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3월 1일 후기

작성자
금란
작성일
2017-03-05 09:19
조회
261
규문 절차탁마Q 1학기 / 2017.3.1. 플라톤 <국가> 3강 후기 / 금란

 1. 철학의 유용성과 ~주의자가 된다는 것

플라톤을 비판하고 플라톤을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플라톤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 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들뢰즈가 말했듯이 ‘그의 개념의 유용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철학에는 맞는 철학도 틀린 철학은 없다. 철학은 그의 개념을 가지고 지금의 시대와 나의 현실을 바라보는데 유용함을 제공한다. 푸코는 ‘모든 철학적 개념은 다 도구가 될 수 있는 연장통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유용하다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다르게 문제화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

따라서 배운다는 것은 자기의 견해로부터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상으로부터 내가 출렁거리고 뒤집어지는 것. 즉 텍스트를 읽을 때 마다 텍스트의 주의자가 되어 보고 다시 그 주의에서 빠져 나오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자신의 을 돌보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

그리스인들은 과도함에 대한 경기가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정서, 과도한 욕망, 과도한 음식에 대한 경계다. 플라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 역시 과도함에 대한 경계다. 과도함으로 빠지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마음(혼)이 격정(기개), 욕망, 이성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성하고 같이 통제될 수 있는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대는 과도함이 만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끌어갈 조타수조차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문제의식 이다. 플라톤은 이 시대가 법률과 의술에 치우쳐 있는 것 자체가 과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본다.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 자신의 ‘혼’을 돌본다는 것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연한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보기에 좋은 삶이란 최선의 ‘혼의 좋은 상태’다.

우주에 질서 정연한 아름다운 이성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혼의 좋은 상태’를 조화롭게 잡아주는 이성과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혼’이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좋은 영향을 미치는 시, 음악, 체육 교육을 통해, 늘 ‘혼’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세 가지(용기, 진실, 절제) 덕목을 길러야 한다는 것. 플라톤에겐 이러한 교육이 곧 과도함에 대한 절제를 익히는 것이고, 절제를 통해 ‘혼의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3. 플라톤의 예술과 비판

플라톤에게 예술은 ‘좋은 혼’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 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우주적 질서고, 질서가 곧 아름다움이다. 우주적 이성이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은 과도한 열정과 양립할 수 없다. 예술은 항상적이지 않다. 예술가는 세계의 상식에 갇혀 있고, 보편화한 개념 속에 매여 있는 세계를 뚫고 나간다. 이런 경험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서 플라톤은 경계한다. 설령 뚫고 나가서 자기가 본 거대한 비의(悲意)를 감각하고 감지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쑥 빨려 들어가 실제와 환영을 혼돈 하는 상태가 된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광(狂)이다. 그런데 예술가는 자기가 본 세계에 끌려가지 않고 그것을 다시 색으로, 언어로 가져 온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예술가의 인격이다.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은 모순성 없는 인격이다. 변치 않는 통일성을 갖는 인격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생각했던 예술의 개념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고, 그 것과는 전혀 다른 것도 공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를 뒤집어 보고 엎어트려도 보며 변주해서 다각화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자기가 제기하는 문제 자체를 계속 문제화 할 수 있어야, 문제 자체가 계속해서 변주되는 양상 속에서 비판하고 다른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 글을 쓸 때도 나의 자리를 고정시키고 플라톤의 자리를 고정시키는 상태에서 하는 비판은 아니어야 한다.

4. 경험적 와 통찰적

플라톤은 경험을 통해서 도달하는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의사의 경우에는 경험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판관의 경우에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의사의 논리를 적용하면, 판관도 온갖 나쁜 짓을 겪어 보고 비로소 무엇이 좋은지를 알게 된다는 것인데. 나쁜 것을 접해보지 않고도 어떤 것이 좋은지를 충분히 아는 상태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 되어 있는 선악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꼭 악을 거쳐야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몸은 병을 거쳐서 건강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지만, 선은 선 자체를 인식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과 ‘’은 다르다는 것.

따라서 경험적 지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적 지식을 최소화 하면서 어떤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천재적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적 지식이 불필요하지는 않지만 다 통찰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는 것이다. 노자의 말처럼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안다’는 것은, 신비주의가 아니고 전체 우주에 대한 직관을 터득하면 내가 겪어보지 않는 아주 작은 것,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다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통찰의 힘이며 생사에 대한 근원적 앎이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이 인간의 ‘혼’에 최선의 상태인가를 통찰하면, 어떤 것이 최선의 혼의 상태를 보전하는 데 이익이 되는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통찰적 知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경험적 知와는 분명한 위계를 둔다. 그렇지만 경험적 知를 통찰적 知로 전환하는 것이 올바른 삶을 위한 공부이고 수행이라는 것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통치자가 모든 것을 경험해야 올바를 통치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치자가 올바른 혼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그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전체 2

  • 2017-03-06 21:42
    경험지가 모두 통찰지로 전환되지는 않는다는 말이 다시 새롭게 다가오네요. 경험을 통찰로 전환할 수 있는 근원적 앎이 필요하단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런 앎에 다가가려면 지식과 수련이 필요하다죠? 절치틱마Q 모두 빠짐 없이 함께 그런 시간 함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7-03-07 09:23
    푸코의 철학적 개념을 연장통으로 여기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그럴려면 텍스트를 통해 제가 좀 흔들려야 하는데 견고한 성같이 느껴지니 언제 그것을 써먹게 될지 모르겠네요. 부단한 단련과 수련을 통해 가능할까요.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