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1-28 21:02
조회
132
모두 에세이 준비는 잘 되고 계시는 지요. 제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아마 에세이 개요가 어떻게 될지 하하.... 일단 길례쌤과 금란쌤은 내일 에세이 발표로 바쁘시겠네요. 장장 1년 동안 달려오시느라 고생하셨지만 마지막까지 힘내세요! 다른 분들도! (사실 제 코가 석자인데 말이죠.)

이번 시간에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지점, 어떤 방식으로 주체화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행위양식에 인도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삶의 영역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요? 정수쌤도 얘기하셨지만, 이미 우린 많은 것에 대해 ‘참을 수 있는 신체’가 되었습니다. 일례로,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건강에 대한 어떤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지만) 어떤 질병도 해를 끼칠 수 없고, 신체적으로도 매우 탄탄함을 겸비하고 있는 육체. 그러나 이때 질병을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제도에서 규정하고 있는 건강 이외의 다른 건강을 쉽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건 곧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 그만큼 무지한 것이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채운쌤은 지금 시대에선 건강조차 제도에 맡기고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지 않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물론 그것이 제도가 그려낸 건강이란 표상에 딱 들어맞을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 과정에서 치료하는 의사와 치료받는 환자의 분명한 위계질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우린 건강을 관리하게 되죠. 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건강을 맡겨야만 건강을 쟁취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안젤리나 졸리처럼 암의 발병 가능성만으로도 신체를 절단한다면, 그러한 삶이 능동적으로 건강해지는 삶일까요? 눈앞에 닥친 위험 속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도 문제지만 동시에 의료, 보험 등등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푸코의 저항을 단순히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질문하는 방식이 ‘저항이 뭘까?’, ‘그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이지만, 채운쌤은 이건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질문이라고 하셨습니다. ^^;; 우린 이미 삶의 부분마다 저항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공부가 그렇죠. 누가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딱히 쓸모도 없는 이 공부를 하는 것만이 우리를 무지몽매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해줍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냥 돈 벌고 노는 걸로는 사는 게 재미없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ㅎㅎ, 어쨌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비하면 확실히 많은 부분에서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시겠죠.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푸코에게 저항이란 특정한 행위로 인도하는 기술과는 다른 새로운 기술의 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베아스의 재판을 가져온 건 베아스의 행위가 사법이라는 측면으로만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소수성’과도 연결이 됩니다. 채운쌤은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성이란 다수에 대한 소수가 아니라 다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소수성이란 소수적인 것을 생성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푸코의 저항도 중앙적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특정 권력이나 힘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전 저항이라고 생각하면 비제도권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제도권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푸코의 시선으로 본다면, 문제는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제도권은 항상 제도권이 아닌 영역을 생산해내고, 그때 생산하는 방식은 행위양식으로 인도하는 기술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푸코는 접근 자체를 달리한 것이죠.

《감시와 처벌》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던 건 규율권력이었습니다. 규율권력의 핵심은 훈육을 통해 개인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감옥에서 일어난 형벌이 중세와 달리 범법에 대한 보복으로 작동하지 않고 개인을 특정한 기술을 통해 사회에 유용한 신체, 곧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이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공장, 병원 등 사회 전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학교에서 배웠던 건 자명한 진리로서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로 생산하는 규범적 지식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학교라는 정규코스를 밟음으로써 스펙을 쌓아 대기업에 들어가고자 하는 주체로 생산될 수도 있고, 어른에게 예의범절을 지켜야 하는 예의바른 학생으로 생산될 수도 있습니다. 즉, 규율권력은 ‘규범화된 개인’을 생산합니다.

근데 후기를 쓰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규범화된 개인을 생산한다고 하면 그건 정상성을 내면화한 개인일까요, 아니면 유용한 신체라는 점에서 범법자까지 포함될까요? 푸코는 감옥이 훈육에 실패하는 것까지 목적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범죄자를 생산함으로써 때로는 그를 범죄조직의 끄나풀로 쓰거나 때로는 ‘그’라는 비정상성의 지표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푸코는 주목한 근대 권력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같이 출현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규범화 속에는 비정상성도 같이 포함되는 걸까요? 책을 대충 읽으니 막판에 가서 이런 질문이 생기네요. ㅠㅜ

푸코는 규율권력과 함께 작동되는 근대 권력의 또 다른 측면을 ‘생명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규율권력이 개인을 관리하는 것이라면, 생명권력은 인구라는 하나의 덩어리(혹은 흐름)을 관리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에서 얼마나 죽고, 태어나는 지,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얼마나 이동하는지 등등을 살핌으로써 치안, 주거 등을 관리하는 게 생명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근대에 출현한 학문들이 인구학, 통계학, 사회학 같은 것들인지를 생각해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식도 자명한 진리로써 출현하는 게 아니라 권력관계와 상호연관관계 속에서 출현합니다.

푸코는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을 통해 근대 국가에서 권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살폈습니다. 그것은 개별화를 통해 각 개인을 관리하는 동시에 전체의 흐름까지도 파악하죠. 푸코는 이러한 권력의 작동방식을 설명할 때 기독교의 사목권력을 많이 가져옵니다.

기독교에는 ‘목자’와 ‘양떼’가 있습니다. 각각의 양들은 목자를 따라다님으로써 늑대로부터 안정될 수 있고, 쉽게 풀과 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목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죠. 푸코는 기독교에서의 이러한 관계가 근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논문에서 푸코는 사회가 내부의 질서를 어떤 식으로 생산하고 있는지를 주목합니다. 우리도 흔히 ‘사회’를 문제삼고 있지만, 정확히 그 사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사회를 누구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일까요? 푸코는 폴리스라는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사회에 원래 양떼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 있는 게 아니라 사회는 ‘위험인물’을 생산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죠. 채운쌤은 저번 시간 범죄자와 범법자의 개념을 다시 설명해주셨습니다. 범법자는 사법적 판단에서 법 조항을 어겼을 때 문제되지만, 범죄자는 그 본성이 문제됩니다. 그리고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의 본성을 ‘범죄성’이라고 얘기하죠. 그의 생애가 다뤄지고, 거기서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을 만들어내죠. 이런 ‘범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위험인물’로 출현시키며 사회를 관리하는 게 ‘폴리스’인 것이죠. 실제로 우린 지식이나 건강, 치안 등 많은 부분을 교수, 의사, 경찰 등에게 맡겼죠. 즉, 사법에서 위법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사회 곳곳에 정상을 판단하는 판관들이 있는 셈이죠.

궁금한 게 생겼는데, 폴리스의 작동방식을 미래를 문제 삼는다고도 얘기할 수 있을까요? 위험인물이 문제되는 것도 아직 범죄를 일으키지 않았어도 언젠가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식 위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의료권력도 병이 아직 발발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당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지식 위에서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나타날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을 생산한다고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님 말고요.....

채운쌤은 고대 동양의 통치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군주의 수신(修身)이라고 하셨습니다. 군주인 자신의 욕망을 깨끗한 거울처럼 닦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자연스레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수신(修身)이나 신독(愼獨)과 같은 개념은 군주가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기 위한 수행이었죠. 그건 확실히 사회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유용한 신체가 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다만 이를 어떻게 푸코의 저항과 연결할지는 에세이에서 풀어내야겠죠. ^^;;

이번 후기도 늦었습니다. ㅠㅜ 내일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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