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8월 2일 후기

작성자
람이
작성일
2020-08-02 22:05
조회
148
우리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거나 피부로 느껴야지 날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기 전에 비가 내리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을 사유해 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고 흐름 안에서 날씨를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개체로써 날씨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흐름 안에서 사건을 보는 것과 눈으로 보여지는 현상만을 바라보는 것은 다를 것 입니다.

주역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일까요? 모기의 하늘과 사람의 하늘이라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하늘은 가장 높은 산 바로 위가 아니라 땅 바로 위가 하늘일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사이는 공간적 사이가 아니라 A와 B 사이같이 A가 더 이상 A가 아닌 지점과 B가 B가 될 수 있는 시점이 맞닿아 있는 한계점, 문턱, 경계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다시 보자면 하늘과 땅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인간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뒤섞임을 인간이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하늘과 땅과 분리되어 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늘과 땅의 변화, 뒤섞음을 아는 것이 인간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은 추운 조건에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더운 조건에서는 수증기가 됩니다. 물이 수증기가 되면 물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물이 얼음으로 변화하면 물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물은 죽을 것일까요? 이는 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과를 먹으면 사과가 소화됩니다. 소화된 사과는 그러면 없어지는 것일까요? 사과가 죽은 것일까요? 사람이 죽는 것도 사과의 변화같이 형태의 변화입니다. 그저 조건에 따라서 상(相)이 달라는 것 입니다. 자연에는 흐름과 운동이 있고 운동과 흐름이 특정 조건에 따라서 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과가 햇빛, 비, 바람과 같이 만물에서 오는 것과 같이 나도 만물에서 오는 것입니다. 만물이 어머니인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공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흐름이 있는 것이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운동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공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자비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물에서 내가 생성되고 내가 해체되어 만물이 되니 행동하나하나에 신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늘과 땅의 거대한 운동차원에서 바라보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것 입니다. 하루를 소풍을 가는 사람과 한 달을 소풍 가는 사람의 준비의 결은 다를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과 하늘과 땅 사이의 운동을 차원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결이 다를 것입니다. 자신의 사건을 그저 사건으로 보는 것과 전체 흐름에서 보는 것은 다를 것 입니다. 주역을 배움에 있어서도 하늘과 땅의 운동에서 흐름을 바라는 하나의 언어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택뢰수의 괘는 따를 수 입니다. 따르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따르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따르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맞이하는 변화의 국면에서 어떤 것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면 변화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변화할 때 따르는 가치는 ‘이익과 돈’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돈이 되거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는 선택합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에 기준에 대한 지혜가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대학교수 자리를 제안했을 때 철학은 대학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자신이 추방 당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도 참전 후 막대한 유산을 전부 기부하고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무엇을 택하고 택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돈’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 밖에 없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변화할 때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판단하고 따를 수 있는 지혜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은 뭐가 좋은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주지 않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판단 할 수 있는 생각의 길을 안내해줍니다.

변화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것입니다. 택뢰수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이해하는 괘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내부와 외부에서 옵니다. 아프거나 회사를 그만두거나 부모님이 돌아가는 것과 같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의 국면을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것과 같이 감정의 이동에 자신의 기를 소진합니다. 오히려 변화를 자연의 흐름으로 본다면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사건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의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의 소모가 아닌 사건을 직시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는 방향이 아닌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고 남을 이해하면 더 이상 우리는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를 하나의 사건이 아닌 흐름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감정의 잉여는 없을 것 입니다. 흐름에 맞추어서 살아가면 될 것 입니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는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하고 일을 하고 있으면 바쁜 일상 속에 있어서 언제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지 몰라서 전전긍긍합니다. 몸이 바쁘기보다는 마음이 바쁜 삶을 살고 입니다. 그러나 때를 알면 일할 때는 일을 하고 쉴 때는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산풍고는 그릇에 벌레가 우글우글 있는 형태입니다. 부패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괘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일이 어그러진 모양을 생각하지만 주역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다는 것은 전환점(사건의 변곡점)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산풍고는 크게 선하여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문제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문제점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갑삼일하며 후갑삼일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선갑은 일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이는 소이연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이연은 문제 상황의 원인을 보는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문제의 원인을 냉철하고 신중하게 원인을 조사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일의 순서를 정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아는 일은 일의 해결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글을 쓰다 보면 아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후갑은 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은 솎아내고 가지치고 하는 숙살지기의 기운 입니다. 선갑이 일의 방향으로 일을 펼치면 후갑은 칼을 들고 펼쳐진 일 중에 관련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가지치기 하는 것입니다. 선갑이 문제의 원인을 신중하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방향성을 결정하여 펼쳐 낸다면 후갑은 그렇게 펼쳐진 일을 보고서 과감하게 상관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쳐내는 일 입니다.
전체 2

  • 2020-08-03 13:25
    겸괘부터 괘상 푸는 게 쉽지 않아서 약간 손을 놓았는데, 괘상을 푸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몸의 미생물 얘기도 재밌었고, 막으려고 하는데 계속 바람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재밌었습니다. 하나의 괘를 놓고도 태미쌤처럼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는 시도를 할 수도 있겠더군요. 무궁무진하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달려봐요~

  • 2020-08-03 16:49
    산풍고 하나만 두고도 다양하게 괘상을 뜯어보던 어제 토론시간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강의 시간에 듣게 된 '문제의 원인을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또 새로운 해석이 나왔던ㅋㅋㅋㅋ 무슨 괘를 어떻게 해석하든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서 출발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