、どうにもならぬ。―――という、ようやっと持ちこたえてきた合理精神の歯をくいしばった渋面が、笑いの国では、突然赤褌ひとつになって裸踊りをしているようなものである。それゆえ、笑いの高さ深さとは、笑いの直前まで、合理精神が不合理を合理化しようとしてどこまで努力してきたか、そうして、到頭、どの点で兜を脱いで投げ出してしまったかという程度による。
익살의 세계에서는 경시청 총감이 도적무리의 두목이거나, 정신병원 원장이 미친 사람이거나 한다. 이때 경시청 총감과 정신병원 원장에 대한 야유에 머무는 것을 풍자라고 한다. 즉 풍자는 대상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익살의 법칙에 어긋난다. 차라리 가짜다.
제대로 된 익살은 인간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불합리와 모순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경시청 총감이 도둑이어서 그것을 부정하고 야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불합리 자체를 합리화할 수 있는 까닭에 긍정하고 통째로 받아들여 웃음이라는 호사스러운 마술로 유야무야하는 사이, 고스란히 승천시켜 버리려 하는 것이다. 합리의 세계가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던 불합리를 어느새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느닷없이 불합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웃어넘기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익살은 합리정신의 휴식이다. 어느 지점까지는 합리의 법칙으로 어떻게든 잘 풀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며 이를 꽉 물고 떨떠름한 얼굴로 겨우 버텨왔던 합리정신이 웃음의 세계에서 갑자기 달랑 훈도시 하나만 걸치고 벌거숭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웃음의 높이나 깊이는 웃음 직전까지 합리정신이 불합리를 합리화하려고 어디까지 노력했는가, 그래서 결국 어느 지점에서 가면을 벗고 도망가 버렸는가, 그 정도에 따른다.

 

다음 시간은 [익살에 기대어] 남은 부분과 [나는 누구?] 진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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