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3.11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3-05 21:44
조회
133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일단 니나노 세미나는 계속 안고를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글은 <나는 누구?>입니다. 어쩐지 자아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 같은 제목인데요, 안고는 그런 것을 관념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경계하지요.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에서 그는 '술에 취한' 상태가 마치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구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에서도 술에 취해 문학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고 또 그런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지요. 안고는 어떻게 보면 무척 솔직한 사람입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진검승부'를 중시하는 사람이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는 자신이 하는 행동만으로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관념이 안고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아주 저속한 일이다. 인간 자체가 저속하며, 오직 그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에 당연히 저속하다.

재미있는 것을 쓰려고 한다든가, 읽히면 좋겟다든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작가 정신이라든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든가 그러한 것은 내 가슴 속에나 타오르면 그만이지 밖으로 자신 있게 내보일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도 필요가 없고, 남에게 알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탕달 선생은 "나의 문학은 50년 후에 이해받을 테지"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50년 후부터 유행했으며 생전에는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포는 궁핍으로 죽었고 다쿠보쿠는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빈곤은 전혀 심각한 것이 아니다. 다락방의 시인 보들레르는 셔츠만큼은 언제나 얼룩 하나 없는 순백의 것을 걸쳤는데, 그런 건 요컨대 자장가, 아니 콧노래다. 결벽 따위가 아니다.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숙명이 아닐까. 사람은 전부 이해받기를 원하기에, 결코 이해받지 못한다. 아니 나 자신이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히 애달픈 일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애달픈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문인, 예술가가 특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로 이해받지 못하며, 사실 그게 전부 아닐까.


문인 하면 우리는 흔히 술에 취해 세상을 흰눈으로 보거나, 아니면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지만, 안고가 지적하는 건 문인 스스로도 그런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좌담회를 한다고 하면 우선 술부터 푸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자랑을 하며 진정한 문학이란 무엇인지 논하는 것을 안고는 딱 질색했습니다. 차라리 술을 마실 때는 술 마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더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안고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자의식을 고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걸 계속 들여다보고 또 덜어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줄 필요는 없으며, 자신이 쓰는 이유는 단지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는 누구?'라는 질문에 대한 답인 것이죠. 이런 안고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으면 글쓰기는 사실 자신을 가볍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계속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때마다 보이는 자신을 덜어내는 작업이 글쓰기 아닐까요?



다음 시간에는 <에고이즘 소론>을 들어갈 예정입니다.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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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9 11:41
    '나는 글을 쓰는 사람' 이라는 자기 결론에 이르기까지 안고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질문하지요. 다른 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자신의 윤리를 내어오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구요.
    단지 '읽을 거리' 가 아닌 '문학'을 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거치는지 그의 글이 잘 보여줍니다. 문학은 개인적 가쉽이 아니라 결국 보편성에 닿아야 하니까요. 40대의 안고가 자기 문학 인생이 40년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뼛속부터 문학가이고자 한 그의 다짐이 보이는 것 같아, 엉뚱하게 뭉클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