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3월8일 후기

작성자
강석
작성일
2018-03-10 15:36
조회
157
이번에 <변신>, <어느 단식광대>, <작은 여인>, <요제피네> 등을 읽었다. “예술”이라는 테마로 묶인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예술’이라고 전제하지 않았다면 <단식광대> 등 이 작품들을 ‘예술’로 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질문이 중간 중간 있는 가운데 선생님의 말씀으로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카프카는 1924년에 죽는데 1920년 이후 부터 많이 아파서 요양소를 전전하였다. 마지막에 목까지 전염된 결핵으로 인해 카프카는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였다. 카프카는 병 가운데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카프카는 <성> K-측량사를 돌연 중단하고 예술가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카프카가 말년에 예술가라는 형상이 왜 필요하였는지 ..

예술, 단식, 독신 ... 예술가에서 질문하고 탐구하는 자가 많다. 예술가의 형상은 질문하고 탐구하는 자다. K같은 성격도 있고, 대부분 작고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찌그러져가기도 하고 요제피네는 쥐다. 카프카의 장편에는 동물의 형상이 없다. 단지 <소송>에서 변호사의 비서 손은 갈퀴가 있는 기형적 장면이 있기는 하나 단편에서 전면적으로 동물이 등장한다. <변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지막 단편집과 연결이 되고, <유형지에서>는 여기서도 여전히 문제가 된다. 네 작품이 하나로 묶여지지 않지만, <어느 단식광대>만 보면 <유형지에서> 나오는 장교, 죄수, 탐험가가 결합된 캐릭터이다.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성찰한다. 신체는 죄나 형벌이 새겨지는 서판인데, 기계가 새긴 것을 장교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죽는다. 앎이 주는 한계에 갇혀서 죽는다. 탐험가는 그것을 관조하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핀다. 죽기 않기 위해 떠난다. 단식광대는 자기가 자기를 살핀 존재가 된다. 삶과 관찰이 하나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간다. <성>에서의 K는 관찰의 시선이 외부, 밖으로 향하여 있다. 자신이 아니었다. 단식광대는 나 밖에는 나를 못 본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안다는 것은 자기를 바꾸는 것이다.
곡예사 - 오드라테크와 연관된다. 시간의 선분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의 근심>에서 가족, 사회, 역사 안에서 한 존재를 새기는 형태이다. 오드라테크가 집안에서 장난감의 형상인데, 여기서는 곡예사의 형상으로 나와서 다시 예술과 연결된다. 복잡하다. 20년 이후 예술가의 형상에 카프카가 몰두 한다. 단식광대는 카프카 개인과도 오버랩 된다. 섞여 있지만 종합은 카프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서는 주어진 것, 설정된 것은 없다. 변한다. 단식광대는 그냥 단식을 했다. 목적이 없다.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나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조건에서는 입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단식이 없다면 이런 앎이 없게 된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단식을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설정된 것은 없다. 잠자도 입에 처음에는 안 맞고 맞게 되었다. 갑충으로, 인간으로 죽고자 하였는지 그 선택이 지점 지점마다 다르다.

변신은 동화나 신화에서는 기본이다. 민담은 신화의 떨거지이다. 영웅의 서사에 속할 수 없는 생활의 저층에서는 동화, 민담의 세계다. 동화의 주인공은 단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뿐이다. 백설공주, 바리데기 등 다 그렇다. 심청이 아버지를 구하려고 간다고 하지만, 인당수에 빠지는 것으로 바로 아버지가 구해지지 않는다. 인당수에 들어가면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수행하고서는 방향만 얻어진다. 방향성, 운동성이 동화나 전설의 기본 패턴이다. 카프카의 세계는 조각, 조각이다. 도서관이다. 책과 책, 조각과 조각이 동시적으로 움직인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한발만 내딛어도 다른 장면이다. 잠자가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가 아니고 그런데 어디에 가기는 간다. 가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간다. 잠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해서도 처음부터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니다. 하다 보니 죽는다. 굶다보니 죽는다.

카프가의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덩어리로 하려면 무엇인가 있다고 전제하여야 한다. 그래야 공통된 심리적 상징도 추출하고, 역사발전도 투사하여야 하는데, 카프카는 조각, 조각이다. 춤춘다. 그러다 보면 어디에 가게 된다. 여기 갈려고 그 고생을 해 이렇게 하면, 작게 시작했는데 커져야 하는 19세기 초기 소설의 정치 사회적이 역할이었다. 행위, 의무 부여를 하면 지금보다 낫겠다는 하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지위, 물질적인 안정에 카프카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카프카는 예술가의 문제로 왜 돌아왔을까.

죽음은 어떤 문턱이다. 어쩌다 간다. 요제피네는 공동체에서 사라져버린다. 단식광대도 인간에서서 사라져버린다. 잠자도 가족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사라진 존재 그러나 죽어 돌아온다. 사냥꾼 그라쿠스다. 죽는 얘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죽는다는 것이 비참하지 않다. 혼자 죽지 않는다. 요제피네는 민족 안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건드린다. 죽는다. 사라진다. 그러면서 남은 자 요제피네를 보는 자, 쥐가 느끼는 불안감 초조감이 있다.

변신이 영웅화 되는 계열이 있다. 영웅담, 대중서사에서는 능력이 붙는다. 축적, 자본주의 적이다. 민담, 전설에서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불멸인 신과 다른 필멸의 존재인 오딧세우스는 초기 조건을 그대로 쓴다. 다만 인간이 할 수없는 것, 오딧세우스는 지옥에 갖다 왔다는 것이다. 불멸은 아닌데, 필멸의 운명을 한번은 거스른 존재이다. 변신담에서는 1이 3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동화 - 팔을 하나 잃고도 문제가 안 된다. 상실이 아니고 다른 존재가 된다. 날개를 단다고 날개 단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아예 이제 부터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새가 된 것이다. 수퍼히어로들은 인간인데 이것도 저것도 다 잘한다. 덕지덕지 붙여 간다. 기술이 그렇게 결합되어 있다. 다른 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과 다른 변신의 계열이 있다.

19세기 서양문학에서 변신담이 재조합되는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다. 지금 영웅과 다르다. 프랑켄슈타인은 박사가 다른 존재를 창조한다. 얘가 나이기도 하고 아니다. 자기 같은 애를 만드는데 자기가 아니다. 불화를 겪는다. 지금은 내가 만든 애는 우리 시대 축적된, 발전해야 하고 큰 미션을 수행한다. 지구를 구한다. 동화나 민담에서의 주인공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그 구간의 미션을 해결할 뿐이다. 변신의 가족들은 파괴되지 않는다. 변신은, 단식광대는 그 계를 잠깐 출렁이게 할 뿐이다. 재현하지도 유토피아를 그리지도 않았다. 변신의 존재가 무엇이 되었다 이기도 있지만 변신에서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되는가. 단식광대는 짚더미와 함께 묻었다. 사라졌다. 표범 새끼 한 마리는 부족함이 없다. 단식광대는 모든 것을 버렸다. 부족함 없이 사는 것은 자유가 그립지 않는다. 표범으로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 자유이다. 언제나 물어뜯을 것이 있다. 카프카의 자유는 이런 자유와 반대이다. <자칼과 아랍인>에 이빨이 나온다. 이빨을 가진 자는 무리지어 다니고 피에 굶주려 있다. 피의 연속성이 있는 것만이 이빨을 가진다. 이것이 자유인 것처럼 도취된다. 그런데 단식광대를 보는 관객은 불편했다가 신기하게 보다 결국 못 견딘다. 단식한다는 것은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이다. 예술은 앞에 있는 인간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가가 말로써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삶으로 못 견디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카프카의 예술이다. 표범을 보면서 견디는 것과는 대비된다. 이런 예술가의 초상 이전 작품에는 없었다. 자기를 바꾸는 문제 그래서 단식광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념을 주장한다거나 자기 취향을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다. 자기를 바꾸는 문제이다.
<성>에서 K, 측량사는 측량을 하려 했고, 모든 사람이 그는 모르는 구나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바꾸었다. K는 여기 살려고 왔다. 그래서 친구도, 애인도 만든다. 이것이 삶이다. 삶이란 문제 설정이 <성>에 있고, 그러면 어떻게 살고 어떤 방식으로 삺을 표현해야 뭔가를 측량하는 것이다. 예술, 단식광대- 자기 삶에서 가지는 의문을 삶으로 푸는 것이다. 산다는 문제가 있다. 단식광대가 측량사와 연결되지 지점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이 뭔가? 그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이지, “먹잖아!”

먹는다. 인간의 먹음을 문제 삼는다. 먹는다. 무엇을, 영양소가 아니고 먹음이 존재를 구성한다. 빵과 쌀을 먹는다. 그리고 우리는 ‘관념’을 먹는다. 자유 그것을 소화시킨다. 먹어야, 가져야 할 것, 즉 자유, 독립, 여성성 .. 이런 관념을 먹는다. 그래서 먹어서 나인 것처럼 산다. 그런데 굶는다. 덜어내는 것이다. 자기다움을 덜어낸다. 나라고, 우리라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 등을 덜어낸다. 아들다움, 오빠다움, 의문을 덜어내는 것이 굶음과 함께 간다. 단번에 덜어지지 않는다. 대단히 수행적이다. 단식광대는 죽음이란 문턱을 넘어서도 단식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가 안 보인다. 굶는다는 것이 단순히 안 먹는다는 것이 아니다. 덜어내는 것이다. 굶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죽는 것은 비참해 이런 것들이 붙잡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데, 하는 것은 결국 나쁘다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사실 다른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해버리게 한다. 그러나 변신, 굶는 자들은 좋다, 싫다의 판단 없이 행위 그 자체를 붙들고 무엇인가를 넘어간다. <변신> 중요한 텍스트다.

(글을 쓰다 보니 예술로 간 것이 아니라, 키워드로 주어져 처음부터 예술을 전제하고 쓰다 보니 예술의 완벽성, 완전성으로 갔다.) 카프카가 불태워달라고 했다. 무언가 남기는 게, 그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다. 자신이 태울 수 있음에도 자기 스스로 태우지 않고, 불태워달라고 말했다는 진술이 갖는 예술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단식, 그네 타는 것 ... 예술 연결이 어색하다.) 네 가지 작품이 모두 엮이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작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작음”을 어떤 차원에서 해석해야 하는 가 이것이 과제다. 창문도 작은 것이다. 카프카에게 광야, 광장 등은 아니다. 구석, 구멍 등 이런 설정이 중요했다. 작음을 배치하는 카프카의 설정. 작음과 삶이 예술로 결합되어 해석하여야 한다.
예술가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작은 여인>에서 작은 여인이 화자 중 누가 예술가인가? 어쨌든, “작다는 것”이 카프카 작품에서는 긍정적이다. 선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작품의 이야기 안에서 출구가 개시될 때이다. <작은 여인> 287면, .. 문턱을 변신, 고개를 돌린다. 측량한다는 것에 저항한다. 화자를 예술가로 보기에는 시간에 대한 태도에서 걸린다. 작은 여인을 예술가로 보기에는 작은 여인의 몸짓, 태도가 요제피네처럼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다. 요제피네가 자기 주변에 요구하는 것과 오버랩 된다.
카프카는 1911년에 동유럽 유대인 유랑극단의 공연을 본 무렵부터 “작은 것”에 대한 공부와 논의를 펼친다. “작은 문학”이란 개념. 사실 작은 민족의 큰 문학이 대부분이었다. 한국민족은 작은 민족인데, 민족주의는 큰 방식으로 담론, 이야기를 흡입한다. 정치적으로 열세적이고, 취약한 무리가 갖는 큰 의식 같은 것이 있다. 민족주의와 같은 거대한 것이다. 카프카는 작은 문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큰 문학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유대인연극은 떠돌이연극단이었다. 1911년 일기와 1912년 초의 일기에 조금 언급된다. 이들이 한 연극이 너무 초라하고, 그들이 사용한 사투리가 고대 유대인 말, 독일 말이 섞여있다. 예술을 한다는데 교육받은 적은 없고, 옷은 덕지덕지하고 초라했다. 연극의 주제와 관계없이 작은 동작, 엑센트의 한 조각이 상기시키는 유랑하는 삶의 편린들을 카프카는 보았다. 지하철 사람의 자세만 보아도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작은 부분 부분에서 존재가, 생의 전체가 드러날 수 있다. 작다는 것이 정말 작지 않아서 큰 대의, 민족적 명제와는 수렵되지 않지만 작은 것에서 새로운 의미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그 작음, 작음이 만드는 무늬 속에서 유대인유랑극단의 유대인 스러움, 신산한 삶을 발견한다. 이때 카프타가 “작은 문학”이라고 했고, 이것을 들뢰즈가 “소수 문학”으로 갖고 왔다. 들뢰즈는 소수성,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정치적인 열세인 민족, 문학, 문학가들은 그 존재 자체와 문학 자체 안에 많은 정치적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 문학에 대해서 식민지 조선의 문학을 써서가 아니라, 제국주의 언어를 써도 소수자적인 정체성으로, 방식으로 제국의 일본(어)을 비틀 수 있다. 카프카는 괴테 같은 큰 문학가와는 다른 지엽적이고 사소한 주제를 건드렸다. 변신담이 나오는 것도 그렇다. 괴테와 같은 독문학으로는 표현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독일어를 썼기 때문에 독일적인 것도, 유대적인 것도 아닌 정형화된 문학, 민족정신을 건드린 것이다. 들뢰즈는 높이 평가하였고, 그렇게 소수적인 것을 강조해도 되고, 작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 <작은 여인> 여성화되어 있는 것도 같고. 삶의 작음이란 무엇인가. 작음 ... 복잡하다.

(예술? 작업, 권위, 빈칸 ... 영감) <단식광대>는 사실 ‘아티스트“다. “단식예술가”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마지막 작품에 카프카가 예술가로 지칭하는 형상이 많이 나온다. 카프카식의 예술은 자기 삶을 조각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삶을 단식광대처럼. 자기 삶을 질문이 표현되는 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단히 실천적이다. 프루스트는 예술은 이런거다 고 많은 예술론을 말한다. 마지막에는 글쓰기가 자기 예술로 간다. 예술론 일반이 아닌 글쓰기의 화두로 달려간다. 재능 이전이다. 카프카의 작품중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음악의 형상(종소리)이, <실종자>에서 오클라호마 극장(공연예술)이, <소송>에서 법은 화가이다. 법을 반영하고 심판과 가까이 있다. 카프카는 예술을 단식을 갖고 정의하려고 한다.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갖는가 하는 것이 예술의 문제이다. 정서, 관념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카프카는 반대했다.
카프카에게서 예술은 정서, 관념도 덜어내는 작업이다. <실종자>에서 화부와 정서적 유대가 있었다고 하나 카프카 작품 안에서는 정서, 교감은 없다. 카프카는 사랑, 우정, 의리 .. 이런 정서에 관심이 없었다. 언어는 다만 그렇게 보일뿐이다. 보여주는 장치이다. 실체가 아니다. 말, 재현되는 대상은 기대할 것이 없다.

(식구들의 고통, 돈벌이 ... ) 이것은 줄거리이다. 알 수 있는 것 작품의 표면에 있는 것이다. 왜 빨리 안 죽지. 왜 가운데 것을 쓰지. 카프카는 과정을 쓴다. 왜 이 장면이 필요한가. 주제와 상관없어도 분위기를 만든다. 시선의 방향을 돌린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고 장면이 바뀌는 것은 주제와 아무 상관없다. 인간일 때 바닥 한 면만 필요한데 벌레가 되었기에 육면을 다 쓴다. 존재가 바뀐다. 천정을 바닥처럼 쓸 수 있다.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그린 것이 아니고 발을 보여준다. 놀라운 “작은 독법”이다. 작품 전체에서 큰 것은 아버지가 중심축이다. 가족 오이디푸스인데, 오빠와 동생 관계를 들뢰즈 가타리는 변태적인 방식이라고 했다. 메인 캐릭터 중심주제이다. 헤세 작품은 작은 독법을 할 수 없다.

(단식광대가 사람인데 사람이지 않은 형상, 불쌍함, 혐오감, 잠자는 오빠인데 오빠가 아닌 이물감) 인간인데 인간 아닌 존재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보아야 한다. 근대적인 감정이다. 프로이트의 ?, 고양이 같은 것. 가장 감당하고 싶지 않는 내가 돌아올 때, 억누르고 감추고 싶은 것과 거리를 둔다. 작품에서 여동생이나, 아빠나 엄마가 그것이 있어야 한다. 일말의 기대가 있어야 한다. 단식광대는 가장 인간인데 인간 아닌 것이 주는 것 왜 두려울 까. 나도 인간인데 내 안의 인간 아닌 것을 건드리면 불쾌하다. 억누른 것이다. 나 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어. 나에게 안 좋은 모습은 다 아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것 그것이 나다. 억누르고 감추고 싶은 것- 생각지도 못한 복잡하고 기괴한 성, 죽음에 대한 욕망은 너무나 나를 보여준다.

단식광대 - 나와 다른 것을 보는 불편함, 이것이 왜 두렵고 불쾌한가. 카프카는 왜 이것을 두렵다고 설정한가. 이것이 두렵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변신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렵게 한다. 표현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해야 한다. 왜 이 장면이 필요하는지, 그리고 그 말이 갖고 있는 효과를 읽어야 한다. 회화나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은 여러 개 있다. 사실 표면을 읽어서 풀리는 작품은 간단하다. 아름답다. 서정시. 감정이 언어에 곧바로 투사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감정을 투명하게 왜 통과시키냐. 우린 다 다른데,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다. 좋을 수도 나쁠 수 있다. 대개 민족주의나 파시즘, 예술적 선동력은 정서를 투명하게 독립시민다. 집합성이다. 정서, 인간은 예술작품을 경험하면서 나눌 수 없는 것을 계속 발생시킨다. 다른 차이와 개인의 감수성과 지성을 다르게 특이하게 발생시키는 예술도 있다. 음악도 있고. 그런데 서정, 정서 문제가 많은 영역이다. 리얼리즘 작품은 아무리 프롤레타이라 만세를 외쳐도 테크닉 자체가 보수적이고 반동적이다. 계속해서 있었던 가치를 재생산시키기가 좋다. 카프카를 민족주의로 해석하거나 유대 시오니즘에 관여가 되어 있다거나 해도 작품 자체와 맞지 않다. (이것을 예술이라 치고 .. 뭘 보여주지 ... 먹는 방식) ... 느낀 것, 찾고, 앎을 조각을 해나가야 한다. 정교하게 해야 한다. (먹는 것도 인간이다. 그것과 달리 먹는 방식을 다르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 것인가. ... )

카프카의 예술은 인간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뭔가 하는 질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아니다. 내가 하는 질문을 나를 설명하거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질문을 하는 내가 육체로, 삶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여기서 답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로부터 갑충도 되고 K도 출발지로부터 멀어지고, 실종자도 자기 이름을 떠났다. 내가 돌아가야 할 그 어떤 지점도 없는 여행 중에 있는 주인공이다. <돌연한 출발> 608면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다.” 여기 - 이 존재에게는 인간이란 화두가 걸려있다. 이것을 넘어가면 딴 것이 나온다. 지푸라기로서의 여기가 문제된다. 계속 굶고, 그 다음에서 떠나고, 또 떠나고 한다. 굶는다. 양식이 필요 없다. 지금 여기서 나를 먹이고 살렸던 것이 여기를 떠나면 그 다음에서는 나를 먹여 살리지 못한다. 굶어 죽는다. 예술은 출발로서 인간을 설정했다.

민족주의 이런 것을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고 지금 떠나간다. 고개만 돌려도, 세계 자체가 달라지고 출렁거린다. 나랑 세계와 싸운다는 문제가 아니다. 독일 싫어 시오니즘 좋아 이런 문제가 아니다. 적폐청산의 문제가, 리얼리즘이 아니다. 모든 인간성을 시험해 갈 때 내 앞에 있는 인간에게 작은 여인처럼 불쾌감을 주거나 곤란한 정서를 발생시키거나 이것이 완수, 완료될 수 없다. 인간이란 문제는 늘 새롭다. 그런데 지금 이상한 시대 아닌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뭔가 사람들이 변했다. 문제에 답을 하지 않는다. 대단히 답을 미루고 답을 안 해도 되어버렸다. 편지 - 대상이 달라지고 문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정박지를 잃어버린 때이다. 자기를 잃어간다. 예술은 질문을 받고 던지는 것이다.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대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예술작품을 어떻게 분석하려고 하는지를 얘기해야 한다. 카프카가 ‘대화’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는지를 써야한다. 대화라는 스펙트럼의 중간 지점이었다는 기준은 카프카의 견해가 아니다. 카프가 준 것을 가지고 이런 것을 대화라고 하고, 말을 나눈다는 것은 무엇이지 이라 해야 한다. 아는 것을 아는 것만 보고 나오면 안 들어 간 것이다. 실제 카프카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설명문이 아니기 때문에 겪어야 한다. 언어의 질을 느껴야 한다. 언어가 주는 이상한 것을 겪어야 한다. 그것을 요구한다. 카프카는 말을 나누는 것을 “물 가져와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이라는 개념을 공유될 수 없다. 끊임없이 그나마 <소송>에서는 대화가 있다. 법정의 장면에서 실제 공통 관념을 주고받는다. <성>은 공통 관념을 주고받지 않는다. 이런 거어요하면 딴 말을 한다. 성은 가장 많이 부셔진다. 사건이 있는데, 초기 작품에서 산책 딴 소리한다. 산책,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대화를 한다. 정말로 말, 대화가 궁금해야 한다. 예술이 대화다 하고 하면 그것을 풀면 된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대화는 타인이 필요하고 ... 낯선 나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대화하는 얘가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카프카식의 말하기는 이 장에서 혼자 무엇을 한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서 얘가 창조된다. 원래 그런 성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카프카에서는 말과 행위로 덕분에 다른 값을 가져서 다른 존재가 된다. 예상치 없는 얘가 계속 등장한다. 예를 들면 <성>에서 ‘촌장’이었다가 ‘친구’가 된다. 대화는 타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들거나 뭉게거나 섞일 수 있어야 한다.
글은 초점이 있어야 한다. 그 문제에서 기승전결을 짤 수 있어야 한다. 쓰다보면 그렇게 되면 카프카‘스럽지만’ 어떤 지점, 인간을, 법을 넘어야 된다. 문턱,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게 와야 고래를 돌린다. 한 구절을 읽더라도 문제를 만들면서 가야 한다. 책은 힘이 너무 세다. 자기 생각을 지키고 자기 논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유형지에서>는 죄수, 장교, 처형대가 세트인데, 긴가, 아닌가를 계속 따진다. 말이 주는 한계에 갇혀서 얽매어 장교가 죽는다. 이러 저래해야 한다. 언어적인 사슬 그것 밖에 생각을 못한다. 그것을 탐험가는 보고 그 장을 떠난다. <성>에서는 탐험가처럼 궁금해서 스스로 온 자가 K이다. 내가 세계를 관찰한다. 내가 너를 본다 하는 이런 구도가 잇었는데 <어느 단식광대>에서는 무너진다. 탐험가도 외부인으로 와서 대립관계가 있게된다 관찰해야 되는 대상과 살아 가아 햐는 것이 분리되어 있다. 단식광대는 하나가 된다. 내가 관찰하고 내 삶을 문제 삼는다.
관찰의 방향이 <성>까지는 존재 밖으로 시선이 가 있었다. K는 자기 자신이 궁금하지 않다. 살려고 하고 주어진 조건을 이용하는 것이다. <어느 단식광대>는 내가 나를 보는 문제와 나를 관찰하는 문제가 나를 바꾸는 것과 붙어 있다. 다른 작품에서는 화자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 작은 여인도, 요제피네도 분리되어 있다. 근데, <어느 단식광대>만 나 밖에 나를 못 본다고 한다. 단식이 끝까지지 궁금해 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도 나다. “어마” 무시한 작품이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하는 대상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자기를 바꾸는 것, 안다는 것이 무얼까.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평전”이 완역되었다. 카프카를 구도자로 해석했다.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우리 카프카님, 이런 친구가 있어야 한다. 찐하게 카프카를 만나야 한다.

다음 주에는 나의 베스트 작품을 선정해보고, “변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각자의 삶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카프카가 경험되기를. 언어는 겪는 것이다. 카프카님의 말씀이다. 대화는 그래서 겪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고 싶다. 내 문제를 겪어서 표현하는 것이고 나를 주는 것이다. 어떤 내말을, 의미를, 약속을 주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화 되어 있는 정서상태, 번민, 실수 ... 범벅된 순간을 상대방에게 내미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고. 너랑 대화해서 “무얼 하겠어” 라는 컨셉이 카프카에게는 없다. 그 다음은 없다. 언어자체가 매질이 불투명하고 덕지덕지 무엇이 끼어 있다.

근데 시대가 이상하다. 존재가 지금 일체로 경험되는 시대가 아니다.

아는 것을 풀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다.
전체 4

  • 2018-03-11 19:28
    파일로 첨부되어 있어서 본문에 내용 옮겨놨어요 ^.^ 기나긴 후기를 올려주셨네요 셈나가 얼마나 뜨끈했는지 전해집니다 ㅋ

    • 2018-03-12 20:06
      이런방법을 ... 고맙습니다 ....... ~~~

  • 2018-03-12 00:12
    헉! 강석 선생님께서는 토론 내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메모하시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요. 옴마야! 선생님의 몰입 덕분에 세미나가 더 밀도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에세이를 쓰기 전 마지막 작품 토론만 남겨두고 있네요. '변신'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고 외쳤던 카프카를 만나게 됩니다. 후덜덜~ ^^;;

    • 2018-03-12 20:13
      감사합니다. 자유가 아직은 멀고, 출구가 필요합니다. 저에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