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월 8일 4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03-10 15:30
조회
270
발제글을 같이 읽고 언제나처럼 채운샘의 당부가 있으셨다. 오늘 조별 토론 내용은 이런 걸 이야기해보라는 것이었다.

1."하나, 전체, 좋은" 같은 단어들이 플라톤에게 어떤 것인가?

2.나라와 개인에게 필요한 3부분이 무엇일까? 개체와 국가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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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 전체, 좋은" 같은 단어들이 플라톤에게 어떤 것인가?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 내서 이들을 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네."(420c)

"우리가 각각의 부분에 알맞은 색을 칠함으로써 전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지켜보십시오."(420d)

"나라가 커지더라도 하나로 머물러 있게 되는 한도까지, 즉 그 정도까지 키우되, 그 이상은 키우지 않는 걸세."(426b)

플라톤이 강조하는 "하나, 전체"란 "조화, 절제"와 같은 말이며 다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가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police를 구성하기 위해서 세 그룹의 조화가 필요하다. 판단력을 가지고 숙고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통치자와, 용기를 가지고 폴리스의 안정을 지키는 수호자 그룹과, 경제를 책임지며 절제로 무분별한 사치를 막아 폴리스 내 물자가 원활히 공급되도록 만드는 생산자 그룹이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일(기능:egron)을 실제로 잘 할 때 하나인 폴리스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 때 각 그룹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호자가 먼저 장인(가장 훌륭한 일꾼: demiourgos)이 되어야 한다. 장인은 이치를 알아 조화를 만들 수 있는 자이다. 하나된 나라에서는 수호자와 보조자가 스스로를 장인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나라다.

또한 각 그룹이 각자의 기능을 실행할 때 필요한 덕목을 잘 실현하는 사회가 하나인 폴리스이다. 플라톤의 이상사회는 각자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는 공간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힘든 일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채운샘은 이것이 탐욕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탐욕은 물질적 축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이 몸을 만들고 생각하나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면 '우리의 배움도 이 생각하나 바꾸는 작업이구나!' 다시 되새김하게 된다.

플라톤의 하나된 나라는 각 그룹이 조화된 사회이니 좋을 것이라고 쉽게 동의했었다. 하지만 좋다는 하나 안에는 각 그룹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성실함이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란 이상적 좋음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인 것이다.

 

2. 나라와 개인에게 필요한 3부분이 무얼까? 개체와 국가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점은 무얼까?

"분별은 일종의 앎(episteme)인 것이 분명하이. 사람들이 분별 있게 되는 것은 무지(amathia)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게 확실하겠기 때문일세."(428b)

"용기란 일종의 보전이란 뜻일세. ~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무엇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지, 이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소신(판단)의 보전일세."(429d)

"절제란 어쩌면 일종의 질서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일 걸세. 사람들이 '저 자신을 이긴다'(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표현을 써서 말하듯이 말일세."(430e)

플라톤에게 폴리스는 우리가 이 시대에 생각하는 개인과 충돌하는 국가가 아니다. 폴리스는 개인의 영혼이 외화(外畫)된 상태다. 그러므로 개인의 올바름을 찾아가는 대목에서 국가를 세워 그 안에서 올바름을 찾아보고 다시 개인의 올바름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올바름은 지혜, 용기, 절제라는 덕목이 구현되는 조건이자 근본적 힘이 된다. 이 덕목들이 각 그룹에서 충실히 발휘될 때 개인의 올바름은 물론 폴리스의 올바름이 만들어진다.

세 그룹 사이의 참견이나 상호교환은 폴리스에 해악이 된다. 이는 폴리스를 계급사회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세 그룹이 상이한 처지(감정 상태: pathos)와 상이한 습성(성격 상태:hexis)을 가지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의 평등의 개념은 그 위치(상황)에 맞게 불균형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남자는 공적 책임을 진 자유민이었고 여성은 참정권은 없지만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주체였으며 노예도 존재하는 사회였다. 그렇다면 통치자란 인재를 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춘 소수의 자질을 갖은 사람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각 그룹에게 요구되는 덕목(통치자-지혜, 수호자-용기, 생산자-절제)은 그들의 품성에 필요한 자질이자 잘 닦는다면 개인의 행복인 것이다.

세 덕목이 개인이나 폴리스에서 조화를 이룰 때가 최상의 상태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이성중심주의자는 아니다. 이성이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거스르려는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제에서 말하는 ‘자신을 이긴다’는 표현인 것이다. 이성으로 욕망을 억누름이 아니라 욕망이 끌림을 만들 때 지혜가 이 같은 끌림이 최선인지 판단하고 조화를 만드는 것이 절제인 것이다. 강한 ‘나’는 외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3가지 덕목이 충실히 수행되는 자기 통치이자 자기배려가 가능한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나를 돌볼 수 있는 개인이 모인 곳이 바로 폴리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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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정해주신 토론꺼리를 들으면 먼저 당혹감이 찾아온다. ‘하나’, ‘지혜’, ‘용기’, ‘절제’등 모든 단어들을 책에서 봤고 익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들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눠야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함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때서야 '아!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구나!'라는 "무지의 지"를 깨닫게 된다. 강의를 시작하며 채운샘은 텍스트를 통해 ‘낯섬’을 만나고 내 생각에 균열을 만드는 작업이 철학책을 읽을 때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지혜, 용기, 절제란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 낯설게 다가온 시간이었다. 지혜란 세월과 함께 찾아오지도, 용기는 힘을 낸다고 만들어지지도, 절제는 참는다고 되지도 않는다. 새롭게 배운 단어들은 배움에 끌리는 자세가 지혜를 만들고,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용기이며, 자신을 보다 좋게 만드는 이성에 승복하는 것이 절제의 모습이었다. 이젠 이 배움을 내 삶에 조금이라도 작동하게 만드는 수련이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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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1 23:16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신분이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ㅋㅋㅋ 사실 그런 사회가 있을까 싶네요. 고대 그리스 당시에 참정권이 있는 시민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월감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그저 공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평등과 불평등에 관해 예민한데 플라톤을 보면 정말 평등과 불평등이 뭔지 생각하게 되네요 @.@ (어지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