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8.9 주역과 글쓰기 후기

작성자
임영주
작성일
2020-08-15 21:10
조회
154
2월에 시작한 주역 수업도 얼렁뚱땅 벌써 후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뭐든 처음 시작할 땐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다가 한 절반 정도 지나고부터는 시간이 가속이 붙는 듯 후딱 가버리는 느낌적인 느낌이요. 정신 바싹 차려야겠습니다.

아 그 전에 3학기 시작과 함께 주역팀에 신입회원이 투입된 경사가 있었습니다. 짝짝짝! 지난 학기에 혜림샘이 못 나오시게 되어 안 그래도 단출하던 멤버 구성이 더욱 쪼그라들게 되었는데요, 다행히 ‘젊은 피’ 류수정 샘이 합류하셨습니다. “창조적 진화를 위해” 참여하셨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셨는데요. 음... 주역과 글쓰기가 동서양 철학을 횡단하는 강좌이긴 하지만, 주역의 방대함을 공부하다 보니 서양철학은 쬐끔씩만 한다는 것을 다행히 눈치채지 못하시고 덜컥 등록을 하셨더라고요. 일단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 주역 수업에 오신 것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임(臨)괘와 관(觀)괘를 공부했습니다.

임괘의 한자인 臨은 ‘임하다, 다스리다, 대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의미가 있습니다. 임괘의 괘가 지택림, 즉 아래 두 개의 양효 위에 네 개의 음효가 쌓여있는 모습으로 아래 두 양효가 막 생겨나 양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기운이 위로 쫙 뻗어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괘는 이전의 썩을 대로 썩은 고(蠱)괘의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고 이제 새로이 큰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는 형통의 시기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괘를 ‘元亨利貞’으로 전체 괘를 풉니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 ‘여덟 달이 지나면 흉함이 있다(至于八月 有凶).’를 붙여놓습니다. 임괘를 읽으면서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이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주역이 변화를 보고, 조짐을 읽는 것을 중요시 여기긴 하지만, 1, 2개월 뒤도 아닌 무려 8개월 뒤의 흉함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라는 반감이 들었죠. 채운샘은 이것은 이제 뭐 좀 으쌰으쌰 해보려고 하는 것에 대고 초장에 김새는 말을 하거나 사기를 꺾기 위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떤 일을 진취적으로 해볼 수 있는 때를 맞이했을 때 이것에 임하고 다가가는 자세, 태도를 경계하고, 조심시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 문제는 그것을 막 시작할 때보다는 조금 잘 되기 시작할 때 생기기 마련입니다. 운전만 해도 저도 면허 따고 처음 1-2년은 워낙 조심히 다니고, 속도도 많이 내지 못해서 사고가 없었죠. 그러다 2년이 넘어가면서 괜찮다 싶어 음악도 크게 틀고, 과속도 하게 되었죠. 이렇게 방심하고 까불다 사고를 낸 경험이 있습니다. ‘8월이 되면 흉하다’도 이런 시기를 말함인 것 같습니다. 두 양이 생겨나 큰 일을 추진해 갈 수 있는 때라 형통함이 계속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래서 방심하다 보면 문제를 잘 보지 못하게 되죠. 뭘 해도 잘 되니까요. 문제가 생겨도 형통할 때는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문제의 싹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변화의 국면이 왔을 때 확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죠. 즉, 좋을 때이든 나쁠 때이든 자신이 놓여 있는 그 때를 전체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 있음을 계속 주시하고 통찰할 수 있어야 함을 주역에서는 언질을 주고 있죠. 자신이 ‘잘 풀린다’고 판단하는 때도 그것은 변화하는 전체국면을 지나는 한 국면일 뿐임을 잊지 않고 있으면 때에 휩쓸려 쉽게 자만하지도 혹은 자책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죠.

생각해보니 제가 ‘8개월’이라는 단어에 걸려서 시간상 한참 남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맘 놓고 있다 보면 어느덧 벌써 기울어질 때가 됩니다. 올해도 벌써 8월이 된 것만 봐도 그러네요. 즉, 여섯 효가 모두 음인 순음지월인 10월(坤)을 지나 맨 아래에 양이 하나 자라난 11월(復) 다음에 오는 괘가 바로 임괘(12월)이지요. 이렇게 양이 자라나다가 순양지월인 4월(乾)을 지나면 어느 순간 위의 네 개의 양효 아래 두 개의 음효가 자라게 되는 6월(豚)이 오게 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국면 국면이 지나는 것을 보니 8월이 그렇게 멀리 있는 달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며 지금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의 깊게 단단히 딛을 것!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임괘에서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함(咸)’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은 초구와 구이효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어떤 큰 사업이나 일을 벌여서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다른 것들과 만나고 섞여야 합니다. 임괘는 상괘가 땅이고 하괘가 연못입니다. 물과 땅이 접해있는 모양입니다. 완전히 다른 물질이 간극 없이 긴밀하게 접해있는 모양입니다. 채운샘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임해있는 상황을 단순히 ‘접속’이나 ‘소통’으로만 보지 말고, 각각이 서로에게 임하는 태도까지도 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임함의 태도를 ‘함(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이천은 초구를 설명하면서 ‘咸은 感이니 양이 자라는 때에 음에게 感應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괘에 비해 서로 응함이 더욱 중하다’ 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이효 상전을 보면 咸臨이 단순히 ‘명령을 순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큰 일을 벌이는 시기에는 순전히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한쪽을 끌어가거나 반대로 한쪽에게 순종하기만 해서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이것을 상하의 ‘통치의 기예’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즉, 각자가 처한 능동성을 발휘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즉, 아래의 양효가 강건한 힘으로 묵묵하게 일을 추진하는 능동성과 동시에 위의 음효들은 이들을 감싸고 포용하는 능동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적 흐름과 현재의 국면을 읽고 자신의 행동을 컨트롤 하는 자신의 통치를 전제했을 때야 다른 사람과 제대로 만나 감응할 수 있고, 그래서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통치성을 전제했을 때라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따르게 하게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임괘 다음에 오는 괘가 관(觀)입니다. 괘의 모양에서 볼 수 있듯이 위에 바람이 일어나 아래의 땅을 죽 훑고 있는 상입니다. 임괘와는 반대로 네 음효 위에 두 개의 양효가 놓여있는 상입니다. 관(觀)은 ‘보다’의 뜻이 있지만 보는 차원 중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가시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넘어가는 ‘법칙성을 본다’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의 두 양효는 아래의 음효들을 내려다보는 상이지만, 그저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나 기미까지도 읽어내는 통찰의 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의 두 양효는 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아래 네 음효들의 보임이 되기도 합니다. 즉, 일정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랫사람들에게 볼만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라거나, 도덕적 당위성에 사로잡혀 나의 행동을 억지로 잘 보이게 꾸미는 것과는 분명 다른 태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앞의 임괘에서와 같이 관도 동시적 능동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고 합니다. 동시적이고 능동적인 차원에서 봄과 보임은 무엇일까요?

저는 올해 원치 않았지만 교무실에서 나이로도 경력으로도 위에서 서열 2위인 선배 교사가 되었습니다. 바로 아래로 열 살 이상 어린 후배교사들이 포진해있죠. 그전까지는 막내는 아니라도 위에 선배 교사들이 항상 있어서 제가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다녔습니다. 초구 童觀이었죠. 그런데 올해는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매우 신경이 쓰입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후배 교사들이 자꾸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예전처럼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자꾸만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도 돌아보고 좀 더 조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가 보니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니까’ 라는 불편함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가 원치 않아도, 살아가려면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에 따라 나의 행동이나 생각도 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변하고 내가 있는 장이 변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는게 능사는 아닌 거죠. 상황과 때에 따라 나는 변하고 변함을 당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관아(觀我)’는 자신이 살아가는 장과 때를 통찰하는 자가 사람들과 살아갈 때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혼자서 살면서 주변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면 전체를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말이죠.

두 번째 시간에는 드디어 질베르 시몽동님의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서론을 개관했습니다. 읽기는 했지만, 뭘 읽었는지 모르겠는, 제목도 내용도 당혹스러움 자체인 문제작(?)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뭔지 모르겠는데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읽어보게 됩니다.(이해와 상관X) 우리에게는 ‘만능 치트키’ 채운샘의 해설 강의가 있으니 그걸 의지 삼아 여튼 읽어보려고 합니다.

서론에 시몽동이 서술한 ‘우리는 개체로부터 개체화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개체화를 통해서 개체를 알려고 할 것이다.’를 풀어보면서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이미 접해 본 것입니다. 즉, 주체가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아닌, 주체(개체)를 있게 한 원인을 생각함으로써 주체를 이전 차원과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들뢰즈의 주장과 일맥상통하지요. 원인이 아니라 결과(주체)에서 출발하게 되면, 나타난 결과에서 내가 느끼는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에 따라 원인을 선별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드러난 결과는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모든 원인을 포함한 것인데, 자꾸만 우리의 판단에 근거한 유리한 원인만을 결과와 자의적으로 연관시키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그런 결과가 드러난 원인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내 식대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자의식에 사로잡혀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서 출발하게 되면 이런 원인이 미리 어떤 것의 결과를 나타낸다고 미리 규정할 수 없게 됩니다.

들뢰즈도 가시적으로 드러난 현실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규정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들은 사실은 차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잠재적 장이 특정 시공간을 통해서 드러나는 한 국면 국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것을 출현하게 만들어주는 원인의 장을 ‘전개체적 특이성’이라고도 합니다. 시몽동은 이런 장을 ‘개체와의 과정’이라고 하고, 규정된 개체 이전의 상태인 ‘전개체적 존재’들이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생기는 긴장이나 불균등을 끊임없이 해결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개체라고 합니다. 시몽동은 그래서 개체나 생명체를 ‘문제적 존재자’로 제시합니다. 이 말은 개체는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일시적인 안정이나 평형상태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아휴 여기까지 밖에 생각이 나지 않네요. 게으름 피우다 후기가 늦었습니다.  '종일건건' 이번 생에 가능할런지.... 내일 만나요!!
전체 1

  • 2020-08-21 08:59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관아(觀我)’는 자신이 살아가는 장과 때를 통찰하는 자가 사람들과 살아갈 때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태도- 지림 영주샘 까야 관아를 이렇게 정리하다니,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다시 봐도 너무 잘썼는데.... 자신감을 가져요 샘