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8.16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8-12 15:25
조회
123
임(臨) : 공명의 괘

고(蠱)괘 다음으로 나오는 괘는 임(臨)괘입니다.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제 뭔가 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라는 것이죠. <주역>을 보면 인간사가 리드미컬하게 펼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였다 하면 흩어지고,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 다음에 더 클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지요. 임괘를 보면 아래에 양효가 두 개 있고 나머지는 음효입니다. 계절로 치면 12월이죠. 가장 추운 동지(11월)가 지나고 건강한 기운이 지표면을 뚫고 나올락말락 하는 때를 앞두고 있는 때입니다. 이런 때는 괜히 흙을 파내고 올라오고 있는 싹을 뽑아내며 조장(助長)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위에서 아래를 따라 그 건강한 기운이 제대로 꽃필 수 있도록 해야지요. 괘사를 보면 위는 순(順)한 땅(坤)이고 아래는 기쁘게 솟아오르고 있는 연못(澤)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왕이 강하고 신하가 순하게 따라야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가의 이상적인 정치는 왕이 인재만 잘 배치하면 실무는 신하가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유가식 무위(無爲)정치랄까요. 지택림(地澤臨)괘는 그런 유가가 지향하는 군주와 신하의 통치의 기예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택림괘의 키워드는 감응입니다. 효를 보면 감(感)과 통하는 함(咸)자가 나와 있지요. 감(感)은 마음이 한 소리를 내는 모양의 글자입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맞추고 공명하는 모양이 감응이지요. 그래서 상(象)을 보면 임괘는 단지 명을 따르는(順命) 것과는 다르다고 나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응하게 되는 것이 바로 감응입니다. 채운샘은 이와 관련해서 '진자공명'을 보여주셨는데요, 각자 다른 박자로 운동하는 메트로눔이 다른 조작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같은 박자로 움직이는 영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조작한 대로 움직일 것 같은 기계도 사실 다른 것들과 공명하며 서로에게 맞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임괘는 이 자연스러운 공명을 이끌어내는 것이 큰 일을 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진자공명


관(觀) : 다스리는 자의 통찰

임괘와 함께 나오는 것이 풍지관(風地觀)입니다. 한자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가 많은데요, 그중에서 관(觀)은 단지 시각적으로 '보다'를 넘어서 '통찰하다'라는 뜻에 가깝게 쓰입니다. '관수행', '관찰' 같은 말들을 보아도 단순히 '보다'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풍지관괘의 괘상을 보면 바람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모양을 취합니다. 바람은 가지 못할 곳이 없고 땅은 모든 것을 순히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통찰력을 발휘하기에 딱 좋은 모양이지요. 그런데 이 괘는 단순히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통찰하는 상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가 대상을 보는 만큼 대상도 나를 바라 봅니다...0_0 이는 살필 수 있는 능력과 바라볼 만한 인간이 되는 것은 동시적임을 말합니다.

관괘는 가장 조심스럽고 경건해야 백성들이 군주를 우러러 본다고 말합니다. 제사를 지내기 전 손을 씻을 때처럼 경건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어야 군주는 자신을 백성들에게 보일 수 있지요. 관괘는 일정한 위치에 있는 자는 자기 행동을 스스로 점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괘의 효사를 보면 '자신이 내는 것을 보라(觀我生)'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자기를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는 조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약 이 보는 능력이 없다면 백성들에게 곳간을 열고 아낌없이 베풀어도 욕을 먹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관괘의 상전을 보면, "지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백성을 살펴서 가르침을 베푼다(省方觀民設敎)"라고 나옵니다. 백성을 살피고 또 백성이 우러러볼만한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그것은 무조건 베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수단은 바로 교육(敎)이고요. 교육은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더 앞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자가 시행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과연 그 넓은 시야를 가지고 볼 수 있느냐, 이것이 남에게 보여질(爲觀) 수 있는 사람의 자질인 것입니다.

임괘와 관괘 모두 다른 괘들에 비하면 밍숭~ 합니다. 임괘는 태괘에 비하면 아직 '한 방'이 모자라고, 관괘는 군주가 양강하고 또 아래와 응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뭔가가 이루어지는 건 없어 보이죠. 하지만 임괘와 관괘는 일의 시작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임하느냐를 문제 삼습니다.


질료와 형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형상설'을 주장하면서, 질료에 형상(폼)이 부여되어 개체가 된다고 했습니다. 가령 '벽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묻는다면 '흙을 틀어 넣어 만든다'라고 할텐데, 그럼 흙은 틀 없이 절대 벽돌이 될 수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을 형상의 우위로 환원하는 것이죠. 이때 질료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기다리기만 하는 무력한 것으로 남습니다.

시몽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설을 비판합니다. 흙은 그저 거푸집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질은 그 자체로 자기 형상에 개입합니다. 채운샘은 씨앗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식물이 있으려면, 씨앗에 흙과 바람과 태양빛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이 있지 않으면 식물은 불가능하니, 씨앗 자체에는 아무런 능동성이 없는 것일까요? 사실 씨앗에 흙과 바람과 햇빛과 물을 만날 수 있는 능동성이 있기 때문에 식물이 가능한 게 아닐까요? 벽돌도 마찬가지입니다. 흙과 물이 섞여서 점성이 생긴다는 성질이 없이, 벽돌 틀만 있어서는 벽돌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질료도 형상이 드러나도록 능동적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회와 개인의 차원으로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구성주의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 진다고 했습니다. 주체는 만들어진다! 이것으로 인간의 오만을 끌어내렸지요. 하지만 그 다음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개인을 품은 사회' 라고 하면 개인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처럼 무력할 뿐인 것이죠.

들뢰즈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는 기계'라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시몽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기계는 시작 스위치를 누르면 움직이고 끄면 작동을 멈추는 수동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또 기계 부품도 계속 같은 일만 무료하게 하는 것이 아니죠. 가령 물레방아는 물의 수위에 따라 자기를 조절한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던 진자공명만 보더라도, 사물은 서로의 운동에 공명하며 서로의 운동을 맞춰가는 능동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을 단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는, 운동중인 것으로 볼 때 가능한 사유입니다.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개개의 인자들 서로가 서로의 원인임을 보는 것이죠.

만약 사물을 하나의 에너지로 본다면, 한 개인의 수행은 그 사람만의 수행으로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에너지들 안에서 역동적으로 자기를 펼치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1/n이 아니라는 것.



다음 시간은

화뢰서합(火雷噬嗑), 산화비(山火賁)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임괘와 관괘 시험봅니다. 상전의 키워드랑 괘사, 효사 외워 오시구요~


간식은 영주샘.

후기도 영주샘.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