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월 8일 플라톤 4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17-03-11 22:14
조회
237
   플라톤과의 네 번 째 만남  (2017.03.08.)

   들뢰즈는 노년의 좋은 점을 ‘놓여남’이라고 했다지요. 그런데 이 좋은 노년에 저는 왜 안하던 짓을 굳이 하며 ‘붙잡힌’ 걸까요. 가만 생각해보니 진짜 놓여나야 할 것은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타자의 시선과 견해에 붙들려 살아온 ‘노예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일주일에 두 번, 과감하게 ‘외유’하는 이유랍니다!   늙어서 해야 할 일은 ‘기,승,전, 공부!’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ㅎㅎㅎ

   자신에게 낯설어지기!

   플라톤과 네 번 째 만났습니다. 아직은 서걱거리지만 그래도 쪼끔!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 할 정도가 된 것 같아 좋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각 없이’ 살았다는 걸 또 한 번 확인했던 시간이었지요.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거기에 나타난 생각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이놈의 초월자적 습관을 벗어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그런 습관 때문에 텍스트 속에서 만나야 할 ‘낯선’ 개념들을 번번이 놓치고, 게다가 한 술 더 떠 그것들을 내 식대로 동일화해버리는 파쇼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요.(이런 연애 오래 못갑니다! 자고로 연애는 ‘생성’이 생명입지요!)

   채운쌤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런 우리의 생각의 습관에 ‘균열’을 내주셨습니다. 공자께서 ‘仁, 義, 禮, 智, 信’, ‘學, 朋, 安’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인간’과 ‘행복’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는 그 구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지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존재의 지평에서, 동일성’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개념의 구도를 본다는 것’이며, 그걸 통해서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지점까지 가닿을 때, 내 생각이 형성된 물질 조건이나 상태를 알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출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어요. 플라톤과의 연애를 그렇게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쉽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 ‘생성’을 마련하는 것이 공부고, 그런 ‘도주’를 쉼 없이 하는 것이 ‘수행’이니... 참 멀고도 험한(?) 길을 우리가 함께 가고 있지 말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가진 국가에 대한 생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상태와 국가의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을 동일시하지요. 이 텍스트의 제목이 『국가·政體』인데, 정작 플라톤의 관심은 ‘개인의 영혼의 올바름’에 있지요. 플라톤은 ‘국가의 정치는 개인의 영혼의 상태가 의인화된 것’으로 보았다지요. 그래서 “개인의 본성은 국가에 맞닿아 있는 것이며, 국가를 통해서 보면 개인의 본성을 볼 수 있고, 따라서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개인의 영혼을 돌봄이며, 자기의 영혼을 돌보는 이들이 있는 나라에서는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진다!”라는 ‘낯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쌤은 말씀하셨지요.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행복을 동일시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정말 ‘낯선’ 이야기지요.

   그런 플라톤의 낯선 생각의 ‘구도’가 우리가 가진 생각에 ‘균열’을 일으킬 때 그것이 공부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가진 생각대로 개인과 국가를 충돌적 가치로 전제하고 윤리적 질문들을 던진다면 ‘시스템’만 바꾸려하는 뻔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을테니까요. ‘(개개인의) 내적 영혼의 훌륭한 상태는 공동체 전체의 훌륭함과 직결된다!’ 는 플라톤의 생각의 구도로부터 우리는 어떤 ‘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플라톤의 개념을 살아야 한다’고 쌤께서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시대만의 고유한 한계와 독특한 방식으로 그 시대의 개념을 사유하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척도와 기준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지평에서 마련된 것이지요.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좋음’의 기준과 척도는 이 시대의 자본과 미디어, 교육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일테구요. 이렇게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한계와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척도와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쌤께서는 ‘平’, ‘等’, ‘均’이라는 낱말을 예로 드셨지요. 우리는 이 낱말들을 ‘평등하다, 균질하다’처럼 ‘모두가 똑같다’는 납작한 이미지로 새기는데, 근대 이전에는 이 말들이 ‘그 계급에 맞게, 상황에 맞게, 지위에 맞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지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두가 똑같다’라는 전제는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느 시대나 그 시대가 갖는 고유하고도 독특한 방식이 있어서 우리가 가진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에,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합니다.

   푸코는 ‘어떤 시대에서 개인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규정되는가?’라고 말했다지요. 푸코가 말한 ‘다양한 주체화의 양식’을 계발하는 문제는, 어떻게 지금 이 시대와 다른 기준과 척도를 만들어내어 ‘나라는 존재를 발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문제일 겁니다. 텍스트 안에서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사회의 주체화의 양식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우리 자신이 낯설어질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는 공부!   2500년이라는 주름 잡힌 시공을 아우르며 플라톤과 찐하게 연애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의 영혼의 올바름과 국가(공동체)의 올바름

   플라톤에게 있어서 ‘앎’은 ‘실천성’이 들어가 있는 말이지요. 그래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덕목은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인들의 어법에 ‘올바름’은 ‘자기 일에 전념하는 자’, ‘좋다’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왜 올바름(正義)’을 ‘각자가 자기 성향에 따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라고 말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채운쌤께서는 올바름이 ‘4주덕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지혜, 용기, 절제의 3가지 덕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힘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힘(dynamis)’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실현된 상태를 ‘aretē’라고 하지요.

   당시 아테나에서 통치자 부류는 폴리스 전체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부류로 ‘知的인 판단력’이 꼭 필요한 부류였습니다. 그래서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힘=총체적 앎’인 지혜(sophia)야말로 통치자부류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지요.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지혜는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를 가진 소수의 그룹만이 통치자 집단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수호자 그룹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인 용기(andreia)는 ‘소신을 흔들림 없이 가져갈 수 있는 힘’이며, ‘믿는 바를 보전하는 힘’을 말합니다. 보전은 ‘폴리스에 내려오던 법(nomos),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지요. 이미 여러 차례 격동적인 변화를 겪은 플라톤은 어떤 새로움을 만드는 것보다 제우스 시대로부터 이 폴리스에 내려오던 법(nomos)을 보전하는 힘, 소신을 가지고 폴리스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쌤은 ‘보전’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셨는데요, ‘보전’은 단지 고스란히 옛 것 그대로 보전하지 않고 언제나 ‘해석의 새로움’을 곁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식’이라고 하셨습니다.

   플라톤은 절제(sōphrosynē)를 ‘일종의 질서’요, ‘협화음, 화성’을 닮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절제는 서로 다른 ‘상이한 요소들 간의 조화’, ‘다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기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쌤께서 ‘참견’과 ‘상호 교환’이라는 개념과 함께 겹쳐 말씀해주시니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폴리스는 만들어질 때부터 ‘좋은 상태, 올바름’이 있다고 말합니다. 올바름은 각자 서로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게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기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통치자에게 맡긴) 정치가 잘못되었다면 (이미 나도 그 폴리스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나도 감당할 부분이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이렇게 ‘참견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그런 자들로 폴리스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하며, 덕목과 수련이 다른 세 부류가 참견하고 상호 교환하는 것은 해악이라고 했다지요.

   채운쌤은 중용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주어진, 부여받은 명을 따르는 것이 道’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道’를 잘 닦아가는 것이 ‘교육, 修道’라고 하셨지요. 지식인은 지식인의 길을 성실하게 가고, 농, 공, 상, 각각의 부류는 제 각각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것. ‘道’라는 것이 ‘절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命대로 부여받은 길로 제 각각 사는 일’이 사실 가장 쉬운 일일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이토록 혼란스러워할까요?

   플라톤이 말하는 세 가지 덕의 작동방식은 개인과 국가에 있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가 주되게 작동할 뿐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다’(293쪽)는 것이지요. 자신이 지닌 주 덕목, 이것을 ‘pathos’라고 하는데요, 플라톤은 개인의 혼 안에 지니고 있는 이 덕목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개인의 영혼의 올바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조화로움은 ‘자기 수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 시대는 ‘자기 혼을 돌보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련’을 가능하게 해준 곳이 ‘아카데미아’였고, 그 교육기관에서 수련을 통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로서 자기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요. 플라톤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자들의 집합체를 ‘폴리스의 좋은 상태’라고 여겼지요. ‘타자를 통치할 수 있는 조건은 자기 통치로부터 비롯된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이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천 년 전 이 고대 사회에 존재했던 ‘주체화의 양식’과 마주하며 지금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 자신이 나 스스로부터 주체화될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 ‘놓여남’을 뒤로 하고 능동적인 ‘붙잡힘’을 선택했지만,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플라톤의 ‘하나’ - 생성과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플라톤 철학

   플라톤에게 ‘하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하나’는 ‘조화와 질서’였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현상세계가 변한다는 사실, ‘감각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변화하는 것 속에는 참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변화무쌍한 세계의 배후에 ‘참된 무언가’가 있다고 하며, 그 참된 무언가를 기준으로 이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지요.

   이제 5권부터 나오게 될 ‘이데아’라는 개념이 그것인 것 같은데요, 쌤은 플라톤 사상의 가장 큰 맹점이 ‘생성’과 ‘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 ‘생성’의 철학이라면 플라톤적 사유는 초월적 사유로 본질, 참, 진리, 이데아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 논리 속에서는 ‘변수’를 별것 아닌 것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변수’와 ‘차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보느냐, 존재를 존재케 하는 핵심적 문제로 볼 것이냐가 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합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에 대해 공부하게 될텐데요, 5권부터 만나게 되는 ‘이데아’에 대해 공부할 때 이 점을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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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3 09:35
    현숙쌤은 이미 공부와 연애를 하고 계시는 상태인 것 같은데요 ㅋㅋ 확실히 플라톤의 시대에서 각각의 '개인'이 어떻게 의미를 가지는지 따라가야 하는데, 지금의 눈으로만 너무 보고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ㅠㅜ 플라톤의 세계가 지금을 살아가는 저와 어찌 접속할 수 있을지...! (너무 자주해서 밋밋한 이 반성이 또 나왔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