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2.26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2-21 19:32
조회
139

익살 작가는 누구를 편애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또 누구를 미워하는 일도 없다. 단지 긍정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상도 없는 목석인 것이다. 불쌍한 고아를 동정하지도 않고 억울한 죄인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실연당한 놈을 돕지 않고 가난한 놈에게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실연당한 놈은 지독하게 실연당할 뿐이고 고아는 큰엄마에게 끝까지 맞는다. 그런가 하면 실연당한 놈이 연적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읊고 죽었던 놈이 꽃다발 사이로 목을 내밀고 갑자기 관 값을 깎기 시작한다. 달리 죽은 자와 연적을 위로하는 정신이 있을 까닭이 없다. 세상만사 그저 삼라만상의 긍정 외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떠한 불합리도 모순도 그저 긍정 하나뿐이다. 해결도 없고 해석도 없다. 해결과 해석에 맞추려 하면 웃음의 세계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문득 익살을 생각하다(茶番に寄せて )> 마지막까지 읽었습니다. '寄せて'는 '기대다'라는 말인데, '~에 대하여'라고 하면 어딘가 본격적이고 그렇다고 '~생각하다'라고 하면 뭔가 깊이 생각하는 느낌이 들어서 '문득'이라는 부사를 넣어 보았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익살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 글이 바로 '문득 익살을 생각하다'인 것입니다.

안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익살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웃음을 슬픈 사람을 위로하고 활력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슬픈 사람에게 억지로 기쁜 일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익살'이고 '개콘'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웃음이 정말 도움이 될까요?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슬픈 일들이 있을텐데 말입니다. 안고는 그런 웃음은 '해결과 해석에 맞추는' 억지스러운 웃음이라고 봅니다. 안고가 제안하는 웃음의 정면승부는 나를 슬프게 하는 대상을 그 자체로 보게 하는 웃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기쁨을 단지 웃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연관관계 안에서 이해하게 됨으로써 느껴지는 역량의 고양으로 새롭게 정의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기쁘게/슬프게 하는 원인이 외부 원인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스피노자는 나를 슬프게 하는 조건에 대해 이해하고,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이행의 과정을 기쁨이라고 본 것이죠. 마찬가지로 안고는 웃음을 이해의 극단에서 터져나오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그 웃음은 그린듯한 해결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을 주겠죠. 이것이 안고의 진검승부로서의 웃음이고 말입니다.



다음 시간은 <나는 누구?>를 계속 읽어나갈 예정이고요, 시간이 좀 더 된다면 <에고이즘 소론> 초반을 강독할 예정입니다. <나는 누구?>는 안고가 글쓰기와 합평(!)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 초반에는 다자이와 함께 굴러다니며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만, 과연 뒷부분에서는 우리를 어떤 지평으로 인도할지 기대가 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