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월 15일 5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이미영
작성일
2017-03-17 07:33
조회
232
이번 주는 플라톤의『국가·정체』5, 6권을 공부했다. 다른 주와 달리 책의 분량이 많았다. 채운샘께서 5권의 앞부분 보다는 뒷부분과 6권을 중심으로 꼼꼼하게 정리한 후 마지막에는 한 단락 정도 자기 질문을 요약해 오라고 했는데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다.

글을 쓸 때도 욕심을 버릴 수 없다.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느끼면서도 포장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임을 드러내는 글은 그런 꼼수마저 보여 준다.

공부한 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말과 행동보다는 글로 서로 만나고 알게 되었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욕구는 계속 되어야 하리라. 우리의 생명력이 드러나는 길이니까.

 

질문의 방식

 

텍스트의 내용이 ‘실현 가능하냐?’고 묻는 것은 질문이 아니다. 시대마다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가 없는 전제는 없다. 각 시대마다 인식하지 못하는 전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제를 모른다. 예를 들면, 우리 시대 ‘정의’의 개념은 분배, 인권문제 등이 들어가지만 동양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 인간의 도리를 말한다. 플라톤 시대의 ‘정의’(=올바름)는 내가 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제대로 처신하는가의 문제 즉, 태도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 철학의 근거를 살펴보고 우리 시대와 비교 후 우리의 전제를 파악하고, 또 다른 전제를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왜 플라톤은 인간의 세계를 알 수 있다고 전제 했을까’라고 질문을 가져보자.

플라톤은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과 같다고 전제했다. 인간이 인식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전제와 개념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 질문해보자. 플라톤의 안경을 쓰고 뭐가 보이고 뭐는 보이지 않는지를 탐구해 보자. 철학을 배우면 세상이 다각화되어 보인다. 그 후 스스로의 안경을 만들어 봐야 한다.

니체는 관점주의(원근법주의)를 말했다. 이것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어떠한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그것을 관찰하고 인식하는 주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화하고 관점화 했는지 배워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는 그의 윤리적 태도 및 삶의 태도가 들어 있다. 플라톤의 사유와 개념을 통해 자기가 갇힌 프레임을 질문하라.

 

선(善)의 규정과 인간의 본성

 

선을 악을 행하지 않는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네거티브한 방식이며 기독교의 방식이다.

니체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방식은 생각해서 내가 도덕을 구성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플라톤의 선(善)에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다 있다. 그는 세상이 타락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학을 강조한다. 철학은 우리의 욕망과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철학이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이 논리는 나중에 기독교가 다른 철학자가 아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가져온 근거가 된다.

소피스트들은 노모스(관습)가 제우스로부터 왔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따라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살다가 이것이 안 통하는 사회를 맞이했다. 경제력의 증가로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전쟁이 일어나고 내외적으로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선 어떻게 전쟁 혹은 분쟁과 잘 화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퓌지스(인간 본성)가 문제가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은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으며 소피스트들의 현실 인식이었다. 그들은 퓌지스와 노모스를 구분했다. 퓌지스를 인간 본성(자연)으로 보고 노모스(관습, 법, 법칙)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또한 노모스는 자의적인 것으로, 퓌지스는 필연적인 것으로 봤다. 그들의 현실 인식 차제가 지배하고 이익을 따지는 인간의 본성(퓌지스)을 중요하다고 보고 노모스는 낡았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런 다수의 소피스트들에게 반기를 들며 소수의 의견으로 대응했다. 플라톤은 우주의 장인(데미우르고스)이 완벽한 질서와 균형을 이루는 자연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도 우주의 일부이니 그런 자연의 법칙이 내재화 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맹자의 사상과 가까운 인간 본성 사상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사회가 타락해서 그렇다. 그러니 본래의 인간 본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 본성이 신적인 질서, 우주 질서에 부합하도록 사유하는 자가 철학자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지성의 가장 고도의 사유방식이며, 그 모든 것을 꿰뚫는 자연의 법칙을 아는 것이다.

플라톤은 우주적 질서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런 세상의 타락한 상태를 잘 걷어내면 우주의 질서가 구현된 공동체와 개인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폴리스란 실존을 영위하게 해주는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래서 질서 정연한 우주와 그렇게 조화를 이루는 폴리스와 그것이 내재되어 있는 인간은 하나라고 보았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모든 악의 근원은 사유재산과 가족이었다. 그것을 내 것으로 사유해선 안 된다고 했다. 즉 일체의 사심은 제거해야 한다. 더군다나 통치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통치자란 자기를 위한 것이 폴리스를 위한 것임을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나로 살아가는 것이 폴리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우주적 질서를 인지하며,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거나, 권력자들이 진실로 철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탄핵심판 과정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대리인단 측에서도, 촛불 광장에서도,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에서도 인용되었다. 2400년 전 사람인 플라톤의 책이 이렇게 여러 갈래로 인용되었다는 것은 해석의 다채로움 때문이겠다.

그러나 맥락을 무시하고 오독한다면 공동체란 한 집단이 아닌 모든 구성원이 좋은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논리를 무시하고 자기주장만 한 꼴이 될 것이다.
전체 3

  • 2017-03-17 13:34
    매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할 때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전제로 재단하거나 아니면 그저 저와는 무관한 얘기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네요. 어떻게 질문의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일단은 이 답답한 시간을 견뎌야겠죠...

  • 2017-03-17 13:44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국가는 폴리스적인 가치를 회복한 사회였는데 자꾸 그것이 가능할까? 식의 의문이 드네요. 플라톤의 안경이 씌워지기 전에 벗겨지는 것 같은 ㅠㅠ 질문의 방식을 바꾸기는 너무 어려워요,

  • 2017-03-19 18:52
    사회가 타락하는 것이 곧 철학하지 않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히네요 ㅋㅋ;; 국가와 개인이 분리된 우리는 철학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 플라톤은 오히려 철학하지 않는 삶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본 것이겠죠...! 이런 사유를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지.... 신나게 읽는 것과 달리 너무 거대한 텍스트인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