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시간] 공야장 18-22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2-08 01:49
조회
461
161211 격몽스쿨 공지

18.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장이 물었다. “영윤인 자문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없었으며 옛 영윤의 정치를 새 영윤에게 반드시 알려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성스럽구나.” “인합니까.”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 할 수 있을까.”

令尹 官名 楚上卿執政者也 子文 姓鬪 名穀於寀 其爲人也喜怒不形 物我無間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 其忠盛矣 故 子張疑其仁 然 其所以三仕三已而告新令尹者 未知其皆出於天理而無人欲之私也 是以 夫子但許其忠而未許其仁也
영윤은 관직 이름이다. 초나라의 상경인 정치가이다. 자문은 성이 투, 이름은 누오도이다. 그는 사람됨이 기쁘거나 성냄을 나타내지 않았고 외부 사물과 자기 사이에 간격이 없었다. 그 나라가 있음을 알고 그 자신이 있음은 알지 못했으니 그 충(忠)이 매우 크다. 자장은 그가 인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가 세 번 벼슬하였따가 세 번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새 영윤에게 알려주었더라도 모두 천리에서 나와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다만 그의 충(忠)만 인정하시고 인(仁)은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최자가 제나라 군주를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 십 승(乘)을 가지고 있었지만 버리고 그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구나’ 하고 그곳을 떠났으며 어떤 나라로 가서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구나’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청렴하구나.” “인합니까.”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 하겠는가.”

崔子 齊大夫 名杼 齊君 莊公 名光 陳文子 亦齊大夫 名須無 十乘 四十匹也 違 去也 文子潔身去亂 可謂淸矣 然 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 而能脫然無所累乎 抑不得已於利害之私 而猶未免於怨悔也 故 夫子特許其淸而不許其仁
愚聞之師 曰 當理而無私心 則仁矣 今以是而觀二子之事 雖其制行之高 若不可及 然 皆未有以見其必當於理而眞無私心也 子張未識仁體 而悅於苟難 遂以小者 信其大者 夫子之不許也宜哉 讀者於此 更以上章不知其仁 後篇仁則吾不知之語 幷與三仁夷齊之事觀之 則彼此交盡 而仁之爲義 可識矣 今以他書考之 子文之相楚 所謀者無非僭王猾夏之事 文子之仕齊 旣失正君討賊之義 又不數歲而復反於齊焉 則其不仁 亦可見矣
최자는 제나라 대부이다. 이름은 저이다. 제나가 군주는 장공이며 이름은 광이다. 진문자 역시 제나라 대부이며 이름은 수무이다. 십 승(乘)은 말 사십 필이다. 위(違)는 떠난다는 뜻이다. 문자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어지러움을 떠났으니 청렴하다 할 수 있따. 그러나 그 마음이 과연 의리(義理)의 마땅함을 알고 초탈하여 얽매인 바가 없었는지 아니면 이익의 사사로움을 그만둘 수가 없었고 오히려 원망과 후회를 면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다만 그 청렴함은 인정하셨지만 그 인함은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내가 스승께 듣기를 마땅한 이치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것이니 인(仁)이다. 지금 이로써 두 사람의 일을 보건대 비록 그 행동을 삼가는 것의 고고함은 미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지만 모두 그들이 이치에 반드시 합당한지는, 진실로 사심이 없었는지도 알 수 없다. 자장은 인의 핵심은 알지 못하고 어려움을 구차하게 넘어가는 것을 좋다고 여겨서 마침내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믿은 것이다. 공자께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은 마땅하도다. 독자는 이에 다시 위 장의 ‘그가 인한지는 알지 못하겠다’와 뒤편의 ‘인한지는 나는 모르겠다’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삼인(三仁)에 대한 이야기와 백이와 숙제의 일을 본다면 저것과 이것이 서로 다하여 인(仁)의 뜻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다른 책으로 이것을 고증하니 자믄는 초나라에서 재상을 할 때 일을 도모한 것이 참왕하고 중국의 일을 어지럽히지 않은 게 없었다. 문자는 제나라에서 벼슬할 때 이미 군주를 바로 하고 도적을 치는 의(義)를 잃었다. 또한 몇 년 안 되어 다시 제나라로 돌아왔으니 그 불인함을 또한 볼 수 있다.

19.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 曰 再斯可矣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다음 행했다. 공자께서 그것을 듣고는 말씀하셨다. “두 번이면 된다.”

季文子 魯大夫 名行父 每事必三思而後行 若使晉而求遭喪之禮以行 亦其一事也 斯 語辭 程子曰 爲惡之人 未嘗知有思 有思則爲善矣 然 至於再則已審 三則私意起而反惑矣 故 夫子譏之
愚按 季文子慮事如此 可謂詳審而宜無過擧矣 而宣公纂立 文子乃不能討 反爲之使齊而納賂焉 豈非程子所謂私意起而反惑之驗歟 是以 君子務窮理而貴果斷 不徒多思之爲尙
계문자는 노나라 대부이며 이름은 행보이다. 매사에 반드시 세 번 생각한 다음 행하였다. 가령 진나라로 사신을 갈 때 상을 만났을 때의 예를 구한 다음에 갔으니 또한 한 가지 사례이다. 사(斯)는 어조사다.
정자 말씀하셨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생각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생각이 있다면 선을 행한다. 그러나 두 번에 이르면 이미 깊은 것이다. 세 번이면 사의가 일어나 도리어 미혹된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것을 비판하신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계문자가 일을 생각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세히 살핀다고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공이 찬탈하고 즉위하자 문자는 이에 토벌할 수 없었고 오히려 선공을 위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다. 정자가 말씀하신 ‘사의가 일어나 도리어 미혹된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이치를 궁구함에 힘쓰면서도 과단(果斷)을 귀하게 여기며 그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다.

20. 子曰 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 可及也 其愚 不可及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

武子 衛大夫 名兪 按春秋傳 武子仕衛 當文公成公之時 文公有道 而武子無事可見 此其知之可及也 成公無道 至於失國 而武子周旋其間 盡心竭力 不避艱險 凡其所處 皆智巧之士所深避而不肯爲者 而能卒保其身 以濟其君 此其愚之不可及也
程子曰 邦無道 能沈晦以免患 故 曰不可及也 亦有不當愚者 比干 是也
무자는 위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유다. <춘추전>을 상고해보면 무자는 위나라에서 벼슬했으니문공과 성공의 시기였다. 문공은 도가 있었으니 무자가 볼만한 일이 없었다. 이것이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 때는 도가 없었으니 나라를 잃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무자는 그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고생스럽고 험난함을 피하지 않았다. 무릇 그 처한 바는 모두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은 깊이 피하고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몸을 보전하고 그 군주를 구제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어리석음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자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 환란을 면하였따. 그러므로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어리석음이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비간(比干)이 그 경우이다.

21. 子在陳 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 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고 거치니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고 있다. 다만 바로잡을 줄은 모른다.”

此 孔子周流四方 道不行而思歸之歎也 吾黨小子 指門人之在魯者 狂簡 志大而略於事也 斐 文貌 成章 言其文理成就 有可觀者 裁 割正也 夫子初心 欲行其道於天下 至是而知其終不用也 於是 始欲成就後學 以傳道於來世 又不得中行之士 而思其次 以爲狂士志意高遠 猶或可與進於道也 但恐其過中失正而或陷於異端耳 故 欲歸而裁之也
이것은 공자께서 사방은 주유하셨으나 도가 행해지지 않자 돌아갈 생각을 하시며 탄식하신 것이다. ‘내 고향의 젊은이’는 노나라에 있는 문인들을 가리킨다. 광간(狂簡)은 뜻은 크지만 일에 있어서 서툰 것이다. 비(斐)는 문채 나는 모양이다. 문장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 문리를 성취하여 볼만함이 있는 것을 말한다. 재(裁)는 베어서 바로잡는 것이다. 공자의 원래 마음은 그 도를 천하에 행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가 결국 쓰이지 않음에 이르렀다. 이때에 비로소 후학을 이루고 나아가게 하여 후세에 도를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중도의 선비를 얻지 못하여 그 다음을 생각하였으니 광간한 선비들은 뜻이 높고 머니 오히려 도에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이단에 빠질까 엄려하셨다. 그러므로 돌아가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다.

22.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 孟子稱其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 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퐠焉 其介如此 宜若無所容矣 然 其所惡之人 能改卽止 故 人亦不甚怨之也
程子曰 不念舊惡 此淸者之量 又曰 二子之心 非夫子 孰能知之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아들이다. 맹자는 그들을 일컬어 ‘악인의 조정에 서지 않았고 악한 사람들과 함께 말 섞지 않았으며 시골 사람들과 함께 서지 않았고 그 관이 바르지 않으면 먼 곳을 보며 그를 떠나서 마치 자신이 오염된 것처럼 여겼다’라고 하였다. 그 절개가 이와 같다. 마땅히 포용하는 바가 없을 듯하나 그 미워하는 사람이 괼 수 있다면 그쳤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또한 그들을 심히 원망하지 않은 것이다. 정자 말씀하셨다. ‘지나간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청렴한 자의도량이다.’ 또 말씀하셨다 ‘두 사람의 마음을 공자가 아니면 누가 알았을까.’
공야장은 역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많이 나오네요. 이번 시간에 한 부분부터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많이 언급된다고. 세 번 생각할 거 두 번이면 되었다고 한 공자님 말씀과 정자의 해석이 이번에 읽은 것 중에서는 가장 와 닿는 것 같아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면 그 생각이 아까워서라도 자기한테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고 더 갈팡질팡 하게 되는 느낌. 그게 사의가 일어나는 거 아닐까요~

간식은 수정쌤.

다음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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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8 11:00
    예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왕위를 거부하고 떠난 백이와 숙제인데, 막상 주나라에 와보니 예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을라나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